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해주세요, 마수님!-2화 (2/162)

〈 2화 〉 0부 2. 안타깝게도 아니랍니다.

* * *

대한민국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1개월 정도가 지났다.

놀랍도록 별 일 없이. 그저 평소처럼 흘러가는 아카데미.

3학년생들이 눈에 띄게 줄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한서우 일행이 우리집에 머무는 시간이 어째서인지 점점 줄어드는게 살짝 씁쓸해지긴 했어도 아카데미에서 계속해서 친하게 지내는 이 관계가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조편성 하면 같이 자연스레 껴들어가고, 급식도 같이 적당히 떠들면서 먹을 수준.

아무튼 그렇게,시간은 흘러가고, 계절도 변한다.

날씨도 풀리고, 꽃도 필 무렵.

5월이 됐다.

"반갑습니다. 라비 볼드윈이라고 해요. 잘부탁드립니다."

아무튼 그 꽃피는 계절에, 이국적인 외모의 금발벽안 미소년 전학생이 왔다.

다시한번 강의실 저 아래에 서있는 라비를 유심하게 바라본다.

앗, 눈마주쳤어.

날 바라본 라비가 갑자기 싱긋 웃는다.

'...?'

소름끼쳐.

토나올 것 같아.

남정네가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저게.

만화적 연출이라 치면 이해 못할건 또 없다.

그나저나, 만화라...

역시, 주인공의 동료 예정인 인물인가.

왜, 너무 뻔하잖아.

애초에 이런 시점에 전학생이라니 확실하다.

미소를 잃지 않는, 완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전학생.

'저건 또 무슨 컨셉이야...'

교실을 둘러보는 라비.

한 순간, 라비의 낯빛이 변하는게 보였다.

누군가를 보고선, 입가가 꿈틀거렸던 것 같다.

너무 잠깐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금세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와 미소를 짓고있었다.

라비가 바라본 곳에 있던것은ㅡ

똑같이 라비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서아였다.

.

.

.

전학생이 왔길래 온갖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하지만.

강의실은 조용하다.

평소처럼.

아무일도 없었다.

지나칠정도로.

이거 만화 맞나...?

모두 너무 삭막한걸.

어떻게 이성에 관심있는 여학생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지? 저렇게 잘생긴 애면 한번씩 가서 말 걸어볼 법도 한데.

어쩌면 세계관이 이모양 이꼴이라 그런것 따위에 신경쓸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없는 걸 수도 있어.

괜스레 라비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

­"라비라고 했나?"

그때, 라비에게 말을 건 여학생이 나타났다.

'윤서아?'

서아가?

둘이 몇번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 싶더니, 라비가 서아를 따라 복도로 나간다.

무슨일이지?

둘이 구면이었나...?

조용히 뒤따라 가보기로 했다.

***Side 라비

처음 교실에 들어갔을때 가장 먼저 눈에 띈건 역시 루시라는 그 여학생이었다.

키도 유달리 작고, 온몸이 하얗게 칠해진 그 모습은 어딜 가도 주목을 끌기 쉬운 모습이었기 때문.

타겟인 루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찬찬히 교실을 둘러보던 그때, 내 눈에 들어온것은 순간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마음을 흐뜨려뒀다.

심호흡. 심호흡.

진정하자.

다시 평소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마음을 흐뜨려둔 그 소녀를 향해 다시 마주본다.

윤서아.

어째서 해방자가 여기있는거지?

윤서아도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짓는게 아마 내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겠지.

방금전은 순간 이성을 잃었지만, 이젠 알고 있다.

나를 향해 미소짓는 서아에게 나도 마주보며 웃어줬다.

나중에 가서 이야기라도 한번 해봐야겠어.

어째서 너희들이 이런곳에 있는건지.

"라비라고 했나?"

...하지만 놀랍게도 내게 먼저 접촉을 해온건 서아였다.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복도로 따라나오라는 말을 속삭이는 윤서아는 가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가득 지은채, 내 손을 잡아 끌었다.

.

.

.

윤서아는 근처 으슥한 복도에 날 밀어넣는다.

설마 여기서 전투라도 하려는건가 싶었지만, 내 앞에 서서 통로를 막아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않았기에 마법진을 사그라뜨렸다.

아마 지금은 그냥 대화하자는 거겠지.

그럼 기꺼이 응해준다.

"해방자가 왜 여깄는거지?"

"...어우, 급발진. 내취향 아니야."

"..."

"푸흡, 왜그렇게 정색빨아. 농담이야, 농담."

"...너는..."

이게 지금 뭐하자는건지.

하지만 참아야해. 대화를 이어나가 정보를 끌어모아야한다.

훈련받은대로. 다시.

"어떻게 시스템을 속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한건가?"

"우리가 사회 시스템 뒤섞는데엔 자타공인 일품이라는건 너희도 알고 있잖아?"

"그건..."

"멍청한 질문이었네."

"..."

"너흰 왜 여기 온거야?"

...교환할 가치가 있는 정보인가?

모르겠다. 아직은 너무 일러.

침묵을 지킨다.

그러자, 조용히 조소하며 운을 떼는 윤서아.

"하긴 그렇지...이런 시점에 아카데미 입학이라... 설마 너희도..."

"너희도, 뭐?"

"아닌가, 모르는거야?"

"..."

"...너희도, 저 여자애 때문에 온거야?"

...그저, 마주보며 웃어준다.

하지만 이런 어색한 웃음이라니, 윤서아도 이미 눈치 챘겠지. 결국 이쪽 패는 까발려졌다.

"미안하지만, 저 아이는 이미 우리가 찜해놨어. 내가 침발라놨으니깐."

"무슨말을 하는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다행이고."

"..."

이미 이쪽 정보는 다 까발려졌음에도, 어째선지 계속해서 시치미를 떼는 윤서아.

대체 뭐하자는거지? 지금 장난치는건가?

"할 말 없으면, 간다?"

­휙

마음속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내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려는 윤서아.

...

결국, 아쉬운건 나였다.

"...잠깐!"

막을새도 없이 입에서 튀어나가버린 그 말.

그 말에 윤서아는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곤 나를 돌아본다.

"왜?"

"어째서,해방자들이 저 아이에게 눈독들이는지... 알고싶군."

"흐응~ 스스로 저 애때문에 온 게 맞다고 시인한거야?"

...빌어먹을.

"...그래."

"뭐~ 알려주긴 싫지만, 알려줄까?"

"..."

"..."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이, 도저히 포커페이스가 유지가 안된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젠 아예 온 얼굴을 움직여 환하게 웃는 윤서아.

졌다.

이건.

굴욕을 대가로, 정보를 얻는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춘다.

"연구자들의 암호화된 메세지를, 우리가 훔쳐들었거든. 해독도 했고 말이야. 이 정도면 대답이 됐으려나?"

"...!"

하지만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서아의 그 말은 내 머리를 다시 하얗게 만들어두기에는 충분했다.

"...뭐?"

물어보려 했다. 그게 뭔말이냐고.

하지만 충격에 목소리는 입에서 떠날 기미를 하질 않는다.

"...뭐야, 루시였구나."

그 사이, 갑작스레 그리 중얼거린 서아는, 복도 바깥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

­"으아아악!"

루시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니, 반쯤은 웃음섞인 목소리.

슬쩍 고개를 빼다보니 루시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서아가 보였다.

­"루시~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 아니... 그..."

­"훔쳐듣는건 나빠 루시."

­"아, 아니... 나 방금 왔는데..."

­"그건 나도 알아!"

­"아니..."

그대로 서아는 루시를 끌어안은채 교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아를 밀어내려 하는중.

결국 그대로, 두 사람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머리가 혼란스러워.

일전에 들은 말을 되새겨본다.

...그때, 방금. 내가 뭘 들은거지.

단어의 나열은 분명 연구자라는 단어를.

가르키고 있었다.

윤서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분명 '연구자' 였다.

연구자들이라니.

연구자들이?

그들이? 어째서?

루시를?

루시가, 연구자들의 암호화된 메세지에서 언급됐다고?

대체 루시가 뭐하는 사람이길래?

루시가 연구자들과 관련있는 인물이었다고?

아카데미에 멀쩡하게 다니는 저 소녀가, 연구자들에게 접점이 있다고?

어쩌면, 상상했던것보다 일이 너무 커진 걸 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선 도저히 감당 못할 정도로.

어쩌면 히어로 협회조차 감당 못할 정도로.

윤서아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지만, 그렇다면 지난번에 연구자들로부터 가로챈 그 암호화된 메세지가 너무나도 절묘하다.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져 윤서아와 대화하기 전보다 더욱 난잡한 상태가 돼버렸다.

그대로 가만히 서서 고민하다가, 수업종이 울리자 정신을 차리고선 교실로 돌아갔다.

***

며칠 뒤.

루시와 접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번의 충격적인 정보에, 한층 더 발 빠르게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 다른 세력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폰을 켜 이메일을 살펴본다.

신규 이메일 0건.

보고로부터 아직 답변은 오지 않은 상태.

이런 중대사항에 답변이 늦어지다니,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지경이다.

하지만 일단은 명령이 오지 않는 이상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예정대로 귀가하는 루시의 뒤를 조용히 밟기 시작했다.

...

눈앞에 보이는 건 폐건물.

저 건물 안으로, 루시가 들어갔다.

"여기서 사는건가..."

알 수 없는 소녀다.

기숙사는 무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곳에 살다니.

본인이 편해서 이러는건지 아니면 다른 불가항력적인 이유에 근거한건진 알 수 없지만.

폐빌딩으로 안으로 따라갈 뻔 하다가, 근처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발을 멈췄다.

"...?"

날 보는 건 아닌 것 같다.

서둘러 골목에 몸을 숨겼다.

슬쩍 고개를 빼 살펴보니저 빌딩 위에 웬 여자 한명이 서있다.

날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2m는 될 법한 거대한 키에, 잿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을 감싼 저 붕대.

'저 붕대는 분명...'

광대.

'루스리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었을 줄이야.

지원군이 필요하다.

견습 히어로 혼자서는 저 미친년을 막을 방법은 없다.

루시를 도와줄 수 있을만한, 루시와 친한 사람들.

분명, 아카데미에서 루시 옆에 붙어있던 애들 몇 명이 있었다.

히어로들에게도 연락해 보지만 다들 하나같이 먼 곳에 있기에 지금 당장 지원오기는 힘들다고 한다.

미리 연락처 얻어두기를 잘했어.

­띡. 띡. 띡.

곧이어, 폰에서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Side 루시

아무튼, 시간은 흘러 현재.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주거침입해서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내 허벅지를 꽉 붙잡고있는 지금.

달빛에 드리운 역광때문에 실루엣만이 보인다. 그 실루엣이, 심히 기이하다는것이 마음속의 공포심을 더 증폭시켰다.

자는 도중에 들어오다니, 이게 뭐하는짓이야.

그저 소리가 났기에 깨어났고, 지금 이런상황이 된 것 뿐이다.

비명이라도 지를까.

소용없어.

여가 근처엔 아무도 없잖아.

지금 내 생김새는 어떻지?

헐렁한 후드티에 후줄근한 반바지.

성욕을 느낄만한 포인트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잊고있었다.

내 모습을.

"꺼져 로리콘새끼야!"

마력이란 마력은 죄다 끌어모아서 주먹에 휘감는다.

­빠각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그 일격은 놀랍게도,

짜잔!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뭐야 이게!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허벅지에 닿은 이 소름끼치고 꺼림칙한 감촉도 생생히 느껴진다.

질척질척한 슬라임과도 같은 무언가가, 꽉 움켜쥐고 있었다.

원래 일반인이던 누구던 한대 맞으면 바로 나가 떨어져야하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건지, 자다 깬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얼굴에 주먹을 마구 휘둘러보지만,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제야 그 인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히익...!"

인간?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생긴것 자체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눈이 뭔가 달랐다.

이질감에 자세히 바라보니 검은색으로 광택이 나있는, 소름끼칠 정도로 미동마저 없는 눈알이 보였다.

흰자따윈 없이, 모두 검게 칠해진 인간.

"으아아! 죽어 괴물새끼야!"

몸부림은 한층 더 심해지고, 내 허벅지와 배를 틀어쥔 그 손의 악력은 더욱 강해진다.

"시끄럽네."

누군가 창문으로 들어오며 말한다.

"..."

창문?

여기 3층인데??

서둘러 머리를 굴린다.

저 여자는 뭐고, 이 아저씨는 왜 아직까지도 가만히 날 틀어쥐고만 있는가. 게다가, 내 마력은 죄다 어디갔는가.

여자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키는 엄청 크고... 살짝 늙어보이네.

그리고... 눈에 붕대를 감고있어.

눈에 붕대를 감은 장신의 여자...?

뉴스에서 본, 지하철역 테러사건의 CCTV 영상이 떠올랐다.

"...너!"

"뭐야? 나 아는거야?"

"지난 달 지하철역 테러...븝...으븝!"

갑자기 마수가 오른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다. 느껴지는 질척한 감각에 몸부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조용히 해. 새어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 ­­­­­!"

마구 소리친다.

소용없을 걸 알지만, 그래도...빠져나가야 해.

애초에 새어나가려고 어쩌냐는 말이 어불성설인게, 이 근처에는 사람이 없잖아?

계속해서 몸을 뒤틀수록 악력은 강해져 어느샌가 내 다리를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가 된다.

자꾸만 앞에서 뭐라 중얼거리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마구 발버둥치지만 괴이할 정도로 강한 압력은 혈관마저 막아 팽창시킨다.

"...너도 참 꼴볼견이구나."

갑자기 입이 열렸다.

눈앞의 괴물이 입에서 손을 떼고는, 다시 내 배를 움켜쥔다.

"짜증나네."

"아...?"

"뜯어버려."

넹?

­콰드득!

***Side 성화연

옆에 있는건 마스.

서우는 코까지 골며 자고있길래 그냥 자게 냅두고 나왔다. 그렇게 깊게 자고있는 걸 깨울수도 없잖아.

전학생이 연락처를 따갈때만 해도 너무 노골적인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목적으로 얻어간 건 아닌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불려온 곳은 루시의 집 앞.

집이라 해봤자 폐빌딩이지만.

"...여긴 왜 불러온거야?"

"성화연이라고 했었지?"

"응."

"너, 초상능력이 뭐라고 했더라..."

"뇌파감지."

"혹시, 지금 당장 쓸 수 있어?"

"아, 응..."

라비의 말에, 눈을 감고 집중한다.

느껴지는건...

사람 6명분량의 뇌파.

"...?"

6명? 이상한데?

이 근처에 다른 노숙자라고는 없다. 따라서 원래라면 나와 마스, 라비와 루시의 뇌파밖에 감지되지 않아야 한다.

그럼 이 나머지 2명의 뇌파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루시의 신호는 엄청나게 요동친다.

두렵다는 듯이.

"...?!"

"쉿."

라비가 손가락으로 폐빌딩의 창문을 가르킨다.

그 손가락 끝에는...

하늘을 유유히 날아,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저게 뭐야...!"

마스가 벌떡 일어선다.

"지금 들어가야해. 당장. 전투준비해."

라비의 한마디.

곧바로, 마스의 오른팔에서 푸른색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라비가 앞장서서 달려가기 시작한다.

뒤따라 달려가는 나와 마스.

우리가 숨어있던 그 골목길에서 발을 떼는 그 순간,

­"...아아아아악­­!"

루시의 비명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_____8

"흐, 하...씨이...하..."

왜 도대체.

나한테만 이러는건데 씹쌔끼들아아!

"뭐, 가 문제야...대체..."

다리가 없다.

그 짐승이 오른팔로 붙잡고 있던 내 다리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음. 느껴지긴 하는구나.

뭔가 엄청나게 뜨겁고 짜릿거리는 감각이긴 한데 이게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든다.

진정해, 이건 내 몸이 아니야.

진정하자.

우선.

감각을 정돈하고...

­꽈드득!

"끄하아아아아아아아악!!!!"

배를 뜯어냈다.

통째로.

뜯겨진 복막 아래로 꿈틀거리는 내장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진다.

"개애... 새끼야아..."

죽여버린다.

반드시.

"죽어... 이새끼야..."

"입이 너무 험한데. 아예 목소리를 못내게 해줄까?"

­우득!

"케흑, 컥?!"

목에 갑자기 무언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 어헉..."

목을 물고있는 노숙자의 대가리를 팔로 두들긴다.

당연하게도 움직이는 일은 없지만.

­"루시!"

그때 갑자기 비상구쪽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목소리를 들어보니 성화연인듯 하다.

고개를 못돌려 지금은.

"그, 헤, 으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배며, 다리며, 목이며 안아픈 곳이 없어.

온통 통증뿐이다.

최대한 마력을 일으켜보려 해도, 도저히 움직일 기미를 하질 않는다.마치 활동형 마력 전부가 모두 잠들어 버린 듯한 느낌.

계속해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고있던 그 순간.

­콰아아앙!

어 시발?

눈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만둬! 여기 내 집이야!

"에후으...하어!"

아악! 말좀 나와라!

눈앞에선 마스와 루스리아의 공방이 시작되고, 나의 불쌍한 집은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Side 마스

­­콰아아앙!

루스리아가 날린 공격에, 벽으로 날아와 쳐박혔다.

내 오른팔의 불길은 일렁이며,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뭐 저렇게 쎈거야 시발..."

루스리아라고 했던가.

라비가 어떻게 저 여자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라비가 마법진을 그린다.

거대한, 광선마법.

­쿠우우우우­!

당연하게도 루스리아는 그걸 피하고,

­빠각!

"크윽?!"

라비의 옆구리를 부순다.

­쾅! 콰광!

벽이 몇개는 부서진걸까.

그만.

일어나야해.

화연이는 밖으로 나가 사람을 불러오기로 했으니, 여긴 우리밖에 없어.

루시를 뜯어먹고있는 저 괴물은 도저히 움직일 기미를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루시의 배를 뜯어먹고있다.

우선은.

루시부터 구해야해.

­타앗

오른팔로, 남자를 불태울 기세로 돌진했다.

하지만.

­사르륵

"어...?"

남자에게 주먹이 닿자마자, 불길은 사그라든다.

마치, 원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이 당하면 학습할법도 한데 말이야. 넌 그런게 없는건가봐?"

­빠각!

머리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발차기.

황급히 오른손을 들어 막는다.

남자에게서 손이 떨어지자, 불길은 다시 돌아온다.

­콰앙!

순식간에 주고받는 수십 합.

공기가 타며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콰아아앙!

끝내 날아간건 나였다.

"컥...커헉!"

저게 대체 무슨 괴물이야.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눈이 다 보이는 나조차도 훌쩍 뛰어넘는 테크닉이다.

피식 웃은 그 여성이 눈을 감싼 붕대를 푼다.

질끈 눈을 감았다. 보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허, 눈치 빠르네?"

당연하지.

뉴스에서 테러 당시 영상이라고 수십번은 넘게 나오던 영상인데.

못 외우면 그게 이상한거지.

"근데... 눈 감으면 어떻게 싸우려고?"

­빠각!

명치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안돼.

이러다 죽는다.

곧바로 앞으로 달려든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앞으로 엎어지는 나.

발을 치켜들어, 내려 찍는다.

­으지직!

그러자 느껴지는 한기.

통증? 작열통? 무슨 고통이지?

내 다리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ㅡ

"ㅡ끄아아아아악!"

­콰앙!

뒤에서 날아오는 라비의 연계마법을, 모두 피해 콘크리트벽으로 쳐박아넣는 루스리아. 굉음과 진동을 남기며 사그라져간다. 곧이어 들리는 루스리아의 경멸스러운 한마디.

"...버러지들."

­빠직! 빠직! 빠지직!

다리에서, 양쪽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온다.

"으흐...아아아아악!"

일어날 수가 없어.

못 움직여.

"으, 흐윽..."

이따위 고통에, 상황에.

눈물이 나온다.

억울하고, 분해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이렇게 뻗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할 뿐.

5살때의 그 감정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작품은 원래 같이 감상하는 거랬으니깐, 조용히 있으면 너한테도 보여줄게."

위에서 들리는 한마디에, 다시한번 분노가 솟아오른다.

'닥쳐. 누굴 갖고 놀려는거야.'

"죽어 씨발년아­­­!"

­뻐걱!

"커, 하, 으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나온다.

말을 할수가 없어.

아마, 뚫린곳은 흉부. 척추를 피해 비스듬히 꽃혀있는 하나의 꼬챙이.

그저 나따위는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듯.

"웁, 우웨에에엑! 커으!"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저, 개자식.반드시. 죽여버리겠어.

­"...루스리아."

그 순간 ,다시 창가쪽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온다.

눈을 돌린다.

그 창가, 그 너머로 보이는 것.

달빛을 받으며, 콘크리트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조용히 서있는.

윤서아

A반 반장.

윤서아가, 양 팔을 거대한 칼날로 바꾼 채, 싸늘한 시선으로 루스리아를 노려보고있었다.

그 시야를 마지막으로, 내 눈꺼풀은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내려오며 기억이 끝났다.

***Side 윤서아

루시를 미행하는 라비를 감시하기위해 뒤쫓아갔을때 보인것은 루스리아였다.

불안감이 엄습했고,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 가면, 루시를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릴지도 몰라.

라비던, 루스리아던, 아무나.

광대가 루시를 노리고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쫓아와서 루시를 납치하려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라비도 루스리아를 발견한 듯, 화연이와 마스를 부른 모습이었다.

일단은 기다렸다. 가만히.

기회가 올때까지 가만히 옥상에 숨어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루시의 비명소리가 하늘아래 울려퍼졌을때, 드디어.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움직여, 전투가 끝날 무렵 타이밍을 맞춰 돌아온것이 현재의 일.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현장은 참혹했고, 루스리아는 그 가운데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난자된 루시만이 눈에 들어오고, 그 외엔 그저 핏덩어리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아.

빌어먹게도, 루시와 같은 눈을 한 루스리아, 그 빌어먹을 변태의 눈을 마주볼 수는 없어.

그러면 먼저 내가 죽어버리고 말테니깐.

치밀어오르는 분노에도 나는 그저 루스리아의 발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어.

어차피 넌 죽을테니깐.

지금 그게 분신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죽게 만들거야. 이 손으로.

그리 다짐하며 발을 천천히 내딛는다.

그러자 들려오는 루스리아의 목소리.

"...호오."

"뭐가 호오야 노처녀 이상성욕자새끼야."

"해방자가, 이런곳까지 오다니. 설마 너희도 저 아이때문에..."

­우직!

대답대신, 칼날을.

곧바로 그 도둑년의 목에다가 박아넣는다.

"하, 하핫? 내가 여기 본체로 나왔을 리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있을텐데?"

"죽어, 그냥."

"왜 갑자기 이렇게 진지해지셨어? 그냥 예전처럼..."

­콰직!

목을, 분리시킨다.

말따위 하지마.

목소리도, 뭣도.

그 눈빛도, 다 역겨우니깐.

목을 잃은 몸뚱아리는 서서히 녹아 타르덩어리처럼 되어간다.

역겨운것.

감히. 그 역겨운 몸으로, 루시를...

주위를 둘러본다.

마스와 라비, 루시가 피떡이 된 채로 널부러져있다.

마스는... 치유마법의 한계선.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아마 다리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갈거다.

라비는 팔 하나가 너덜거리고있다.

날 바라보는 저 눈빛.

눈빛만은 불타지만, 그래도 뭐 어째. 넌 약해.

약해서, 루시를 지키지 못하고, 거기 널부러져있으니깐.

타르덩어리에 침을 한번 뱉고선 신발로 짖밟아준다.

...

­우직, 쿠드득

저 더러운 괴물은, 여전히 루시의 복부를 뜯어먹고있다.

루시는 참혹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구멍뚫리고 유린돼있어서...

'아...'

아름답다. 더러운것에 더럽혀진,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네.

­콰직!

무엇보다도 깨끗해야할 루시 앞에 있는 더러운것을, 터뜨린다.

'그래. 맞아.'

루시가 파르르 떠는게 보였다.

'언제나. 루시의 구원자는. 나.'

피로 범벅된 루시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아...으..."

루시는 정신을 잃어간다.

성화연은 분명, 밖으로 뛰쳐나갔지.

아마도 사람들을 불러오기 위해서 였을거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뿐.

명령도 아직 안내려왔고, 나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이미 내려올 명령이란 100% 확신하고 있고, 없다고 해도 내 권한으로 찍어누르면 되니깐.

게다가, 이만큼 적당한 기회도 없어.

"­­­­...!"

마스는 정신을 잃었고, 라비는 나에게 뭐라뭐라 소리친다.

하지만 안들려.

온몸이 뜯어먹힌 루시를, 머리부터, 다리를.

안아 든다.

피부의 감촉.

피가 묻어 매끈거리고, 여전히 부드러운.

완벽하고, 아름다운 장난감.

그 장난감을 드디어.

손에 넣었어.

"쿨럭­, 헤엑..."

품속에서 바들바들 더는 루시를 뒤로하고선 라비를 바라본다.

여전히 눈을 치켜뜨고 이쪽을 보는 모습.

이쪽을 향해 뻗은 양손에 마법진이 그려지는 모습이 보인다.

"넌, 약해."

루시를 공주님안기 자세로 안아들어서, 엿을 날릴 팔은 없다.

그렇기에, 그말과 함께.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_____9

***Side 성화연

3층으로 올라갔을 때,

루시는 뜯어먹히고 있었다.

처음보는 괴물에게.

전투능력도 없는 난 빠져나와 울먹거리며 경찰이던 구급차던 일단 긴급전화란 긴급전화는 다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도착하기 전에 전투는 시작돼서 건물은 흔들리는 중이다.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유난히 경찰들이 밉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

.

.

­쿠르르...

흔들림은 갑자기 시작된 것처럼 갑자기 멈췄다.

잠시간 지속된 정적.

창문에서 누군가 뛰어내리기 전까진.

"반장?"

"..."

"지금 여기서 뭐하는..."

윤서아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서아의 두 손으로 시선이 간다.

정확하게는, 서아의 두 손에 들려있는...

"...루시...?"

도저히 살아있으리라곤 볼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의 루시.

팔다리는 이미 한짝씩 끊어져있고, 복부와 목마저도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루시의 눈가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마음속을 후벼팠다.

"...루시...죽은거야?"

대답대신 서아는 그저 싸늘한 표정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어디, 어디가는...!"

다급한 마음으로 서아를 불러보지만,

­스릉

돌아온건 목에 겨눠지는 서아의 날카로운 칼날.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루시는 앞으로 아카데미에 안나갈거야."

"뭐...?"

서아의 그 일방적인 통보에, 뇌가 잠시 굳었다.

"앞으로, 내꺼니깐. 내가 아카데미에 안보낼거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야!"

"루시는 내 장난감이야. 다시는 그런 위험한 곳에 안보내."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대답대신, 달빛을 받으며 미소짓는 서아.

경찰과 히어로들은, 아직 도착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아.

"잘있어. 다시 볼 일은 없기를."

"잠깐...!"

­콰앙­!

붙잡기도 전에 윤서아는 떠나버렸다.

루시를 데리고.

"...아?"

서아가 떠나간 그 자리에는, 나만이 홀로 망연자실히 서있을 뿐이었다.

***Side 루시

고통은 뇌를 마비시킨다.

뇌를 마비시켜서,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음,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뭐냐고?

'후우...'

이젠 고통이 느껴지질 않으니깐 좀 살 것 같아.

아까전의 그 살의도 모두 어디갔냐는 듯 사라져있고.

사람의 감정이란게 엄청 신기하네.

확 불타올랐다가 갑자기 이렇게 확 식어버리고 말이야.

아무튼 지금은, 몸이 흔들리고있다.

시야는 안보이지만, 마지막의 장면을 생각하면 아마 나를 안고있는 사람은 서아겠지.

누구랑 대화하는 것도 언뜻 들렸던 것 같은데, 솔직히 잘 안들려서 누구랑 대화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꾸 얘들이 나 놔두고 지들끼리만 대화해.

말할 힘은 없었기에 그대로 죽은 척 했다.

그나저나 서아는 대체 어디가는걸까.

아까부터 자꾸 엄청나게 뛰는 것 같은데...

병원에 가는게 아닌가?

눈을 떠보려 하지만 역시 떠지지 않는다.

음, 일단은 이대로 한숨 자자.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고,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피곤하네.

그럼 전 잡니닷.

.

.

.

.

.

.

­"­­­..."

­"­­."

아 딱딱해, 허리 다 상하겠다.

눈을 떠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잿빛 하늘.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잿빛의 하늘.

서아는 어디간거야.

설마 나 버리고 튄건 아니겠지.

말소리가 들려오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보이는 사람은 두명.

다행히 서아가 날 버리고 도망간 건 아닌 듯 했다.

한명은 서아, 다른 한명은...

아카데미 습격 사건때의 그 광대!

쟤가 왜 여깄어.

설마 배신?

둘이 싸우지 않는 걸 보니 지금은 낄 타임이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움직이기엔 아직까지도 힘이 없으니 그냥 누워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

중얼중얼. 중얼중얼.

그렇게 그 둘이 한참을 얘기하고 있다가, 광대가 갑자기 날 바라본다.

...?

면상 치워요 아재.

­"..."

아.

삿대질하면 기분 나쁜데. 광대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르키며 뭐라고 중얼거리는게 보인다.

그러자 서아도 그 손가락을 따라 이쪽을 바라보며...

­콰드드득!

?????

­으직!

야 이 개새끼들아! 악마들아!

입에선 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또다시 붉게 물드는 세상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나한테도 무슨 일인지 좀 알려주던가...

그만좀 죽여 제발...

***Side 윤서아

­"히끅! 흐아아아악!"

루시의 뱃속에서 마구 춤추는 내 칼날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은 또다시 붉게 염색됐다.

"루시한텐 내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장난감이라 한 것 치고는 너무 험하게 다루는 거 아닌가?"

"부숴도 부숴도, 안부서지니깐. 괜찮아. 너 따위가 걱정할 필요같은거 없어."

"이해할 수가 없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쪽 팔에 의수 달았다고 자랑하러 온거야? 아니면 뭐야?"

지금 대치하고있는 곳은 한적한 고속도로.

이른 아침이라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위에서, 델리지아와 내가.

광대와 해방자가 서로 마주보며 대화하고있다.

"당연히, 루시를 데리러 온거지."

"무슨 자격으로."

"그러는 넌 무슨 자격으로 루시를 데려가는거지?"

"나는, 루시의 구원자. 나만이 루시를 아프게 할 수 있고, 나만이 루시를 가질 수 있어."

"미쳤군."

"미친건 광대새끼들이지. 우리가 아냐."

"웃기는 소리다."

"어차피 루시는 안넘겨줘."

"피 안보고 그냥 넘어갈 순 없나?"

"엿이나 먹어."

내 말에, 델리지아는 한숨을 쉬며 그 커다란 왼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하...그럼, 뺏어가는 수밖에."

"이번엔 진짜 죽을거야."

"죽는건, 너다."

­부스럭

광대 하나가 더 있던건가?

그랬겠지.

혼자 오면 그게 멍청한거지.

멍청한 근육돼지 치고는 똑똑한 짓이긴 하지만.

고속도로 위에 광대 하나가 더 나타났다.

"왜 그렇게 진지해졌나 했는데, 찾았구나."

루스리아가.

본체로.

이전의 늙은 육체는 어디가고, 주름 하나없이 깨끗한 은빛의 머리칼을 가진 미인이 나왔다. 눈에는 여전히 붕대를 감은 상태. 다만, 고혹적인 육체는 이전의 몸과는 확연히 다르다.

180cm정도의 키를 가진 장신의 여자인건 똑같지만.

"원래, 사랑은 쟁탈해야 하는거야. 알아?"

"개소리하지마. 루시는 내꺼야."

"그럼, 스스로 지켜보던가."

광대는 두명.

본래의 어정쩡한 애들이었다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루스리아가 본체로 나타난 이상...

승산은 0.

도망쳐야한다.

루시를 지키려면.

어디든 사람 많은곳으로 도망쳐야해.

본거지로는 아마 못가겠지.

길이 막혔어.

그럼... 도시로 가자.

해방자들은 도시 내에 기지가 있지만, 광대들은 완전하게 이방인.

도시로는 못 들어올거야.

­타앗!

생각이 끝나자, 곧바로 피로 범벅된 루시를 끌어안는다.

"도망가려고?"

당연하게도, 둘은 뒤쫓아오고.

­콰아앙!

고속도로는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Side 루시

­♪♬~

고풍스러운 재즈음악.

실내인 듯, 어렴풋이 비오는 소리가 섞여들린다.

사람은 없는 듯, 한산한 분위기의 공기.

"으응..."

뱃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는데... 기분 나쁘네.

"서아야...?"

윤서아는 어디간거지.

주위를 둘러본다.

생긴 건 마치 바(bar).

미성년자가 이런 곳에 들어와도 되는거였나?

내가 엎드려 자고있던 곳은 그런 주점의 구석에 있는 원형 테이블.

"일어났니?"

앗.

옆에서 나긋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20대정도로 보이는 은발의 사내.

눈은 어딘가 나긋해보인다.

"어...누구세요?"

"...서아 친구? 라고 하면 되려나."

"서아 친구요...?"

20대랑 고등학생이랑 친구라니.

뭐,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깐 그냥 넘어가자.

"서아는 어디갔어요?"

"치료받는 중이야. 너 지키느라고 완전 피떡이 돼서 돌아왔거든."

"저 지키려고요...?"

윤서아가 날 지키려고 피떡이 됐다고?

서아가 날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혼란스러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아! 오늘이 며칠이에요?"

"온 지 얼마 안됐어. 기껏해야 5시간정도 지났을 걸?"

"...?"

창문 밖을 바라본다.

네온사인과 간판의 불빛이 빗물에 반사되며 밝게 비추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은 밤.

그렇다면, 아직 하루정도 지난 시점이려나.

비명을 지르던 마스와 라비가 떠오른다.

"저, 혹시!"

"응?"

"친구들이 저 걱정하고 있을텐데 가봐도 될까요?!"

"무슨말을 하는거야. 친구는 여깄는데."

"...네?"

"평생에 하나뿐인 친구는 여깄는데, 어딜 가겠다는거야."

"지금 그게 무..."

"...루시."

점점 불안해져 가는중, 바의 뒷편에서 들려오는 서아의 나지막한 목소리.

온몸에 붕대를 감은 서아가 목발을 짚으며 걸어나온다.

"...윤서아...?"

"루시, 가지마."

"...어?"

"움직이지마, 그대로. 거기 그대로 앉아있어."

"서아야...?"

저거 왜저래.

어딘가 맛이 간 눈빛이다.

위험해.

"인생에 한번뿐인 소유물인데, 전력을 다해 지켜야지. 안그래?"

"네?"

이 형은 또 이상한 얘기나 하고있고.

"서아야, 화연이랑 마스는..."

"잊어. 그냥."

"잊으라니 그게 무슨...! 너도 마스 상태 봤잖아!"

집착도 심하면 병이고, 저건 그냥 병이다.

저건 대체 어디서 보고 배운 말투야!

내가 죽어도 서아를 떠나겠다고 하면, 목 잘라서 상자에 넣고 다닐 것 같은 느낌이다.

근데 이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다는게 더 무서워.

서아가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그 자리에 앉아, 루시."

"안돼. 가봐야 해."

"가면 죽일거야."

미쳤어.미친거야, 저건.

"아... 피묻으면 안되는데."

아까부터 이 형은 이게 익숙한 일이라는 듯 이런 말만 지껄이고 있고.

다들 미쳤어.

여긴 지옥이야. 날 내보내줘!

"아까부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 나 지금 가봐야해!"

의자에서 뛰쳐나가는 날 막지는 않는다.

서아도, 목발을 짚고있어서 날 쫓아오진 못해.

곧바로 바의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도망쳐야돼. 당장.

그렇게, 의자에서 떨어진지 3초 정도 됐을까.

­푸거거거걱!

"에헥! 커흑?!"

내 뱃속에서, 거대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자...잠깐...!"

순간적인 당혹감에 말을 뱉어보지만 소용없다.

­우지직! 콰드드득!

"흐갸아아악!"

"...도망가지마."

서아가, 다가온다.

눈이, 왜저래.

미쳤어. 뭐야 저거.

­까드득! 부우욱!

"힉, 흑! 흐잇!"

거대한 칼은 여전히 내 배위에서 춤추고있고, 서아는 여전히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에게 처음 말을 건넸던 그 은발의 사내는, 눈에 호를 그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미쳤어.

컨셉이겠지.

­푸슈슈슛

"하으, 흐윽..."

칼춤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이어서 들리는 건 그저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루시, 나랑 같이있자."

멘트.

씨발. 저 멘트 뭐야.

애써 부정하던 내 불안한 추측에 말뚝을 박아넣는 저 끔찍한 멘트.

서아는 그대로 손을 뻗어서,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을 강하게 쥐었다.

빼내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강해지는 악력.

서아가 손가락 끝으로 찢겨나간 옷 아래의 피범벅된 복부를 어루만졌다.

미쳤어 다들.

살려주세요 씨발.

_____10

"훌쩍..."

미친놈들.

다들 미쳤어.

­쓱쓱

옆에 있던 형은 내가 가게에 뿜어댄 피를 걸레로 닦고있고,

서아는 내 어깨를 붙잡은채 다시 테이블 앞에 앉혀놨다.

배는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아프긴 한데,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옷은 다 찢어져버려서 지금은 엄청나게 거대한 후드티를 입은 상태.

아마 저기 엎드려서 바닥 닦고있는 저 형 옷이겠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건데...

집에가서 롤이나 하고싶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루시."

가만히 몸을 떨고 있던 그때, 서아가 날 불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귀에 무슨 말이 들어올 수가 있을까.

"..."

"루시."

"집가고싶어..."

"루시."

"으으..."

"루시."

­팍

"끄윽?"

아얏.

내 머리채.

서아가 내 머리채를 잡고 강제로 돌린다.

"루시. 대답해."

"으익, 네! 대답! 대답했어요!"

"루시."

"네, 넵!"

"도망가려 하지마."

"예...에?"

어차피 도망 못가게 할거잖아 미친년아!

"있지, 루시."

"네,넷."

"루시 뱃속에, 내 이빨 하나를 집어넣었어."

"어...어?!"

미친년. 미친년!

"도망가려 하면, 이번엔 배만 찢기는 정도로는 안끝날거야."

'...'

"목만 잘라서 상자에 넣고 다닐수도 있어."

"흑..."

"대답해. 안 도망갈거야?"

"윽,흐윽..."

­팍

"대답."

"히끅, 네! 넵! 안도망갈게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애들만 꼬이는거냐고...

"루시, 표정 안풀어?"

"딸꾹!"

독심술이라도 쓰는건지, 아니면 내가 표정관리에 재능이 없는건지.

나쁜자식들... 나쁜놈들...

반드시 탈출하고 만다.

***

원탁.

이번엔 조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몇몇 사람은 서서 듣는 중.

원탁의 중앙에 띄워진 건 한장의 보고서.

라비가 임무 첫날 보낸, 장문의 보고서다.

한동안의 정적.

마침내 누군가의 입에서 첫마디가 튀어나온다.

"믿을 수가 없군..."

"일이 너무 커진 것 아닌가?"

주변의 이들이 모두 한마디 씩 한다.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볼 뿐.

"...어제 오전, 경기 13번 고속도로가 붕괴했습니다."

"사상자는?"

"다행히 오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아서 중상 5명, 경상 31명으로 그쳤다고 하는군요."

"사망자가 없는게 다행이군."

"설마 그것도 그... 루시학생과 연관된 일인가?"

"네. 일단, 이것부터..."

서류뭉치가 팔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방자와 광대가 부딪혔다는군요."

"...!"

"루시양도 함께 찍혔구요."

원탁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그 어수선함을 뒤로하고, 보고는 계속된다.

"해방자쪽 인물은 윤서아. 광대쪽 인물은... 델리지아와 루스리아라고 합니다."

"루스리아? 설마 본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해방자쪽이 무조건 열세였겠군. 맞나?"

"...네. CCTV 자료화면을 보니, 다시 도시 내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아직, 한국 내에 있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뭐? 도대체 지금 당장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뭘 하겠다는건가."

"아직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으니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갑자기 회의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서로가 논쟁을 하고,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바닥만을 보고있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흘러도 잠잠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는 더욱 격해져간다.

회의실이라기엔, 너무나도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마침내, 그 논쟁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중앙에 앉은 누군가 입을 열었다.

백발이 하얗게 샌, 근육질의 노익장. 얀센 대령이다.

"...병력을 최대한 빨리 끌어모아야 하겠군."

"아...!"

"연구자와, 광대. 해방자마저 모두 얽힌 일이다. 사건의 규모가 너무 커졌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이 좁은 땅 안에서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해야지. 모두가 원하고 있다."

"..."

회의실에 다시금 찾아온 정적.

모두가 고심하는 듯 보이고, 누구도 입밖으로 말을 내지 않는다.

"...특히. 연구자가 얽힌 일이다. 군대를 동원해서든, 뭔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그 학생을 확보해야해."

"하긴... 연구자마저 연관됐으니."

"...라비와 대화한 해방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는건가?"

누군가의 질문.

"해방자가, 거짓말이라...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해독 못한 그 연구자들의 암호문이,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아카데미의 학기 시작전 그 루시라는 꼬맹이의 신상이 가장 처음 등록됐을 시점. 그때 바로 전달된 암호문이라니."

"...그건 그래. 굳이 연구자가 없더라도 이번 사건이 큰 일인건 마찬가지고."

이어서 납득.

"...그럼, 최대한 빨리 병력을 동원시키게. 아직 한국을 떠나진 못했을거야. 퇴로를 모두 막아야한다."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간다. 현재 북부쪽은 광대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니, 충돌도 각오해야해."

이어서 속속들이 도출되는 결론.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군부 관계자들 중 조용히 앉아있던 누군가 새로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한번 회의장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루스리아와 전투했던 그 학생들도, 데려오는 게 어떤가."

"학생들을 동원하자고? 얀센, 자네 미친건가?"

곧바로 날아오는 반발.

"그 학생들은 아직 1학년생일세. 그런데도...!"

"스스로가 의사를 밝혔더군."

"단순한 치기일 뿐이다."

"그저 치기라도, 의지가 있으니. 강함만 뒷받쳐주면 되는 거 아닌가?"

"너무 위험해! 3학년생이면 몰라도 학년생들마저 동원이라니!"

"...'서우'라는 학생의 특기사항을 읽어봤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언제나, 대검을 곁에 두고다닌다고 했더군."

"...대검?"

"그래, 대검. 그 대검이 '코어'일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설마 그 연구자들이 5년동안 찾고다녔다는...!"

"그런걸 학생이 가지고 있었다고? 세상에!"

"어째서 진작 이런 사실이...!"

코어라는 말 한마디에 술렁이는 회의실. 연구자들이 그걸 찾으려 온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게 5년 전이었다.

전 병력의 5%를 소모해 간신히 막아냈던 그 참사의 이유가 고작 학생의 손에 있었다는게 알려졌으니.

"정보의 출처는?"

하지만, 꿈틀대는 의심의 싹.

"...어비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출처 불명이다. 단파 라디오를 통해 송신되는 의문의 신호만이 근거일 뿐."

"...그런가."

"어비스마저 신호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으니, 정보의 신뢰도는 이미 확실해진 것 아닌가?"

"동의하네."

"확실히 지금 상황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말이지."

"의문스러운 점은, 이만 덮어두기로 하지. 지금은 한시가 급해."

서둘러 회의를 종료시킨다. 작전지도를 바라보니 벌써 디지털 화면에서 붉은 파장이 퍼지며 병력의 마력을 나타내는 수치가 요동치고 있었다.

속속 올라오는 드론의 영상에서 찍히는 엄청난 수의 병력들.

그 중 천지를 가득 메운 검은색의 향연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그럼, 오늘 정오부터 당장 데프콘 2단계를 발령하도록 하지. 각 연합 모두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Side 한서우

­드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있는 마스와 라비가 보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건지, 라비는 내가 들어가자 마자 일어났다.

화연이도 라비 옆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내가 오기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라비."

"..."

"이게 다 무슨일이야."

"천천히 설명해줄게. 일단 앉아."

"..."

*

지난 밤, 화연이에게서 연락이 엄청나게 왔다.

받아보니 전화 너머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서 없이 횡설수설하는 말.

서둘러 루시의 집에 갔을 땐, 모든 상황은 이미 종료된 뒤였다.

마스와 라비는 병원으로 실려가고, 화연이는 현장증인으로 경찰과 히어로들에게 불려갔다.

여전히 멍한 머리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며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그리고 현재, 라비의 상황설명을 전부 듣고 난 지금.

충격적인 정보들의 나열에, 화연이와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겨우 뗀 입.

"...그러니깐, 라비 니가 히어로 협회쪽 소속이라고? 넌 루시를 끌어들이기 위해 전학온거고?"

"...응."

"아카데미 습격사건은, 듣도보도 못했던 일인데... 정말로 있었던 일이야? 루시 혼자 그걸 막아낸거고?"

"...응...아마도."

단기간에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다.

일단 정리부터 먼저 하자.

우선 루시는, 광대 고위간부에게 중상을 입힌 규격외의 실력자.

루시와 광대와의 전투가 벌어진 계기인 아카데미 습격사건은 위에서 아예 그냥 숨기기로 했단다.

라비는 그 장면을 찍은 CCTV가 미국 히어로 협회쪽에 넘어가서, 루시를 영입하고 보호하러 온거고.

어젯밤의 그 전투는 광대와의 충돌때문에 벌어진 일.

게다가 서아는 일반적인 학생이 아니라 해방자...

"라비."

"...응."

'모르겠어, 역시...'

"...아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모르겠네."

"..."

"일단은, 히어로들이랑 경찰들은 광대들의 습격때문에 현장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응."

"너무 늦기 전에 마스를 치료해준 건 고마워."

"애초에 내가 불러서 그렇게 된거야."

"...그래도. 아무도 안갔으면 루시는 진작에 죽었을 거 아냐."

"어..."

"...왜 그래?"

"...아니야. 기밀사항을 어디까지 풀을 수 있는지 긴가민가해서..."

"아무튼,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래."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말해주는거야?"

"결과적으로는 나 때문에 같이 휘말려버렸으니깐."

"...그래..."

뭔가 머리가 엄청나게 복잡한 기분이다.

머릿속에서 마구 떠오르는 의문과 생각들은 일단 접어두자.

루시랑 서아.

일단은 그것부터...

"있지, 라비."

"..."

"해방자가 대체 뭐야?"

"...이건 조금 무거운 기밀사항이야."

"광대랑 연구자는 알겠는데, 해방자는 대체..."

"...미안. 그건 말해줄 수 없어."

"그래서, 서아가 해방자 였다고? 학생이 아니라? 그런 서아가 루시를 납치했고?"

라비가 끄덕거린다.

"미쳤어. 다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너도, 나도, 모두.

학교에 간첩까지 들어와 있었다니.

라비도 잠입요원, 서아도 잠입요원.

한두명 즈음 더 나타나도 이제는 더 놀라지 않을 것 같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드르륵

대략 3시간 정도 지나 마음이 진정됐을 즈음, 마스도 일어나 병원식을 먹고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저 너머로 들어온 건 국군 제복을 입은 장교 하나.

옆구리에 서류뭉치 하나를 낀 채이다.

조용한 병실을 둘러보던 그 장교는, 상당히 밝은 음성으로 소식을 알려왔다.

"허가가 떨어졌다."

"...정말인가요?"

상부에서, 우리의 참전을 허락해 줬다고 한다.

반즈음은 발악하는 심정으로 부탁해 본 거지만, 허가가 떨어졌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하지만 그 결정에 라비가 반발한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거야. 다른 누구에게 강요를 받은 것도 아니고."

곧바로 저지하는 화연이.

"아직 학생이잖아! 1학년생! 근데 대체 어째서 그런 결정이...!"

"친구가 친구를 구하고 싶다는데, 무슨 결정따위가 필요해. 어차피 허가가 안떨어져도, 구하러 갔을거야."

"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라비.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심호흡을 하는 걸 보니 여전히 진정이 안 된 모양이다.

"요점은 이거야. 어째서, 학생들인 너희를 위에서 허가해줬냐. 협회가 원래 이렇게까지 막나가지는 않았을텐데."

"마음가짐에 감탄했을 뿐이지. 게다가, 루스리아와의 전투에서 꽤나 버틴걸 보면 강함도 이미 어느정도 증명됐고말이야."

소식을 알리러 온 협회쪽 사람이 답을 한다.

"그래도 이건..."

입을 움찔거리는 라비.

하지만 결국에는 수용한다.

"그래요... 뭐, 저한테 결정권이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럼, 결정된거야."

"앞으로 당분간은 아카데미에 못나가. 그러면."

"알아. 근데 그게 대수야?"

"그렇긴 하구나... 하긴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날 판국인데."

"루시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일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응."

"루시는 괜찮을까."

"...아마 괜찮겠지. 서아가... 데리고있으니, 적어도..."

서아의 신뢰도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지만, 한때 반친구였던 인연을 삼아 조금이라도 믿어보려는 모습이다.

게다가, 서아도 루시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있을거라는 투로 말했으니... 적어도 살아는 있을거야.

"루시 말고도, 연구자들이나 광대들같은 세력까지 이번기회에 다 쓸어버리려고 인력 이렇게 많이 투입했다나봐."

"그럼 적어도 루시 구하는건 확실한거겠네? 목표를 더 높이 잡았으니."

"...그러길 바라야지."

_____11

"...얘가 루시야?"

"귀엽네~"

"...애새끼군."

주점에 손님이 들어오길래 구원요청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다 그놈들이다.

망할.

"살려줘..."

"...루시."

"죄송해요오..."

살려줘요 제발.

나 이러다가 진짜로 죽을 것 같아.

그러나 다들 내 말을 무시하고선, 주점 여기저기 흩어져 모여앉는다.

웅성웅성.

사람이 열댓명정도밖에 없어서 그런지 손님이 왔는데도 소리는 울린다.

도대체 다들 뭔 얘기를 저렇게 하는거지.

귀를 기울여본다.

"...지원을 오기엔 광대들이 북부쪽을 꽉 둘러 쌌다는데?"

"연구자들은 어떡하고?"

"몰라... 최근에 움직임이 갑자기 사라졌다나봐."

"광대랑 연구자들이랑 손잡았을 가능성은 없는거야?"

"미친놈이랑 미친놈이니 합이 잘 맞긴 하겠네."

"말고, 애초에 미친놈들끼리니깐 합이 극악이겠지."

"하긴...그건 또 그렇네. 성향이 너무 달라."

"어쨌든 들어온 보고엔 연구자들이랑 광대들이랑 충돌이 있었댄다. 병력배치 과정에서."

"적어도 협력한 건 아니군."

"그렇지."

"...연구자들도 갑자기 이쪽으로 병력 모으기 시작했다던데."

"아마... 저거 때문이겠지."

"...암호문이 정말로 사실이었나."

또.

또 지들끼리만 아는 얘기네.

니들끼리만 그런 얘기 하지말고 나한테도 좀 알려줘 제발!

날 꼭 껴안고 있는 서아에게 말을 걸어본다.

"...저..."

"응, 루시? 왜그래?"

...태세전환 엄청빠르네.

방금전의 그 태도는 어디 갔냐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에게 물어보는 서아.

"대체 내가 누구길래 다들 그러는거야..."

"...어..."

한참을 고민하는 서아.

"우리도 몰라."

"...뭐?"

모른다고? 니들이?

그러면 안되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난리를 피웠던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듯 서아를 쳐다보자 주점 형이 말한다.

"그래서 밖에 데리고 나가서 알아보려고."

"...밖? 어디 밖?"

"해방자들 본거지."

해방자는 또 뭔데 씹덕아.

어쨌든 지금 상황을 보아하면 날 밖으로 데려가서 아예 사람들과는 연을 끊게 만들 작정인 듯 싶다.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해.

이러다간 정말로 끌려가서 납치감금조교당하는 루트를 탈 수도 있어...!

"그것만은 안돼..."

앗.

"응, 루시?"

'...'

"...넹?"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말도..."

"..."

"..."

"정말?"

"...네..."

"정말로?"

"..."

서아가 날 빤히 쳐다본다.

말 안하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아무말도 안했어요..."

"루시."

"...네."

"장난감은 가만히 주인이 조종하는대로만 있으면 되는거야. 알지?"

"...네..."

"다른 생각 품으면 죽어. 알지?"

"...흑..."

"루시."

"...으으."

"알지? 대답."

"...네..."

역시 안되겠어.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 되겠어.

더 있다간 정말로 미쳐버릴거야.

"..."

잘때를 노리자.

잘 때 몰래 나가는 거라면, 서아도 눈치 못챌거야...

"루시. 표정이 이상해."

"...딸꾹!"

...미친년. 진짜로.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으흑흑."

"있잖아, 루시..."

­빠직!

"으햐아아악! 팔! 파알!"

이 미친년이 기어코 내 팔을 부쉈다.

주변에서 이쪽을 보더니 슬쩍 웃는게 보인다.

미친놈들! 미쳤어!

날 회유할거면 말리기라도 해야지!

내 바람도 무색하게, 다시 다들 고개를 돌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허튼생각도 한두번이면 족해. 알지?"

"으학, 히끅, 흑, 넵..."

­빠지직!

대답 했잖아! 대답 했잖아!

"말했다시피, 이번엔 그냥은 안끝낼거야. 이미 여러번 봐줬어."

"잠ㄲ...!"

­으지직!

"으힉 씹...!"

"...뭐?"

아니아니 잠깐만요 이건 반사작용...!

­뻐걱!

"으겍."

...살려주세요...

***Side 한서우

"경기도 내에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 됐습니다."

"...어째서 거기까지만?"

"전투의 후폭풍때문에, 인근 CCTV들이 모조리 먹통이 돼버려서..."

"거 일 복잡하게 됐군."

작전 브리핑을 위해 회의실에 모였다.

학생인 우리들은 맨 뒷자리에서 아무 발언권도 없이 듣고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게 어디야.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직까진 경기도 안에 있다는 것 까지만 확인 된 모양이다.

"...북부쪽 봉쇄는 확인 됐습니까?"

"작전 담당 팀 몇이 광대들과 충돌한 모양이더군요. 광대들이 이미 북쪽은 다 봉쇄한 것 같습니다."

"...허..."

"그럼 일단은, 경기쪽 지역부터 미리 봉쇄하도록 하지.

광대들이 내려오는 해방자들까진 막아줄 것 아닌가."

"우선 그렇게 하도록 하죠. 팀 배정하겠습니다."

"가람 연합쪽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그쪽 팀들은 빼야해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회의실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오늘 비가와서 그런지 소리가 더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연구자들쪽은 모두 갑자기 움직임이 정지했다고 합니다..."

"손잡은 세력들은 없나?"

"적어도 협동공격으로 보이는 전투는..."

"그럼, 얼추 파악은 됐으니 결과 나온대로 화력 고려해서 병력배치를..."

그렇게 한 두 시간정도 회의가 진행된다.

성화연은 그 사이에 졸려서 그런지 고개를 까딱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

.

.

"...그럼 일단 병력 배정은 어느정도 완료된 것 같군요. 이대로 결정할까요?"

"그러지."

회의는 얼추 끝난 모양이고, 웅성거림도 잦아들기 시작해 이젠 창밖에 부딪치는 빗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잠시 뜸을 들이는 진행자.

"오메가 팀."

오메가 팀.

나와, 성화연, 마스. 그리고 몇몇의 히어로가 속한 팀.

일종의 특수부대 비슷한 개념이다.

"넵."

"정말로 해당 결정에 번복은 없습니까?"

당연하다.

이미 다짐은 했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배정된 임무를 브리핑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로. 시작이다.

***Side 루시

"...경기도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애들 연락이 끊겼어."

테이블에 앉아 한창 대화하던 여자 한명이 전화를 받고선 하는 말이다.

"경기도 지역을 아예 싹 둘러싼 모양이야."

"하...전쟁이라도 하자는건가."

"일어날 수 밖에 없지. 다 여기로 모였어."

"연구자들 메세지 하나때문에 이게 다 뭔일이람..."

"아니, 적어도 광대들은 연구자들이 움직여서 참전한 건 아니니깐..."

"일단은 중요한 것부터. 광대들은 지금 중요한게 아니야."

"지금 우리에게는 적들이 포위해오고 있고, 우리는 저걸 밖으로 옮겨야해. 빼앗기는 일 없이."

논쟁하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 한명이 날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저거'라니.

싸가지없기는.

근데 입밖으로 이 말을 냈다간 또 갈가리 찢길 것 같아서 그만둔다.

여기있는 애들은 다 미친놈들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 있어.

"당장이라도 움직여야해. 아직 경기도 내에서 도착못한 애들 있어?"

"유화쪽이랑 신라쪽 아직 도착 못했다. 나머지는 다 연락두절."

"지원도 못받고... 우리끼리 빠져나가야 하는건가."

"투항할까."

"그건 싫은데."

"...그럼 싸우다가 죽던가."

"어차피 다들 저거 가져가려고 오는거 아냐? 저거 가져가면 물러서지 않을까."

"...벌써부터 취한거냐. 해방자들을 그냥 놔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희망사항이지, 아무튼."

"...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

"..."

"..."

"...브릭, 우리가 신에게 종속된 자였나?"

정적.

갑자기 모두가 대화를 멈춘다.

왜 저래.

설마 해방자가 광신도단체같은 건 아니겠지.

"...아니."

"우리는 신에게 종속되지 않아."

"그래."

"신이 우리에게 종속되지."

"종속되지 않는다면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그렇게 되게 한다."

"문구는 잊지 않았네."

"당연하지."

...광신도 단체가 아니라 집단으로 정신병걸린 단체였구나.

아니, 이건 알고있었지만.

잘못걸렸어. 역시 잘못걸렸어!

귀엽게 생긴게 죄라면 죄다.

어쩌다 서아한테 걸려서 이딴곳에 오게됐을까.

"...그럼, 내일 새벽 당장 움직이도록 하지."

"연락해서 전해두겠다. 어비스로 모이라고."

"아직 유화쪽은 도착 안했을텐데? 기동 가능한가?"

"지금 나와 지우가 나가서 확보해오겠다. 새벽 3시 전에는 돌아오지."

"...그래. 미리 기동은 준비시켜둘게."

"마법진 너무 크게 그리진 마. 쫓아오던 애들까지 다 넘어올 수 있으니깐."

"알고있다."

"그럼, 우린 이만 출발하지."

"예­엡."

­딸랑~

푸른머리의 여자애 하나와 호리호리한 아저씨가 주점 밖으로 나갔다.

"­­­­."

"­­."

서로 이야기는 계속하지만, 이젠 저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전에 들렸던 그 이야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기 때문.

내일 새벽에 출발이구나.

그 시간 이후엔 정말로 다시는 아무도 못보고 어디 연구소같은데 쳐박혀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해.'

"..."

...뱃속에 있는 이빨을 어떻게 꺼낼 수는 없을까.

뱃속에 있는 걸 꺼내려면, 배를 뜯어야한다는 소린데...

'...스스로?'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아니, 마취제라도 놓으면 가능하려나.

자기최면같은거 걸 방법은 없나?

옛날에 자기최면 한 다음 마취없이 수술받은 최면술사 얘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

내가 얼굴을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굳히고 있었다는 게 떠올라 또 팔 뽀개질까 싶어 서둘러 서아를 뒤돌아봤다.

"..."

허.

자는중이네.

날 껴안고, 앉은채로...

'어떻게 빠져나가라고...'

도저히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가능할까?

다들 자기들끼리만 얘기하고있는 지금이라면, 혹시...

"...루시이..."

소름끼치는 속삭임.

"...?!"

...잠꼬대였나보다.

서아는 여전히 내 머리위에 고개를 얹은 채 꾸벅꾸벅 졸고있다.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역시, 결과는 하나뿐이야.

'...확실히...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기회는 없어.

모두가 자고있을때, 서아를 몰래 기절시켜두고 빠져나가는거야!

조용히 서아를 부른다.

"서, 서아야...?"

"우ㅡ으응? 루시?"

눈을 비비적대며 나른하게 일어나는 모습.

"이런 시끄러운 곳 말고, 그냥 침대 가서 자는게 어때? 피곤하지 않아?"

"루시... 나 생각해주는거야?"

"으, 응...!"

그럴리가 있겠냐 미친년아.

서아는 조용히 나를 끌어안고 인사하며 오늘은 이만 자겠다고 침실로 들어간다.

잘 자라며 다들 건네는 말이, 서아가 저 사람들에겐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싶었다만... 적어도 나한텐 아닌데, 뭘 어째.

조용히 탈출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_____12

소란스레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작디작은 창문 밖을 바라보자 보이는 건 밝은 남색으로 물들어 여명을 보이는 하늘.

"윽, 끄흐..."

품속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손을 들어올려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다가 다시 찢겨나간 피부에 히익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는게 너무나도 기분좋다. 평생을 이러한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밤새 루시가 도망 못가도록 가슴에 쭈욱 팔을 집어넣고있다 보니, 어느새 침대가 온통 붉게 물든 듯 하다.

솔직히 따뜻하게 젖어드는 건 기분 좋았는데, 구일이 오빠는 역시 또 화내겠지.

피 많이 묻히지 말라고 했는데, 침실은 어느새 벽이며 천장이며 온통 붉게 물든 모양새다.

음, 이정도면 청소불가.

어차피 곧 버릴 곳인데 청소할 필요는 없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채 헐떡거리는 루시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간다.

.

.

.

밖은 새벽.

비는 어느정도 그쳐 이슬비만이 똑똑 떨어질 뿐이다.

주점에는 40명정도 모여 엄청나게 시끌벅적한 상태.

구일이 오빠는 입구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날 보자 얼굴을 감싸며 한마디 하는 오빠.

"아이고야... 피는 다 어쨌냐...? 치웠지?"

"어차피 곧 버릴곳이잖아요?"

"그래도...그래...하긴, 그렇지..."

추억에 잠긴듯한 눈으로 주점을 둘러보는 구일 오빠.

"그래도 3년 가까이 써온곳인데..."

그렇게까지 정이 든 곳이었나, 싶어 떠올려보지만, 사람없이 쓸쓸했던 주점의 로비밖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게 좋았던걸까.

"그럼, 이제 5분뒤면 출발해야해. 루시 잘챙겨."

"네. 업고 뛰면 될까요?"

"...응, 근데 니가 업으면 안돼."

...뭐?

"왜요? 제껀데."

"여기서 너만큼 전투능력 뛰어난 사람이 더 없어서 그래. 너한테 맡기는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답답하겠지만 이번만 참아라."

"...하지만..."

"일단은 살아서 나가는게 우선이야. 빨리. 보성아저씨한테 줘."

"...네.

참담한 심정으로 루시를 보성 아저씨에게 건네준다.

"그래... 그럼. 다들 모여! 이제 곧 출발이다!"

테이블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나며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모두가 현관 앞에 모였다.

"긴 말 안한다. 살아남아라. 들키지 않고 최대한 어비스까지 와."

­"옙"

­"..."

­"오케이."

­"알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온다.

화이팅 넘치는 분위기는 없이, 그저 새벽에 걸맞는 웅성거리는 소리.

"그럼, 1분뒤에 출발이다."

그 후 얼마 뒤, 조용한 빗소리 위로, 발자국소리가 떼거지로 울리기 시작했다.

***Side 한서우

­에에에에에에에엥­­

­"시민여러분은 모두 건물 지하로 대피해주십시오! 현재 작전 진행중입니다! 금방 끝날 예정이니 모두 안심하고 대피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오전 6시.

작전시작.

감지계열 초능력자 유형의 초상능력자들이 수색을 시작했다.

화연이도 감지계열이기에, 현재 히어로들을 도와 수색중.

"성화연... 잘 할 수 있으려나..."

"니 걱정이나 해라 한서우. 얀센 아저씨 말 못들었냐, 네가 제일 중요하다고."

"...응."

그래.

얀센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지.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얀센 아저씨는 정말로 날 신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졌어.

"마스 너도. 위에서 잘 막아라."

"그래. 그때 받은 거 다 갚아줄거야."

군용트럭에 탑승하는 마스를 배웅한다.

"수고해라."

"그래, 살아서보자."

"미친놈이. 사망플래그 세울 일 있냐?"

"...사망플래그가 뭔데?"

"아니, 아니다. 그냥 수고하라고."

"그래. 잘가라."

음, 사망플래그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문학같은거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그런건가.

­"오메가 팀 알파, 지원 바랍니다."

무전기가 울린다.

그래.

'루시... 곧 구하러갈게.'

결의를 다지며 나도 군용트럭에 올랐다.

***Side 구일

"으,으아아아아...!"

­타다당!

총탄이 날아온다. 하지만.

­핏

내 마법이 더 빨랐다.

­푸후우우욱!

눈앞에서 목을 잃은 중무장한 병사 하나의 몸뚱이가 스러진다.

주변은 모두 피투성이.

팀 하나를 궤멸시켰다.

­"델타! 델타팀! 응답바란다! 델타!"

­꽈직­!

무전기를 부순다.

이대로 지체하면 근처 히어로가 도착하겠지.

역시 서아랑 떨어진 건 잘한 일이었어.

근처에 쫙 깔렸구나.

이렇게라도 어그로를 끌어서 시야를 분산시켜야한다.

서아쪽은 뒷골목으로 이동하고 있으니깐, 수색팀만 어찌저찌 잘 처리하면 수월하겠지.

곧있으면 합류해야한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 허공으로 발을 박찬다.

***Side 성화연

"...루시...루시..."

머리가 아파.

뇌파가 너무 많다.

본래 100m반경 내의 뇌파만 탐지 할 수 있는 능력.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다.

그 사이에서, 루시의 형태를 기억해내야만 한다.

"없어요... 여긴 아직 아니에요."

두통속에서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알겠어. 그럼 바로 다음 포인트로..."

­치직

"오메가 팀 세타! 수원쪽으로 이동중!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겠습니다!"

­지직­"라져."

트럭이 다시 빠르게 움직인다.

­부우우웅

덜컹거리는 트럭속에서, 다시 정신을 올곧게, 원래대로 다잡는다.

"루시...어디야. 어디..."

기억을. 다시 처음부터.

원래의 그 형태를 기억하기 위해 처음부터 끄집어내어본다.

.

.

.

처음 만났을때 첫인상이 어땠었지...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던 그 아이.

절망적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내색조차 하지 않던 루시를 떠올린다.

가정방문을 한다고 했을때 말을 더듬거리던 모습.

루시의 집을 보고 울었던 나와, 서우가 떠오른다.

그리고 또...

폐허속에서 과자파티를 했던 일과, 만일을 위해 루시의 교복을 맞추러 간 일. 그걸 입고 부끄러워하던 루시.

예상외의 모습을 보고 혼자서 쿡쿡댔던 내 모습.

그리고...장난치던 우리를 졸린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시,

수업중 졸던 루시의 볼을 꾹꾹대던 기억.

세 달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나는 건 많다.

루시가 정확히 누군지 아냐고 한다면 그건...

모르겠어.

루시의 형태는 여전히 잡힐 듯 말듯,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자동차는 여전히 움직이고, 머리는 기억을 내뿜기 위해 애쓰는 중.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모든 기억들이, 한순간에 손가락 사이에 스칠듯이 지나간다.

언제 기억했는지도 모를 루시의 웃는얼굴,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의 너덜너덜해진 루시가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루시?"

뇌파가 하나 감지됐다.

하나가 아니라, 그 근처에서 움직이는 다섯명 더.

루시의 형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찾았어요! 루시 찾았습니다!"

"...!"

엄청나게 울려대는 전화와 무전기들.

사이렌의 형태가 변화하고,

­"수원 제 3구역 지원바람! 전 병력 모두 집결해주세요! 타겟 위치 확보 완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Side 루시

밤새 가슴에 서아의 팔이 박혀있던 탓인지,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입에선 요상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주변의 시야는 휙휙 변해간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내 배도 스스로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물론 내가 미쳐서가 아니라 가슴의 통증이 너무 심하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거다.

근데 움직일 수가 없어 시밤.

그림의 떡이네.

­"­­­­!"

­"­­­."

저 앞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옆에서도 누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골목길의 콘크리트벽이 갑자기 파이며 파편이 비산한다.

총알인가?

­퍽

"응악."

한대 맞았다.

복부를 꿰뚫고 지나간 것 같은데.

서아도 맞았으려나.

기대감에 힘겹게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지만, 서아는 멀쩡해보인다.

아, 근데 서아는 왜 저기 서있는거지.

지금 나 업고있는 사람 누구임;

­철퍽.

시야가 떨어졌다.

***Side윤서아

들켰다.

결국엔 들켜서, 어비스에 도착하기 500m 남겨두고 하나가 죽었다.

빌어쳐먹을.

루시가 날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팍

서둘러 업는다.

­타다다당! 탕!

날아오는 총탄을 모두 쳐내며, 앞으로 돌진.

"­­­­!"

"­­­­!"

"­­­­­­­!"

그 군인들이 소리치는 게 느껴지지만,

­퍼걱!

­퍼걱!

­퍼걱!

이내 모두 비명으로 변하고,

목 수십개가 떨어진다.

유화 언니를 바라보니 벌써 저 앞으로 돌진하며 어비스를 향해 가는중이다.

이제 얼마 안남았어.

"흐...히끅...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루시의 신음소리.

슬쩍 바라보니 배에 총상 하나가 더 생겨나있다.

역시, 역시. 내가 업었어야했어.

전투요원이라고 내가 업는걸 그렇게 극구 말리더니, 결국엔 루시한테 상처를 입혔어.

분노를 추스르며, 피로 뒤덮인 거리를 박찬다.

­두두두두두

하늘에서 헬기소리가 들려오고,

군인과 히어로들마저 지원오는게 보인다.

서둘러.

서둘러야해.

시야가 빨라지고,

"헉, 허억..."

10블록즈음 지났을 때, 마침내 나를 포함한 5명이 어비스에 도착했다.

어비스.

땅굴.

게이트.

단체 전이마법을 새긴 마공학장치.

그 거대한 금속덩어리가, 눈앞에 파인 저 거대한 구덩이 아래에 있었다.

광활한 구덩이 속에 서있는 건, 육중한 체구의 노익장과 수십명의 군인, 히어로들.

"..."

그들이 심연과 같이 깊은 저 아래에서 안광을 빛내며 우릴 올려다본다.

"드디어 오셨군."

"...좆됐네 씨발."

구일오빠의 한마디가 이렇게 밉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_____13

***Side 얀센 대령

­쿠구궁!

­콰광!

엄청난 굉음이 헬기소리와 트럭소리, 무전기소리 등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가린다.

빌딩하나에 집중되는 엄청난 화력의 여파다.

­쿠구구구...

5분정도의 미칠듯한 폭격의 끝에,눈앞의 거대한 빌딩이 과자라도 되는 양 아래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거리를 메우는 희뿌연 연기들.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거대한 구덩이 아래에서 드러난것은, 마치 기관차라고 해도 믿을법한 엄청난 크기의 쇳덩어리.

붉은색의 마법진이 새겨져 벌써 기동을 준비하고있는 마공학 장치였다.

"...얀센, 자네 말이 진짜였군."

"내가 이런 상황에서 왜 거짓말을 하겠나."

"이런 정보를 가지고서도 신호가 송신되기 시작한 지난 3년간 공유조차 하지 않았단 말이지."

"..."

"문책은 나중에 가서 하도록 하지. 모두 불러오도록."

이상하게 눈치가 좋은 늙은이를 뒤로하고선 나를 포함한 모두가 구덩이 아래로 내려간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니 문책따위 있을리는 없겠지만.

.

.

.

"이게 '어비스'인가."

눈앞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타원형태의 기계를 보고선 누군가 중얼거린다.

땅속에 생긴 광활한 구덩이 속에서, 내려오는 빛을 홀로 받으며 붉게 빛나는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히 압도적인 기세였다.

"...가지고가서 연구할 가치가 있어보이는군. 그냥 부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장치야."

금속의 표면을 쓸으며 말하는 군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

"...확실히, 해방자들이 연구자들의 기술력의 중계자들이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물건을 들여왔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들 기계를 보며 감탄한다.

미개한 원숭이들다운 모습이야.

내려오던 군인과 히어로들도 이제 모두 자리를 잡아가고, 충돌만이 남았다.

­"3시방향 250m 너머에서 접근중이랍니다! 모두 준비해주십시오!"

...드디어, 저 너머에서.

­띡.

손에 들고있던 송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Side 윤서아

"...퇴로는 없다."

"이미 주변을 모두 둘러쌌어."

"정말로 살아남은 애들은 이것밖에 없는거야?"

우리가 어비스에 도착하고 나서, 추가로 도착한 해방자들은 30명 남짓.

1/4 가까이 줄어들었다.

"...뚫어야해."

"자살이나 다름없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손놓고 기다리진 않을거잖아?"

구일오빠의 한마디.

다들 표정이 굳어지는게 보인다.

"기적을 바라야지."

"...하."

"그럼, 들어간다. 서아 너는 밖에서 루시 잘지켜."

"...응."

그 말과 함께, 모두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래에서 위쪽으로 쏟아져나오는 광선 몇개에 두명이 증발하고, 쏘아지는 총탄에 3명이 나가떨어진다.

날개가 돋아나고, 위에서 아래로 광선이 쏟아지며 군인 한무더기가 증발하기도 하며, 거대한 돌덩어리가 솟구치기도 했다.

마치 아래에 도착하기 전에 끝내버리겠다는 의지.

하지만, 결국엔충돌은 일어나고,

­쿠구궁­!

­"­­­­!"

­"­­­!"

저 아래에서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발악이 시작됐다.

그리고...

­"타겟 확보 개시...­!"

­"네임드가 옆에 있어서 접근이...!

이 위에서도 서서히 좁혀오는 포위망.

뒤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팔다리를 날붙이로 변화시킨다.

­타당! 탕!

총성과 함께, 내가 있던 자리에 생기는 폭발음.

허공으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Side 마스

"­­­­!"

"­­­!"

전장의 소음.

여기저기서 폭발음과 총성이 울려퍼진다.

사람들의 함성, 비산하는 핏덩이, 흩뿌려지는 내장들이.

모두 전부 비현실적일 뿐이다.

그 풍경의 한가운데에, 내가 주저앉아있다.

"하, 하하 씨이­발."

"...그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구나. 정말로.

근데...난 나름대로 루시가 나타나주길 기대했는데 말이야."

눈앞에 루스리아가 서있다.

피칠갑을 한채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어차피 고개를 들 힘도 없어.

슬쩍 오른팔이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타오르던 오른팔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붉은 액체만이 솟구쳐나오는 곳.

허전하다.

"개, 씨이, 빠아아알!"

"그래, 그래. 분하겠지. 하지만 난 지금 본체라고, 꼬마야. 이정도 한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어?"

"죽, 죽여버리겠어 미친년..."

"..."

갑자기 루스리아가 말을 멈춘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무전기소리인건가.

잘 들리진 않는다.

한참을 듣던 루스리아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을 다시 붕대로 감싼다.

뭐하는 짓거리야 저게.

"...이름이 뭐야? 핏덩이."

"누가 핏덩이야 씨발..."

"붉으니깐 핏덩이지."

"...그딴거 알아서 뭐하게..."

"..."

또다시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냥 좀 말하면 어디가 덧나니."

"..."

저 먼곳에서 울리는 전장의 소리도 어느샌가 아득해져서, 모든게 다 꿈만같다.

"하아... 꼬맹아, 이름뭐야."

"...마스..."

몽롱하다.

의식이.

"음, 마스. 화성(火?)인가."

"원하는게 뭔데..."

"살고싶어?"

"...뭔, 개소리야..."

"마스 넌 살고싶냐, 이말이지. 귀 먹었어?"

"...그건..."

당연한거 아니냐.

하지만 직접 살려달라고 하기엔 그 꼴이 너무나도 비굴해서.절대로 그딴 말은 못하지.

"살려달라는 표정인데, 살려줄까 마스?"

"대체 왜이러는건데..."

"우리도 어차피 이제 도망쳐야하거든."

"...뭐?"

"연구자들이 갑자기 떼거지로 몰려오기 시작했다나봐. 마수들 데리고."

"그게 뭔 씹..."

고개를 치켜드니 날 내려다보는 루스리아의 얼굴이 보인다. 역광이 드리워 어딘가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는 모습.

"이대로라면, 다 죽어. 어차피."

"각오한 일이야."

그리 말하며, 남은 왼팔에 불을 휘감는다.

사슬이 감기듯, 어깨부터 사선을 그리며 돌고내려오는 푸른 불꽃.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하,하!"

일어서려고 무릎을 일으키지만,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고개부터 다시 땅에 쳐박힌다.

"푸흡, 흐..."

"이런건 또 그때랑 똑같네."

"죽일거면 빨리 죽여 씹새끼야아­!"

그만, 참지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저 사람 가지고 노는듯한 말투는, 이번에도 똑같아서 좆같아.

"시끄러워. 살려준다는데도 지랄이야."

"­아아악! 원하는게 뭐야!"

"...없어."

"...뭔..."

­팍

아차 하는 순간, 루스리아가 나를 들춰맨다.

"이,거 놔 이새끼야!"

팔다리를 버둥거리지만, 역시 힘같은게 들어갈리가.

"그냥, 내가 하고싶으니깐 하는건데, 문제있어 꼬맹아?"

"사람 갖고 놀리는것도 정도가 있지­!"

"입다물어. 혀깨문다."

그 말과 함께 허공을 박차는 루스리아.

오르고, 올라서.

마치 계단을 뛰는 듯한 감각이다.

보이는 건 루스리아의 어깨뿐.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린다.

"...허."

언뜻 보니 하늘.

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저 아래에 보이는,붉게 물든 전장의 풍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 정확히는,

지평선 너머로 범람하는, 검은 해일.

흑과 청이 뒤섞인, 불쾌한 감각의 결정체.

그 해일이 땅 위로 범람하는것이 보인다.

"당장 여기서 떠야지. 안그래?"

루스리아가 말한다.

확실히. 저런것에 껴들었다간 형체조차 못남기고 찢겨나갈거야.

"...다른 애들은 이미 다 철수하는 중이었으니까, 전장에 남겨진건 시체랑 너뿐이었을거야. 알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고집부리기는."

"왜 살려주는건데..."

"재밌으니깐, 내가 원해서... 아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냥 하고싶어서 하는건데... 아, 몰라, 설명 못해."

"...미친, 년..."

­부웅

허공을 뜨는 감각과 함께, 의식이 날아갔다.

***Side 루시

멍해요.

역시.

아직까지도 멍한데 대체 침실에서는 어떻게 버텼던건지.

비명이 시끄럽다고 서아가 내 목에다가 손가락을 박아넣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무튼, 옆에서는 물에 필터링되서 들리는듯한 온갖 소음이 섞여들어오는중.

정신을 가다듬고, 최대한 움직여보기 위해 노력한다.

얼굴에 피가 튀는게 느껴지고, 총탄이 내 머리맡을 스쳐지나간다.

"­­­!"

"­­­."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구역질나오는 광경의 퍼레이드.

서아에 대한 나의 호감도가 하락하였습니다.

음, 암튼.

지금이라면 서아의 정신이 딴데 팔려있으니깐, 슬슬 재활해도 되겠지.

손을 천천히 움직여본다.

아직까진 팔목까지만 덜덜 떨리는 수준.

...조금 기다려볼까.

.

.

.

­"­­­­!"

­"­­­!"

서아가 뭐라고 외치는게 들려온다.

뭔가 엄청나게 먼곳에서 외치는 듯한 소리도 들리고.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팔을 움직여본다.

휙휙.

음, 조금 느리지만 어느정도 잘 움직이네.

됐어, 이정도면 충분해!

그럼 이제 행동을 개시해볼까.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루...시..."

서아가 어느새 내곁으로 와 속삭이는 말.

개깜짝놀랐네 시밤.

그 말 직후 몸이 붕 뜨더니, 또다시 시야가 변한다.

이번엔... 낙하하는건가.

­파악

"응악."

순간적인 충격에 못이겨 허리가 꺾였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은 듯.

"­­­."

"­­!"

마침내 착지했고, 서아가 날 바닥에 내려둔다. 딱딱한뎅.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쇳덩이 앞에 버티고 서있는 두명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있는 해방자들이 보인다.

해방자들과 대치하고있는 그 두명은, 이상한 할배 하나랑... 서우.

...서우도 있네.

서우가, 날 바라보더니 싱긋 웃는다. 걱정말라는듯이.

왜저래 징그럽게.

군인들과 다른 히어로들도 몸을 이끌며 접근하는게 보이지만, 모두 견제에 못이겨 다가가지 못하고있다.

저건...

도와줘야해.

나 구하러 온 애들인데.

"끄으응..."

상체를 일으킨다.

여전히 쑤시긴 하지만, 이전보단 훨씬 나아.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거대한 동굴이다.

이런곳이 도시 한가운데에 있었던건가.

동굴의 바닥에서는군인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다.

밖에선 사지절단은 기본에 아예 곤죽까지 돼버린 시체들이 널려있단 걸 생각해보면, 역시 서아가 비정상적으로 강한거겠지.

이어서 내 몸을 바라본다.

뚫렸던 가슴은 어느정도 재생돼있지만... 여전히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는 수준.

우웩.

좀 더 기다려야겠어.

고통도 지금이라면 아직 무디니깐, 아마 이빨은 지금 빼야겠지.

손을 옮긴다. 서서히.

그리고 그 사이, 마침내 동굴 중앙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전투가 시작됐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