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해주세요, 마수님!-3화 (3/162)

〈 3화 〉 0부 마지막. 그러니까 좀 살려주세요.

* * *

­푸걱

배에 난 총상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크기를 천천히 넓힌다.

손가락 두개정도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로.

존나 아픈데 몸이 반응을 안한다.

이거 왜이래.

­쿠드득...

고깃덩어리가 조금 떨어져나오며, 어느새 배에 있는 구멍이 생각보다 넓어졌다.

너무 그로테스크한 광경이라 토할 것 같네.

손가락을 좀더 깊숙이 집어넣는다.

그러고선 치아를 찾기위해 뱃속을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그...흐으..."

윤서아 씨발새끼...

­콰각!

저 먼곳에서 전투는 아직도 한창 진행중이고, 가끔씩 돌 파편같은게 내 근처로 날아올 뿐이다.

모랫먼지가 서서히 동굴 중앙으로부터 퍼지고 있다.

이상한 절규와 함성소리같은것도 들리고.

그저 모랫먼지속에서 시도때도 없이 번쩍이는 섬광만이 전투의 격렬함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푸슉!

아.

마구잡이로 휘젓다보니 혈관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갑자기 배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구멍이 넓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네.

그래도 치아는 찾았다.

손가락을 살짝 비틀어 고깃덩어리에 박힌 치아를 뽑아낸다.

아, 이건 너무 참기 어려웠어.

이 과정에서 그만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서아가 들었을 리는 없겠지.

전투의 소음이 저렇게나 큰데 이런 비명따윈 못들었을게 뻔해.

­"...루시?! 무슨 일이야...!"

그리 소망하고있었지만, 윤서아 이 미친년은 기어코 알아차린 모양이다.

서아가 이쪽을 돌아본다.

먼지구름을 사이에 두고 보니 어째 더 섬뜩하네.

팔다리가 칼날로 바뀐 윤서아의 실루엣은 너무나도 기형적이라 소름까지 돋는다.

음, 그래.

아무튼 난 지금좆됐다.

최대한 빨리, 몸을 일으킨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통증이 온몸을 덮치지만 움직여야해.

윤서아 저 미친년은 지금 여기서 사라져야한다.

얀데레 살려뒀다가 좋은 꼴 난 남주들 본적이 없어.

사람을 죽여보는 건 처음이지만,뭐 어때.

사람 팔도 맨입으로 뜯어버렸는데 이것마저 못하겠어?

그래도 막상 사람을 죽이라고 하니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나쁜년이지만 미안하다 서아야!

후두둑거리며 피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전투의 현장으로 발을 박찼다.

이거나 먹어랏!

윤서아를 향해 치아를 집어던진다.

"...죽어어­­­!"

사자후.

이정도면 도발은 충분히 됐겠지.

아마 내가 또 탈출시도하려는 줄 알고 윤서아는 저 이빨을 대검으로 바꿔 날 찢어버리려 할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째, 이빨은 이미 윤서아쪽으로 날아가고 있는데.

자멸이다.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작전이야.

잠시 가만히 멈춰있던 서아의 실루엣이 움직이는것이 보인다.

­"...루시..."

소름끼치는 중얼거림.

날아가는 치아를, 서아가 피했다.

"아?"

그리고 그 치아가 향하는 곳은...

전투중인 서우를 향해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있는, 육중한 체구의 할배였다.

...뭐?

누구를 향해?

"...씹..."

­푸거거걱!

"..."

결국에 그 할배는 반으로 갈라지고, 곧이어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

"...?"

...

...피가... 아니다.

...저게 대체... 뭐지?

전장의 중앙에서 솟구치는 검은 타르덩어리를 본 순간,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휘둘러지던 거대한 망치도, 목을 썰어대며 혈액으로 샤워하던 칼날도, 모두 일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순식간에 찾아온 소름끼치는 정적.

그 정적의 한가운데에서는, 꿀럭거리며 검은 타르를 뿜어대는 역겨운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꾸드드득...

그 소리의 주인이, 서서히 달라붙고있다.

두갈래로 갈라졌던 몸이, 타르덩어리처럼 꿀럭꿀럭.

서로, 다시 달라붙고있다.

­스으으...

어느새 먼지가 가라앉고, 전장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

그 괴상한 할배는,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이쪽을, 나를, 바라보고있다.

두갈래로 갈라진 몸 사이가 끈적거리는 검은색의 무언가로 붙어있는 모습.

풀을 바른 종이를 서로 붙였다 떼면 저런 모양이려나.

그런 끔찍한 모습의 할배, 아니... '그것'이, 입을 열었다.

【...하.】

***Side 얀센 대령

썰어대고, 폭발시킨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거머리들을 쳐낸다.

주인있는 물건을 주인도 없는 물건인양 훔쳐가려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습기에.

원래 저런 녀석들이었지. 해방자들이란.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들마다 목을 잃은 채로 땅에 쳐박히고, 바닥이 붉게 적셔진다.

옆의 코어는 여전히 엄청난 빛을 내뿜으며 제 값을 하는 중이고.

예상보다, 너무나도 좋게 풀려간다.

전투의 저 먼곳에서 터져나가는 잡졸 군인과 히어로들이 보이지만 도와주진 않는다.

병력은 양쪽 모두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균형은 맞는다.

이대로라면, 확실해.

코어와 알파.

완성될 날이 머지 않았어.

작게 조소한다.

.

.

.

­파캉­!

벌써 전장에는 시체 수십구가 나뒹굴고, 전투도 어느샌가 끝나간다.

해방자들의 압도적인 열세.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계속해서 피가 흩날린다.

주위의 사람은 이미 엄청나게 줄었다.

군인도, 해방자도 모두.

더이상 지원오는 군인들도 없는 걸 보면, 우리쪽도 이제 얼마 뒤면 도착한다는 뜻이겠지.

이즈음이라면 이제 슬슬 행동에 옮겨도 되겠어.

­키이잉­!

코어를 향해, 코어의 주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부수기 위한 마법이 손바닥 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양같으니.

하지만.

그렇게, 착실히 완성되어가고 있던 계획이 무너진건 한순간.

­"­­­!"

새된 외침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언가 날아오는 중.

그게 치아라는 걸 깨닫는 순간,

­콰드드드득!

나의 몸은, 두갈래로 갈라졌다.

검은색의 타르덩어리를 뿜어대는 두개의 고깃덩어리로.

전장에 찾아든 정적.

모두가 날 바라본다.

경악한 표정으로.

【...】

죽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끔찍한 기분이다.

이 시선들이, 이 정적들이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변화한다.

모든게, 모든게 완벽했는데.

계획의 수립부터 진행까지... 모든게 완벽했는데...

'【빌어쳐먹을...】'

이게...누구 때문에 무너졌지?

누구 때문에?

고작... 저 수확물 때문에.

알파. 저 빌어 쳐먹을년 때문에.

싸늘하게 식었던 가슴이, 미친듯이 불타오른다.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오로지 알파만을 향했다.

노려본 알파의 얼굴이 창백해지는게 여기까지 보인다. 여전히 뚫린 뱃속에서 피를 뿜어대는 알파의 저 역겨운 모습에, 다시 한번 핑 돈다.

미친듯이 분노하니, 오히려 얼굴은 차갑게 식는다.

분노하고, 타오른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심장.

서서히 붙어가는 몸뚱아리.

【...하.】

피조물이라면, 곱게 주인님의 발이나 핥을것이지.

주인을 물어?

곱게 끝나진 않으리라. 알파.

***Side 루시

사고가 멈췄다.

저게 뭐야 씨발.

갑자기 형이 왜 거기서 튀어나와요.

징그러운 할배가 눈앞에서 입을 나불거린다.

【...주인은, 누구더냐. 알파.】

미친 중2병 할배새끼가 뭐래는거야.

저거 나한테 하는 말 맞지?

"...뭔 개소리야 미친놈이."

내 입에서 뱉어진 한마디.

주변에 서있는 모두가 아마 같은 심정일거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그 미친 중2병할배와 나를 바라보고있다.

서우는 멍때리다가 어느새 할배를 향해 검을 겨눈 모습.

【...주인을 무는 개에게는, 교육이 필요한 법이지.】

소름끼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선 지독한 분노와 한기가 느껴진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강화마법을 발동하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던 그 순간,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 괴물이 자리를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져오는 거리.

옆으로 한발짝 돌리며 뒤로 돌려찬다.

­빠악­!

...소리가 밋밋한데.

부수는 감각이 없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느껴져 재빨리 발을 박차며 뒤로 빠져나왔다.

내 코 바로 앞으로 스쳐지나가는 파쇄마법.

저거 맞았으면 얼굴 으스러졌겠지.

­후둑, 툭

으아 씨발.

얼굴이 으스러지는 대신 배가 떡이됐다.

배 헤집고 나서 바로 움직이는거라 그런지 역시 내장이 쏟아져나온다.

­"...루시­!"

서아의 외침.

그러나 곧 서아에게 휘둘러지는 대검.

해방자들도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걸 깨닫지만, 빈틈을 노린 군인과 히어로들이 다시 반격을 시작하며 전장은 다시한번 개판이 됐다.

­퍼엉­!

내 귀 바로옆에서 들리는 폭발음.

고통을 참으며 위로 점프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이는 괴물할배.

엄청난 속도로 파쇄마법을 내지른다.

곧바로 발로 내려찍자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할배의 팔이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떨어져나가려는 찰나 그 사이로 붙어버린 검은색 타르들.

이대로라면 절대 못죽인다.

저 할배는 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지랄인거야.

그러나 쇄도하는 마법의 향연에 생각을 계속할 타이밍은 없다.

흩뿌려지는 피와 내장을 최대한 막으며, 공방은 계속된다.

.

.

.

­콰과광!

공기의 폭발.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하는 나.

"...아재 뭐하는 사람이에요?"

저건 괴물이야.

저걸 대체 어떻게 막아.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고, 끔찍한 비주얼로 재생된다.

정신공격인가.

­콰광

­쿠웅­!

­파가각!

내 말 무시하는 싸가지도 더럽고.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내뱉으며, 폭발음과 마찰음으로 뒤덮인 전투의 잔상만이 남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 배가 점점 물렁거려진다고 느끼던 그때,

【...온다.】

드디어, 그 할배가 전투시작 이후 처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온다니, 대체 뭐가?

"...자꾸, 무슨, 말이야..."

내 의문.

하지만, 의문은 짧았고.

생각보다 빠르게 해소됐다.

­「끄르륵­」

...역겨운 소리와 함께 말이다.

구덩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나.

헬기소리와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어디갔는지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는다.

들리는 건 그저, 방금전의 역겨운 소리가 공기중으로 울리며 만들어내는 메아리들 뿐.

­「크르륵­」

­「꾸륵­」

­「그르르...」

사방에서 들려온다.

원래의 소리를 모두 덮어버린 소리들.

마치 개구리들이 떼로 모여 우는 듯한 소리.

얼마 남지 않은 구덩이 속의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올려다본다.

­쿠­웅!

저 위에서 들리는 폭발음.

그곳에서 보이는 건...

­"...마수?"

검은색의 불쾌한, 윤기가 흐르는 기름같은 외관.

시퍼런색의 안광과 연기를 내뿜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무수한 짐승들의 향연이었다.

_____14

***Side 한서우

얀센 대령님이라고 했던가.

처음 날 믿는다고 했을때만 해도, 듬직했다.

그 얼굴의 미소는 너무나도 진실같아서, 마음이 놓이며 책임감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디갔을까.

나를 향한 그 무한한 신뢰의 감정은 모두 어디로갔을까.

눈앞에 남은건, 그저 인간임을 연기했던 괴물이다.

불쾌한 마수들의 지도자, 뼛속까지 거짓말로 가득 찬.

그런 역겨운 괴물.

그 역겨운 괴물이, 모두를 속였다.

모두를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사냥당하게 했다.

저 위에 보이는, 어마무시한 숫자의 마수.

군인과 히어로들은 다 어디간걸까 생각해보지만, 애초에 첩자따위가 군 대령까지 올라갔다는 걸 보면 첩자란 그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겠지.

아마, 수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해온 알박기였을 것이다.

그 알박기를, 지금 이순간을 위해 사용했을 뿐이고.

모두가, 배신자였다.

너무나도 깊숙이 스며들어온 그 더럽고 불쾌한 병균들은, 기어코 터졌다.

­【...알파.】

­"...난 알파가 아냐."

루시와 그것이 대화한다.

루시를 데리러 올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란 상상조차 못했는데.

"...얀센 대령님!"

그것을 부른다.

인간의 이름으로.

하지만.

【...닥쳐라. 코어.】

돌아온건 그저 무시.

코어란 또 무엇이고, 루시와 협상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목을 썰어버리고 싶지만, 전황이 너무 불리하다.

여기서 한순간이라도 저울이 기울었다가는, 우리 모두가 몰살당한다.

서로 싸우던 곳에, 압도적으로 강대한 적 하나가 더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흩어졌던 사람과 군인들이 모두 모이면 대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전부는 죽겠지.

어차피 저 연구자들도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어느정도의 피해는 감수한거겠지만.

루시가, 그렇게 중요했던 인물이란말이야? 연구자들에게?

대체 루시가 뭐하는 사람이길래?

그저 평범한,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잘 웃는 그런 평범한 사람인데.

어째서 우리의 목숨은 모두 그런 루시에게 달려있는걸까.

루시를 구하러 왔으면서, 오히려 구원을 바라야하는 상황이라니.

너무나도 참혹한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Side 루시

【...곱게 따라오면, 저들은 살려주겠다.】

개소리.

"어차피 다 죽일 수 있으면서,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는 지금,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있다.】

"그게 뭐 어쨌다는건데."

【시간을 지체하면, 인간들은 모이겠지. 그대로 우리를 가둬 분쇄할거다.】

연구자들의 몰살이라.

원하는 바야.

그리 말하고 싶지만, 이자식들이 다 죽는다고 해도 그 전에 여기있는 모두는 몰살당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곳엔 주인공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너도 지금 상황이 어떤진 알겠지. 최대한 협조하면, 저들은 살려주지. 약속하겠다.】

"...하..."

어쩌다 상황이 이꼬라지로 돌아간걸까 씨발.

상황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좆같이 된다.

"...좋아."

【...그럼. 거래는 성사된거다.】

"...미친놈들 진짜."

할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게 어째 분노를 참고있는 듯 보인다.

그러고보니 할배가 뭐라고 했더라.

교육을 다시 시켜준다고?

미쳤어.

이대로 납치감금조교 확정이다.

좆됐네. 몇번을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진짜로.

여기서 저항해봤자 싸그리 다 뒤지니깐, 별수없지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눈앞의 할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제스쳐를 취한다.

그러자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려오는 하얀 연구복을 입은 사내 한명.

【협상은 성공이다. 이대로 돌아간다. 죽이지않고.】

【...저항은 지체될 뿐이니.】

【확보해라.】

【그래.】

그 순간, 위에서 검은색의 거대한 짐승이 하나 내려왔다.

으이씨 역겨워.

검은색의 기름덩어리에 푸른색의 무늬가 여기저기 들어박힌 모양새다.

왜 역겨운진 모르겠는데,옆에 있으면 그냥 기분이 더러워지네.

【...타라.】

"...씨발."

내가 짐승의 등에 힘겹게 올라타자, 서아와 서우가 날 부르는게 들린다.

잘 안들리지만, 아마 '가지마라' 뭐 이런거겠지.

근데 어쩌냐, 나 안가면 니들 다 죽는데.

그냥 한번 슬쩍 돌아보고서는 웃어준다.

안죽으니깐 정신 잘만 붙들어매면 언젠간 탈출할 수 있겠지.

'에라 모르겠다 시밤.'

몸 여기저기서 나오는 피 때문에 머리는 점점 둔해지는 중이다.

어차피 생각하기도 귀찮기에 그냥 그대로 마수의 등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Side 한서우

"...루시."

윤서아가 땅바닥에 주저앉는게 보인다.

나 또한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기에, 근처 군인 한명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서있는 중이다.

"...대체, 왜..."

협상의 내용이란 어차피 다 들렸다.

말하는 이들도 그 둘밖에 없고, 동굴은 조용했으니.

그래서 더 비참한 심정인거다.

구하러 왔으면서 되려 걸림돌만 돼버렸어.

마지막 순간, 날 바라보며 활짝 웃던 루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빌어먹을..."

작전은 최악의 결과로 끝났다.

루시의 구출은 결국 실패했고, 엄청난 양의 사상자들만을 냈을 뿐이다.

저 멀리서 해방자들이 서서히 모이는게 보이지만, 저지하는 사람들이란 없다.

모두가 그저 허탈감에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나도...

이 상황을.

화연이에게, 마스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한단 말인가.

"..."

변명따윈 필요없어.

난 실패했고, 그게 다였다.

그 어떤 질책이 날아와도, 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

­기이이잉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굴의 중앙에서.

어비스의 주위에 모인 해방자들이 기계를 가동시켰다.

­"...­­­­!"

윤서아가 주저앉아 절규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니.

그들을 저지하려고 다가가는 히어로들이 몇 보이지만,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다.

견제 몇번 받으니 멀찍이 떨어져 지켜볼 뿐이다.

­쿠우우우우­­

마침내 어비스는 가동됐고, 거대한 검은색의 구체가 생성됐다. 공간에 구멍이 생긴듯한 모습.

그리고 증발해버린다.

­파스스...

증발했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비스.

그 마공학 장치만이, 새겨졌던 마법진의 형태를 잃고 가만히 쿨러를 돌리며 가동을 중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Side 마스

­툭

"...뭐야."

"나중에 보자, 꼬맹아."

"잠깐...!"

말릴 새도 없이, 루스리아는 떠나버렸다.

날 고층빌딩의 옥상에 내버려둔 채로.

"뭐하는 새끼야 저게..."

멀어지는 루스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길래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도저히 짐작할 수 조차 없다.

다시금 광대들이 누구인가를 되새겨본다.

광대. 지들 꼴리는대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놈들.

그래, 지들 원하는대로만 행동하는 어린애같은 놈들이지.

"..."

그럼, 이 상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루스리아가 내가 살아남기를 원했다고...?'

그럴리가. 내 팔 한짝을 그렇게 찢어버렸던 놈인데.

살아남기를 원하면서 팔을 찢어?

미친년.

역시 이해 불가.

저딴식으로 휙휙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대체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에휴..."

그나저나, 한서우쪽은 잘 해결됐으려나.

지평선너머로 몰려오던 검은 해일들이 떠오르지만, 애써 현실을 부정한다.

잘 해결됐겠지. 분명 그럴거야.

"지친다..."

일단은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에서 눈을 붙였다.

***Side 윤서아

"아, 으, 아아... 루시..."

어비스를 통해 이동한곳은 거대한 로비.

해방자들이 모여 대기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고딕풍의 로비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지금 난 꼴사납게 우는중이다.

"루시, 루시..."

루시를, 장난감을 빼앗겼다.

처음으로 가져본 무언가를 강탈당했어.

도저히 버틸수가 없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소리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눈물만을 뚝뚝 흘리며 꺽꺽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야."

­"...루시는? 확보해 온다던 그 물건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다 필요없어.

마음속에 차가운 분노가 자리잡아간다.

"...일단은 좀 쉬자."

다가온 구일오빠가 날 일으켜 세운다.

저항할 힘도 없고, 마음도 싸늘하다.

그저 부축에 이끌리며, 침실로 향했다.

***Side 루시

【...하, 루시라니. 넌 알파다.】

"개소리하고있네."

거대한 시설에 붙잡혀왔다.

연구소같은 건물.

전형적인 비밀기지처럼 온통 지하로 몰려있는 모습이다.

이 시설을 제외한 주변은 온통 폐허였던 걸 보면 구하러 올 사람은 없겠지.

씨발.

정신만 차리자.

정신만 차리면 몸이 어떻게 돼도 살아나갈 길은 있을거야.

【그럼, 바로 시작하지.】

"...뭘?"

뭐겠어. 조교겠지.

하지만 애써 현실을 부정한다.

그딴거 당할까보냐.

­푹

"응악."

그러나 내 목에 찔려들어오는 주삿바늘에, 결국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푸거걱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는 중.

두피쪽에서만.

­휘적휘적

아, 그러고보니 뇌에는 통각센서가 없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

지금 내 뇌를 휘적거리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두피쪽을 제외하면 감각이 느껴지질 않는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해보려 하지만, 나오는건 그저 어딘가 되다 만 소리.

쪽팔리게.

그나저나 뇌가 헤집어지는 감각이란...

세상에서 이런 끔찍한 기분은 처음 느껴본다.

그러니깐...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마치 식판에다가 숟가락 긁어대는 소리를 몇시간동안이나 연속으로 듣고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털이 곤두선다.

아이 씻팔!

­질척

결국, 서서히 암전되는 시야.

촉각과 후각마저도 서서히 끊겨가고,

마침내 시간이 더 흘렀을땐, 온몸의 오감이 사라져 생각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아무튼, 진짜로 좆됐어. 진짜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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