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159화
* * *
입에서 쇠 맛이 난다. 젠장. 출혈을 멈추고 싶은데. 속으로 중얼거린 강한윤은 모든 신성력을 상처 치유에 퍼부었다.
"쿨럭."
하지만 실패한 강한윤은 또 다시 피를 울컥 토해냈다.
상처를 치유하려고 시도했지만 부질없는 시도였다.
'심장이 걸레처럼 조각난 상태라니.'
출혈을 막는 게 고작이다. 신성력으로 망가져버린 심장을 재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상시에 가지고 있는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부어도 가능할까. 심장은 중요한 기관인 만큼 치유가 어려울 텐데.
강한윤은 정신이 흐려지는 걸 최대한 버텨내며 출혈을 막았다.
이 정도가 최선이다. 세리스. 아니면 노아. 둘 중 한명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점점 졸려온다. 강한윤은 내려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더운 것처럼 땀이 났다가 추운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고 점점 나빠지는 중이었다.
"키리아."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강한윤을 내려다보는 키리아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몸을 살펴봤지만, 어디부터 손대야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심장의 치유를 멈춘다면 죽을 상황이었다.
일단... 심장을...
심장을 복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포션을 사용해서 심장을 복구한다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다른 상처까지 치유한다면 몸은 견뎌내지 못하겠지.
그렇다고 다른 상처부터 치유하기엔 그가 버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심하게 경련하고 있는 강한윤의 몸을 보던 키리아는 결정을 내렸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심장부터 살려야 한다.
옷 소매로 눈물을 닦은 키리아는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냈다.
없던 팔이 재생할 정도로 효과가 좋은 포션이지만 그가 버틸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포션은 치유되는 과정에서 마나와 생명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크다.
세리스의 신성력이라면 강한윤의 몸을 충분히 치유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세리스는 여기에 없었다.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지만, 강한윤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제발.
키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포션을 강한윤의 가슴으로 떨어뜨렸다.
상처에 떨어진 포션이 거품을 내며 치유하기 시작했다.
"어윽..."
고통을 동반하는 치유 과정에 강한윤은 신음을 흘렸다.
아프다. 망할 졸라게 아프다. 상처가 아물고 있지만 정신이 나갈 만큼의 아픔이 찾아왔다.
[높은 재치로 기절에 저항합니다.]
[높은 재치로 기절에 저항합니다.]
"크흑...아... 제발.."
이런 고통을 느낄 바에 기절이라도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그걸 막아버린다.
이를 으스러져라 깨문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버티자. 무조건 버텨야 한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위험하다.
강한윤의 고통은 점점 줄어들었다. 정신을 놓을 것처럼 아팠지만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픔이 잦아드는 걸 보니 치유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강한윤의 거칠던 호흡은 진정되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상처부위에서도 미약하지만 심장의 맥박이 느껴진다.
치유가 진행되면서 강한윤에게 졸음이 찾아온다. 왠지 눈을 감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키리아.. 잠시 잘 게. 졸리네.."
이제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잔다니.. 그게 무슨..."
키리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평온한 눈으로 감은 강한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
천천히 손을 뻗어서 강한윤의 볼을 매만졌다.
안 돼.
떨리는 손으로 마나를 흘려보내고서야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제발.
키리아는 울먹이며 마나를 심장으로 흘려보냈다. 제발. 다시 심장이 뛰었으면.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계속해서 시도하지만 강한윤의 몸은 차게 식어가는 중이다. 몸에 마나를 흘려 넣는 만큼 흘러나온다.
강한윤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키리아가 계속해서 시도했다.
"...강한윤"
그녀의 위에서 도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난다.
에우제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키리아의 진심어린 반응을 보고도 에우제니아는 현실을 부정했다.
강한윤이 바닥에 누워 있을 사내가 아니다.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강한윤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다. 마치 얼음처럼.
그제야 에우제니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몸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다. 졸려서. 눈을 감았더니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진짜로 공중에 떠있네. 눈을 슬며시 뜬 강한윤은 몸이 떠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여긴 대체 뭐지?
끝이 없는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그 가운데에는 귀족이 살법한 대저택이 하나 지어져있었다.
꿈인가?
꿈이라기엔 걷는 동안 느껴지는 감각이 현실 같았다.
이런 공간이 현실적이라니, 혹시나 싶어서 강한윤은 볼을 꼬집었다.
아프지 않다. 전혀 아프지 않다. 역시 꿈인 건가?
강한윤은 자연스럽게 대저택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제 펭귄이 말을 한다. 입을 쩍 벌리고 사람다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지만, 강한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꿈이라는 건 이렇게 뜬금없이 펭귄이 나타나서 말을 걸기도 하니까.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그건 올라가면 전부 알게 될 겁니다."
펭귄의 안내를 받아서 안쪽으로 올라간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은 물개들이 기어 다니며 닦고 있고, 계단의 카펫 부분은 고양이들이 꾹꾹이를 하며 손질중이다.
이게 대체 무슨 개꿈이지. 꿈에서 고양이가 나오면 좋은 꿈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강한윤은 멍하니 귀여운 동물들을 보면서 펭귄을 따라갔다.
뒤뚱뒤뚱 걷는 펭귄은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펭귄이 머리를 꾸벅 숙이며 문을 손으로 가리킨다.
짧게 대답한 강한윤은 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 안에는 예상치도 못한 물건이 있었다.
'컴퓨터..?'
현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물건의 등장에 꿈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강한윤이었지만,
"어때. 이번 새로운 모드는 재밌어?"
의자에 앉아서 여유롭게 말을 거는 하얀색 머리칼을 가진 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새로운 모드...? 그걸 어떻게.."
"네가 하겠다고 했잖아? 조금 된 이야기라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 이 곳에 왔던 기억이 나지만, 이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강한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가만히 서있자 그녀는 아하하 하고 웃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데. 이리 와서 앉아 봐. 얘기 좀 해보자."
그녀가 손짓하자 공중에 푹신한 의자가 생겨났다.
이건 꿈? 아니면 믿을 수 없는 현실인가? 강한윤은 의자에 털썩 앉은 뒤,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그게 가장 궁금한 내용이었다.
"너에게 쪽지를 보낸 사람이지."
그녀의 손에 익숙한 네모난 물체. 스마트폰이 떠올라있었다.
"당연히 그런 존재가 아니면 이런 건 못하겠지?"
"신.."
"맞아. 내가 신이야."
마치 아침은 토스트로 먹었다는 느낌의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강한윤에게는 진짜처럼 다가왔다.
"진짜로 신이 맞나요?"
"맞다니까 그러네."
"저를 왜 여기에 데려온 거죠?"
너무 뻔한 질문인가? 하지만 강한윤은 물어볼 기회가 생긴 이상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냥 마음에 들어서?"
그녀는 똑같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만든 게임을 이렇게 열심히 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너는 플레이어 중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제일 잘했으니까."
그녀의 얘기에 강한윤의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는 밥 먹고 게임만 했었지. 중소기업을 퇴사하고 할 일도 없어서 게임에 몰두했었다.
"그게 전부인 건가요?"
"이번 건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느낌이지. 열심히 즐겨줬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을 주고 싶었거든."
히죽 웃은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재밌었어?"
"네 즐거웠죠."
전쟁 자체는 재미있는 요소가 적었지만, 좋아하던 영웅들과 이어지는 건 즐거웠다. 그건 확실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녀가 손을 딱 하고 튕기자, 강한윤의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륙을 정복했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게임을 이겼을 때 뜨는 메시지다. 잠시 깜빡이던 메시지는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어때? 실감이 나?"
"아뇨. 별로 실감은 안 나네요."
대륙을 정복했다고? 그런 기억은 없는데. 마지막으로 전장에서 다쳐서 쓰러졌던 기억만 난다.
신이라고 자칭한 여인은 말을 쭉 이어나갔다.
"12시가 된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리고, 대륙을 정복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가 없지."
"아."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이잖아? 평화가 찾아온 시대에서 쭉 플레이하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그럼 내버려둔다는 걸까.
"근데. 네가 죽어버렸어."
"예?"
"죽어버렸다고. 심정지로."
죽었다고? 잠든 게 아니라? 강한윤이 놀라자,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왜 그렇게 심각한 거야! 당연히 끝은 아니지. 내가 살려주면 되는 거잖아."
역시 신인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적고 가줬으면 좋겠거든."
그녀가 건넨 종이에는 무언가가 잔뜩 적혀있었다.
1. 플레이 소감
2. 밸런스의 문제점
3. 원하는 개선점
이후 47개의 문항으로 총 50개까지 적혀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적고 가지. 고민하던 강한윤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 컴퓨터 좀 써도 될까요."
손으로 적는다면 하루도 부족할 것 같았다.
*
"진짜야? 거짓말이지...?"
싸늘하게 식은 강한윤의 시체 앞에서 다른 여인들도 모여 있었다.
노아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고, 매번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던 에리엘도 지금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전쟁에서 매번 살아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몸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죽을 거라곤 생각치도 못했다.
승전보를 알리며 돌아왔더니 돌아온 건 그의 죽음이었다.
"세리스."
"...미안하지만 불가능 해."
에리엘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강한윤을 살려내기엔 늦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신성력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리고 살려내기 위한 시도는 이미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모두가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를 하고 있는 눈빛이다. 세리스는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다시 신성 마법을 준비했다.
레저렉션.
세리스의 주변으로 신성력이 물결처럼 흐흐른다. 하나의 거대한 줄기를 이룬 신성력이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갔다.
강한윤의 온 몸을 감싼 신성력이 몸에 깃들며 주변의 공기가 따스해진다.
"하아... 하아..."
모든 신성력을 쏟아낸 세리스의 이마에 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모두 강한윤을 둘러싼 채로 지켜보고 있던 그때.
꿈틀. 강한윤의 손이 움직였다.
잘못본 게 아니다. 실제로 그의 손이 움직였다는 걸 알아챈 이들은 강한윤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으으... 작게 신음을 흘린 강한윤은 눈을 뜨고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그리고 주변의 따끔따끔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매섭다. 그녀들과 눈이 마주친강한윤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했다.
"어...다들 무사하네?"
고민하다가 겨우 내뱉은 한마디는 죽은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기엔 태평했지만.
"다치지 말라고 한 사람이 다치다니. 너무 하잖아요."
"맞아 너무 하잖아."
"내 생각도 그렇다."
그가 행동하기를 기다린 모두는 강한윤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눈가가 촉촉한 걸 보니 걱정이 많았나보네.
강한윤은 그녀들의 등을 토닥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가자."
이제는 뤼네아로 복귀할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한윤은 가슴의 욱씬 거림과 함께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왠지 정신이 어지럽다.
강한윤은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