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160화
* * *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뤼네아로 돌아온 강한윤은 침상에 누운 채로 생활했다.
무리를 하기도 했고 체력을 소모할 대로 소모한 상태라 회복이 더뎠다.
다른 여인들이 두 명씩 붙어서 간호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베아트리스는 사과를 깎아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노아는 몸이 어떤지 물어보며 먹여 준다.
양쪽에서 미녀들이 신경써주는 건 거의 천국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시간도 길진 않았다.
몸 상태를 회복 하고나서 곧바로 동부로 떠나야 했으니까.
동부의 항복.
전투가 끝난 뒤, 각 도시에서 항복의 의사를 내보였다.
모든 영주들이 입을 맞춘 것 마냥 동시다발적인 행동이었다.
항복을 안 하는 건 쓸데없는 고집에 가깝다.
모든 자원을 끌어서 전투를 했으니 모든 영지의 상황이 안 좋은 건 당연하다.
중부나 남부와 교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사태가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굶어죽느니 차라리 살 사람은 살자는 생각이었을까.
마족과 관련된 귀족들의 리스트와 함께 숙처잉 시작되었다.
동부에 마족과 관련되지 않은 귀족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고 대부분은 살해당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왕의 핏줄이 제일 나은 처사인가.'
다른 귀족들이 국왕의 이름을 올리고 팔아넘겨도 물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족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귀족들의 의견은 묵살당하고 한 명씩 처형당하며 그런 얘기도 차차 줄어들었다.
마지막에 온전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확실하게 마족과 관련 없는 왕족들이었다.
'왕족의 핏줄도 처리할까 했지만.'
국왕이 그래도 마지막에 시간을 끌어준 덕을 봤으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바알이 힘을 되찾아서 어렵게 이겼거나 오히려 패배했을 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이겼으니까. 상관없는 이야기지.'
결국에 이긴 건 연합군이었으니까. 강한윤은 마지막으로 동부의 끄트머리에 있는 영지. 베그시르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제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아가레스가 있었던 곳인 만큼, 피해도 심했다.
곳곳에 구덩이를 잔뜩 메운 시체를 불태우고 있다.
역병이 퍼지지 않도록 선택한 방법이었겠지만, 퀭한 눈으로 불타는 시체를 바라보거나 울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전투가 끝나고 일주일이 흐른 지금도 참당한 상황은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세계수를 심는다고 이 모든 상황이 해결이 될까? 안 된다, 그건 알지만 강한윤은 세계수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수가 있어야 땅이 비옥해지고 대륙 전체에 도움이 될 테니까.
"이것으로 마지막 씨앗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계수의 씨앗을 베그시스의 변두리에 심었다.
에리엘과 노아가 땅에 손을 대자 세계수가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 성장한 세계수는 그제야 멈춰서고 큰 그늘을 만들어냈다.
이걸로 끝인 건가.
정말로 끝일지는 모른다. 앞으로 연합군 내에서 분열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 막아내는 것도 능력이겠지.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서라도 노력할 생각이었다.
"뭔가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네."
세계수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노아가 다가와서 강한윤의 등을 껴안았다.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희망찬 미래를 원한다는 건 좋은 생각에 가깝지 않을까. 노아가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자 걱정거리가 사라진 강한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해야 하지 않을까?"
뭐를? 이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은근히 옆구리를 간질여온다.
노아가 어떤 걸 원하는 지 강한윤은 곧바로 알아챘다.
"오늘 저녁을 기대하는 거야?"
"응?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것보다 훨씬 좋은 거."
노아의 바램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있자, 그녀는 쿡쿡 하고 웃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난 하고 싶은데."
귓가에 작게 들릴 정도로 속삭인 뒤에 뽀뽀를 한다.
속삭임으로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다. 그러나 옆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노아와 강한윤에게로 향했다.
하긴 작게 말한다고 못들을 리가 없다. 모두 중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원들이니 만큼 말이다.
결혼이라. 언젠가는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긴 했는데 지금이 적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인원 모두와?
그 생각을 하자 강한윤은 머리가 아파왔다. 모두 따로 하기엔 소요가 많고 같이 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할 거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날은 우리가 알아서 잡을 게."
히죽 웃은 노아는 웃으면서 여자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지금이 무조건 기회라니까! 해맑게 소리치는 노아가 소리치자, 각자 반응을 보였다.
"웨딩드레스를 골라야겠는데. 좋은 가게를 알고 있나?"
에리엘은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고.
"결혼식은 귀찮을 것 같긴 한데.. 나쁘진 않겠네."
에우제니아는 히죽 웃은 뒤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읏"
라이라는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날개에 어울리는 옷이 있을까 걱정이에요."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날개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빠랑 결혼이라니.. 후후..."
마리아는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결혼...?! 저도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결혼이라는 제도가 익숙지 않은 그레모리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하든가... 몰라."
흑령은 삐진 것처럼 입을 내밀었다.
"결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키리아는 따뜻한 미소로 강한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스타르님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건 옳지 않아요."
"하지만.."
여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강한윤을 혼내려던 세리스는 말을 흐렸다.
"결혼이니까.. 이번뿐이에요."
"그래."
어차피 결혼을 두 번 할 생각도 없으니 그녀가 용서해준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강한윤은 세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어디에서 결혼식을 할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에는 가장 중앙에 있는 헤이네라스 혹은 뤼네아로 후보가 좁혀졌다.
"그럼 뤼네아로 하죠. 그이가 이 곳을 다스리고 있잖아요?"
라이라가 낸 의견에 모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결혼을 하든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여기에서 입씨름만 해봐야 시간이 늦춰질 뿐이었다.
동부와 북부의 상황을 정리해버린 그녀들은 정확히 한 달 뒤에 결혼식을 잡았고,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 달 금방 지나가네."
"매일 향락에 빠져서 지냈는데 짧게 느껴졌겠죠."
라이라의 따끔한 한마디에 강한윤은 가슴이 찔렸다.
이제는 긴장할 일이 없다고 매일 여자들을 불러서 즐겼으니까.
아침부터 일을 하면서 즐기고, 저녁엔 자유 시간이라고 즐긴다.
일과의 대부분을 여인들과 보냈으니 찔릴 만 했다.
"그보다 라이라 오늘은 평소보다 예쁘네."
평소에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려 눈 한쪽을 가리고 다니는 느낌이지만, 지금의 라이라는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었다.
".. 후우"
라이라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태웠다. 표정만 봐도 저 한마디에 얼마나 부끄러워하는 지 알아채기 쉬웠다.
옆트임이 심한 빨간 드레스가 아니라 하얀색의 청초한 드레스라서 그런 건가.
더욱 괴롭혀주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아직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은 상황.
라이라의 가슴을 괴롭혀줄까. 고민하고 있자,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강한윤. 떨리는 건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걷는 게 기사의 모습이다.
엘프라서 안 그래도 예쁜 에리엘은 화장을 받고 평소보다 더욱 예뻐졌다.
"아니. 그보다 다들 너무 예뻐서 정신을 못 차리겠네."
예뻐진 에리엘 다음으로 나타난 이들도 평상시보다 예쁘다.
노아와 세리스, 그레모리, 마리아, 키리아, 흑령, 베아트리스까지 예쁘다. 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하는 거지.
강한윤이 넋을 못 차리고 있자, 마지막으로 들어온 에우제니아는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따악! 수박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윤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신 안 차려? 우리랑 결혼하는 데 그렇게 반응해도 되는 거야?"
"...다들 예쁘니까."
애인이 칭찬해주는 데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강한윤의 칭찬에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결혼식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강한윤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긴 10분이다.
작전에 참여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심장에 영 좋지 않다. 긴장한 강한윤은 뻣뻣한 웃음을 지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 진짜 긴장 된다."
"옆구리를 간질이면 긴장이 풀리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스가 열 손가락을 굽히며 간질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아니면 강한윤을 내버려두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긴장을 풀어주려는 건지, 키리아도 장난스런 미소를 담아 말했다.
"강한윤,"
그때, 옆에 서있던 노아가 손을 잡아왔다.
"평상시엔 믿음직스러운데 지금은 아니네. 후후 하지만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노아의 말대로 그녀들이 있다.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녀들.
"흥."
물론 아직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이는 흑령도 있지만, 그녀의 호감도는 이미 90을 돌파한 지 오래였다.
"그래. 그렇지."
전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들이다.
앞으로도 쭉 즐거운 나날이 있기를 바라며, 강한윤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