〈 4화 〉 1부 프롤로그 주인을 무는 개는 개새끼
* * *
후루룩
눈앞에 있는 라면의 면발이 콧등을 치며 그대로 입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오아... 미쳐써..."
엄청난 맛.
진짜 개맛있다.
이게 얼마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라면인지.
물론 컵라면은 이 세계로 오고나선 엄청 먹었지만, 이건 '라면'이다.
심지어, 싱싱한 전복까지 통으로 들어가있는 해산물라면!
후루루룩!
"그게 그렇게 맛있냐?"
정신없이 라면을 들이키는 날 바라보며 묻는 성화연.
흰 반팔에 남색 반바지를 입은, 어딘가 캐쥬얼한 복장.
헬리온 아카데미의 체육복 하계버전이다.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성화연은 피식 웃으며 익어가는 조개탕을 휘적거린다.
마스는 화연이 옆에 앉아 아예 그릇에 코까지 박아가며 먹고있고.
식당의 야외 그늘막에서 하는 식사라니. 이거 완전 바닷가 여행 로망의 끝판왕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풍경.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닷가.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학생들끼리 서로 웅성대며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바닷바람이 선선히 몸을 감싸니 절로 미소가 띄워진다.
저번달의 총공습 사태도 무사히 끝마쳤으니, 이제 어느정도 쉴 타이밍이 됐다는 뜻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헬리온 아카데미 1학년생 수학여행이란 정말 완벽한 선택이다.
그나저나 수학여행 하러 온 곳이 제주도라니, 쩌러욧.
역시 돈걱정이란 없는건가...
대단해 아카데미! 학생복지에 엄청난 힘을 쏟아붓는구나!
"서우는 언제온대냐? 곧있으면 다 해변가로 이동할텐데."
"활동비 신청하러 갔을걸. 아마 10분뒤면 올거야."
"나 수영복도 준비해왔는데. 그거 살려고 줄도 섰어! 신상이야. 볼래?"
마스가 가방에서 푸른색의 반바지 하나를 꺼냈다.
뭔가 코팅돼있는 모습이...
설마 저게 수영복이야?
"...상의는 안가져온거냐?"
"복근 자랑해야지! 복근 괜히 키웠냐!"
"미친넘..."
노출증 환자가 여깄었구만.
성화연은 그런 마스의 뒤통수를 한대 퍽 친다.
"아! 왜!"
"남들 배려좀 해야지, 수치심은 생각 안하는거냐!"
"내게 그딴게 있을리가!"
"좀 챙겨!"
뻑
"으엑"
누나랑 동생같은 모습이네.
"풉."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
후식으로 나온 팥빙수까지 떠먹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고개를 돌려보니 서우가 흰 봉투를 들고 뛰어오는 중.
활동비인가.
봉투가 두둑한 걸 보니 돈 걱정은 없을 것 같네.
"많이 따왔다!"
"줴엔장 한서우! 믿고있었다구!"
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서우의 얼굴에 띄워진 저 행복한 미소가 어째선지 더 밝게 느껴졌다.
"뭐부터 할래?"
화연이가 묻는다.
"아직 자유시간은 10분정도 남았으니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을까..."
"난 메로나."
"나도!"
"루시 넌 뭐먹을거야?"
분위기 봐서 나도 적당히 메로나나 먹을까.
"올때 메로나."
"누가 사올래?"
"당근빠따 가위바위보 아니냐?"
"아, 나 가위바위보 못하는데."
"내 알바냐!"
아니 잠깐 내 의견은...!
"가위바위..."
아 잠깐만요!
"보!'
...
아무튼, ......그리 됐다.
띡.
"2000원입니다~"
초록색의 길다란 봉지들이 검은 봉투안에 넣어진다.
묵직하게 아래로 꺼지는 봉투.
"운빨 진짜..."
역시 난 가위바위보 젬병이다.
한번 지고나니깐 떼써서 어떻게든 삼세판까지 끌고갔는데, 다 지냐.
끌고간것도 쪽팔려지는 처참한 실력이다.
아니, 가위바위보니깐 실력은 아니려나.
운빨이지. 응.
불공평한 세상같으니라고.
봉투에서 메로나 하나를 꺼내어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메론맛.
"하아"
입에서 새하얀 김이 새어나온다.
차가워서 기분 좋네!
봉투를 흔들며 서둘러 애들이 모여있는 해변가로 달려갔다.
.
.
.
"야, 김! 김!"
"바닷물 다끓는다!"
마스의 주변에 있는 물들이 끓더니 증발한다.
...저걸로 소금장사하면 돈 엄청 벌겠는데?
지금 있는곳은 바닷가.
사람이 엄청 많이 몰려있다.
여름이라 그런지 휴가 온 가족들도 많이 보이고.
여기저기 튜브타고 물튀기고 난리도 아니다.
으악 어수선해.
"루시, 넌 안들어와?"
"나 수영 못해."
나를 향해 묻는 서우에게 말해준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우.
마법을 쓰면 물위에 떠있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텐데, 라는 생각같은거 하고있겠지, 저거.
근데 난 그냥 바다가 싫다.
음, 정확히는 물속에 들어가는거.
왜, 바닷물은 너무... 비릿하잖아.
차가워서 들어가있으면 입술이 파래진다.
그것말고도, 그냥 이렇게 모래 위에서 일광욕하는게 기분 좋지 않나?
굳이 들어가서 바닷물이랑 섞일 필요는...
"그러지말고! 바닷가 왔으면 바다엔 한번 들어가봐야지?"
"으악?!"
어느새 내 등뒤로 다가온 성화연이 겨드랑이 아래를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여성용 수영복따위 안입겠다고 난리를 치던 나에게 기어코 입혀버리고 만 성화연은, 이젠 나를 바닷속에 집어넣으려고 하고있다.
"으, 아니야아아아!"
발버둥을 쳐보지만, 몸집이 너무 작아서 발이 도저히 닿질 않아.
결국 시시각각 바다는 내 발밑으로 다가오고...
"코 막아라!"
"...!흡!"
풍덩
"으헤에읍푸푸!"
온몸이 차가운 바닷물로 감싸진다.
귓가로 들리는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
"으헥, 성화연!"
바닷물 삼켰어!
팔에 마력을 휘감고 수면을 한번 쎄게 치자, 아주 뭐 그냥 분수처럼 물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으아아악!"
"마스! 불 꺼라! 물 끓잖아!"
"물 대신 소금이다!"
"눈! 내 눈!"
...개판이야.
대포가 떨어진 것처럼 물이 솟구쳐오르고, 흠뻑 젖어버린다.
"에흐으..."
물에 젖었는데,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네.
이런것도 좋아.
평범한 물놀이와는 어딘가 다른, 마치 전쟁을 방불케하는 거대한 대포형태의 물이 날아다니는 풍경이...
철벅!
...?
"...누구냐."
"으힉...!"
"한서우 넌 죽었다."
...거대한 물의 벽이 솟아올랐다.
.
.
.
"어흐, 오늘 소금 엄청먹었다."
온몸이 녹초다.
너무 격렬하게 놀았어...
"물이 그렇게 다 증발해버릴 줄이야..."
"자칫하면 벌금낼뻔했다. 활동비 그걸로 다 날려먹을 뻔했어."
"아니,바닷물 좀 증발시켰다고 벌금이라니...너무한거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한참을 놀다보니, 어느새 밤이됐다.
여기저기 호텔에서 불이 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식당에서도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우리도 막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
흑돼지라 그런지 역시 맛있더라.
두꺼운게 입안에서 육즙이 팡팡 터져요.
지구에 있었을때도 일년에 한번 먹어볼까 말까 했던게 흑돼지인데,여기서 이렇게 먹어보다니.
다른 조 애들도 그 식당에 많이 모여들었던거 보면 맛집이었겠지.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맛 하나는 끝내줬어.
이쑤시개로 이빨을 콕콕 쑤신다.
"흐아 배부르다~"
"우리끼리 6인분 먹은건 알고있냐."
"많이 먹으면 좋은거지."
"그러셔."
"그나저나 불꽃놀이 언제 시작이라고 했드라."
"대충 숙소 들어가서 씻고나오면 시간 얼추 맞지 않을까?"
"그런가?"
"그럴걸."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자정까진 나와라! 졸아서 시간 놓치지 말고!"
"오케이!"
마스가 저 멀리 뛰어가며 사라진다.
그럼 나도 씻어볼까.
학생들을 따라 숙소로 발을 옮겼다.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
이 몸도 6개월 가까이 봐오다 보니깐 어느정도 익숙해져서, 딱히 별 감흥은 안든다.
음, 아무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라. 못참지.
바로 반신욕 들어간다!
스윽
"앗뜨거."
슬쩍 발가락을 갖다대니 뜨겁다.
발부터 천천히...
한번에 들어가면 너무 뜨거워서 튀어나올걸.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욕조속으로 들어간다.
첨벙
"흐아아아~"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자, 온몸이 녹는 느낌이야.
편의점에서 사온 거품입욕제를 꺼내든다.
찌익
거품입욕제를 물에 풀어넣자, 실시간으로 새하얀 거품들이 보글보글 생기는 중.
부드럽고 푹신거리는 감각이 어딘가 편안하다.
"이게 야스지..."
얼마만에 쉬어보는거야.
조용히 눈을 감고 이순간을 즐긴다.
그러고보니...
아까 화연이가 몇시까지 나오라고 했더라.
분명 12시까지였지.
30분정도만 즐기다 나가자.
안늦겠지, 뭐.
.
.
.
"왜 이렇게 늦게나와?"
"욕실에서 잠들어버렸어요... 죄송함닷..."
늦어버렸다.
자버렸어.
너무 편안하고 따뜻해서 목욕하다가 잠들어버렸다.
젠장.
결국 깨어났을 무렵은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직전.
머리 말리는것도 건너뛰고 그대로 옷만 대충 챙겨입고 뛰쳐나갔다.
"늦진 않았으니 다행이지, 뭐."
"어떻게 하면 목욕하다가 잘 수가 있는거냐?"
"알바냐!"
거품목욕을 니가 해봐야 알지.
부들부들.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게진 나에게 서우가 말을 걸어온다.
"루시, 솜사탕 먹을래?"
"오, 무슨맛?"
"...? 맛은 모르겠는데, 파란색."
"분홍색 있어?"
"분홍색?"
솜사탕은 분홍색이 근본 아니냐!
그렇게 말하자, 사오겠다고 달려가는 서우.
"아, 잠깐!"
...
"이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구만.
나쁘지만은 않아. 좋아.
서우가 건네주는 솜사탕을 받는다.
와, 엄청크네.
거의 내 얼굴만한 크기다.
내 얼굴이 작아서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건가? 모르겠어.
솜사탕을 입에 넣어 한입 뜯어내자,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오우야."
"맛있지?"
끄덕끄덕.
오물오물 입에서 최대한 맛을 감미하며 먹고있으니, 어느샌가 12시가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1분 남았네."
화연이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한다.
"공원쪽이다! 저쪽에서 나오는거야!"
"한눈 팔면 첫시작 놓친다."
"알아요, 알아~"
어차피 솜사탕 다 먹을때까진 안볼거지만.
팍
"응악."
솜사탕 먹고싶은데!
"불꽃놀이는 봐야지! 메인이벤튼데. 일부러 행사 일정 맞춰서 수학여행 온거래. 잘봐야지."
"아아 솜사탕!"
화연이가 내 양 볼을 잡고 고개를 돌려놔서 저항할 수는 없다.
"흐헿."
"나 솜사탕 더 사왔는데, 화연이 너도 먹을래?"
"오, 좋지!"
볼이 풀린다.
성화연이 솜사탕 하나를 집어들었기 때문.
마스는 솜사탕 대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고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인가.
[!]
행사의 클라이막스를 알리는 진행자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들려오자,어느샌가 모두는 저 하늘을 바라보고 폭죽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이 하지야."
"정확히는 30초 뒤지."
"그게 그거야!"
"암튼, 하지 인사는 뭘로하지?"
"하지? 해피하지?"
"몰라, 뭔 말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자,주변에서 들려오는 카운트다운 소리.
"10..."
"9..."
나는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분위기 타는건 막을 수가 없었나보다.
성화연이 계속 옆에서 분위기 띄우기도 했고.
결국 시작하기 5초 전쯤 되니 나도 휩쓸려 같이 숫자를 외치고 있었다.
"5!!!"
잡담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같이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4!!!"
무언가를 먹던 사람들도.
"3!!!"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도.
"2!!!"
모두 같이, 하늘을 본다.
"1!!!"
퍼엉!
"와아아아아아!"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른다.
별빛 가득한 까만 밤하늘 위로 수놓아지는 형형색색의 불꽃들.
퍼엉!
온갖 모양의 화려한 불빛들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하지를 알리는, 성대한 불꽃놀이.
옆을 바라보니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선 불꽃이 터지고, 별빛들이 빛난다.
목마를 타고있는 꼬맹이도 보이고, 서로 기대어 앉아있는 커플도 보인다.
학생들도 모두 저마다 음료수 하나를 들고 하늘을 향해 건배하는 모습.
이 모든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흐하하하하핫!"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루시, 갑자기 웃으면 미친사람같아."
"흐히힛, 하하..."
"뭐, 지금이라면 마음껏 웃어도 되려나."
"히히."
옆에서 같이 미소짓는 성화연.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화려한 불꽃들을 눈동자에 새겨두며, 그리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