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157화
* * *
"무슨..."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미쳐버린 놈이 틀림없다.
적진에 뛰어들고 허무맹랑한 제안을 해놓고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죽여라.
크릭스에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였다.
더 이상 얘기를 들을 이유가 없다. 죽여라.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린다. 무릎 꿇은 강한윤을 죽여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동부가 무너진다고?"
크릭스는 한 가지는 물어보고 싶었다.
왜 동부가 무너진단 말인가. 그 사실이 확정된 일인마냥 단언하는 강한윤의 눈은 확신에 차있었다.
"왜 무너진다고 하는 거지?"
"전투에서 이겨도 동부는 무너지게 되어있다고. 오히려 지는 쪽이 나을 걸."
강한윤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중부. 서부. 북부. 남부를 전부 먹으면 아이구 잘했습니다 하고 가만히 놔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간단한 이야기다. 국왕 크릭스는 아가레스에게 마력을 공급해주는 휴대용 마석이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할 이유가 없어지거나 여유가 생기게 된다면? 그를 놔둘까?
"쓸모가 없어진 뒤에 너를 살려둘 거라 생각하나?"
"..계약은 절대적이다."
이를 악물고 우기는 크릭스의 모습은 마치 세살짜리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스스로 생각해봐. 살려둘 것 같아? 아니면 죽일 것 같아?"
강한윤은 시건방진 말투로 말했지만, 크릭스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포위당한 동부를 살려야 한다. 왕실의 핏줄이 여기서 끊기면 안 된다.
그 생각에 마족과 계약을 맺었지만, 이제 슬슬 후회가 되고 있었으니까.
싸움을 이기고 전쟁을 이긴다면 마지막엔?
마족을 등에 업고 승리한 뒤에 마족이 살려준다는 보장이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크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병사와 기사들의 시선이 쏠린다. 듣는 귀가 많다. 대화에 과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간단한 마법으로 주위와 소리를 차단한 크릭스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어떻단 말이냐...! 동부를 먹힐 바엔 저항이라도 하는 게 맞지 않나!"
"음.."
그건 맞다. 마지막까지 모든 기회를 삼아서 저항해야한다.
강한윤도 동의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마족은 아니지."
서큐버스를 제외하고 음침함이 기본 패시브로 장착된 마족은 아니었다.
"마족과 손을 잡을 바엔 항복을 하는 게 낫지. 지금이라도 항복해라."
"그런 개소리를 내가 왜 들어야 하지?"
"이겨도 져도 너는 최악의 국왕이라는 평가를 들을 테니까."
최악의 국왕. 그 단어에 크릭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후대는 이렇게 평가를 내리겠지. 마족과 붙어먹은 최악의 국왕이라고."
"내가 그렇게 내버려둘 것 같나?"
"못할 것 같은데. 이기면 마족이 너를 버리고 지면 그대로 사실만 적히겠지. 어느 쪽이든 최악아닌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최악의 결과 뿐. 진퇴양난의 상황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크릭스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마지막 제안을 하려고. 항복해라."
"항복..."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단어다. 항복하기 싫어서 마족과 손을 잡았건만. 여기까지 와서 항복을 생각한다니.
크릭스는 자신의 처지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리를 왜 듣고 있는 거지? 빨리 죽여라. 크릭스. 마지막 기회다.
그에게만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도 귀에 앵앵 거린다. 양쪽에서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믿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보다... 내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나도 남들이 모르는 능력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지. 계약 내용도 알고 있어."
어우. 아주 떡칠을 해놨네. 크릭스의 정보를 열어본 강한윤은 속으로 엄살을 떨었다.
아가레스와 계약을 맺은 상태. 거기에 온갖 패널티가 붙어있다. 그것도 크릭스에게 불리한 쪽이다.
계약 불이행시 육체의 사망, 영혼의 소멸 등등. 안 좋은 건 전부 다 붙어있는 상태였다. 조금 어지럽다.
아마 계약의 조건은 동부의 보존?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욕심 많은 녀석이 그런 식으로 조건을 걸 리가 없다.
강한윤은 떠보기 위해 말을 걸었다.
"대체 뭘 원하고 계약을 맺은 거지? 동부의 승리... 이런 건 아닐 테고..."
아니다. 그가 계약의 조건으로 걸었던 내용이 아니다.
크릭스의 표정이 변하지 않는 걸 바라보던 강한윤은 설마 했다.
"왕실의 보존. 이런 조건을 걸었나?"
"..."
이딴 내용으로 계약을 했다니. 동부가 사라진다면 왕족도 의미가 없는 건데.
어이가 없어진 강한윤은 비웃음을 담았다.
"그런다면 더더욱 멍청한 거지."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그 한마디에 크릭스는 분노를 터트렸다.
"동부를 지키기 위한 내 노력을 네가 뭘 안다는 거냐!"
허리춤의 칼을 빼어든 크릭스는 강한윤의 목에 칼을 겨눴다.
"항복하라고? 항복하면 내가 어떻게 되는 지도 알고 있을 것 아니냐!"
강한윤은 그의 멍청함에는 비웃음을 흘리고 싶었지만, 막상 목에 닿은 칼의 감촉에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목숨? 그게 중요한 건가?"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아있지만 강한윤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겨도 죽고 져도 죽는다. 그렇다면 목숨에 저울질을 하라고."
목숨에 최대한의 값을 매겨라. 크릭스의 검이 살짝 흔들린다.
강한윤의 목에 날카로운 칼이 닿는다. 피가 송글송글 맺혀서 목을 타고 흘렀다.
"내가 목숨 값을 두둑히 쳐주겠어. 마족과 붙어먹은 것?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용서해줄 수 있다. 두팔 벌려서 껴안고 뽀뽀도 해줄 수 있어."
진심이었다. 마족과 붙어먹은 대신 목숨으로 값을 지불하고 아가레스에게 타격을 먹인다면 그의 목숨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마족과 싸우다가 사망한 고귀한 왕으로 이름을 남겨주지. 너의 자손들은 그만한 명예를 얻을 거야."
명예. 크릭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 녀석을 죽이라고!
귀에 들리는 악마의 속삭임을 무시한 크릭스는 결정을 내렸다.
그가 팔 소매를 걷자, 불길한 문양의 검은색 문신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묻지. 동부의 사람인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기 전 크릭스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처음볼 때부터 생긴 의문이었다. 오드웰 연합군의 군복을 입고 있지만, 동부 사람처럼 친근한 외모였으니까.
아무리봐도 동부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헬리에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 그래서 동부가 싫지는 않아."
"그런 건가."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만났다는 건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거겠지.
크릭스는 팔을 향해서 칼을 내리쳤다. 마나를 담아서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그때 크릭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촉수. 거기서 크릭스의 생각은 끊겼다.
노인에게서 나온 거대한 촉수가 크릭스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가슴팍이 벌어지며 그대로 먹혀버린다.
"구...국왕님....!"
기괴한 노인에게 국왕이 잡아먹혔다. 놀란 기사들과 병사들이 칼을 겨눴다.
탓! 땅을 박찬 기사가 노인에게 칼을 휘두르지만, 가볍게 피해졌다.
"평범한 노인네가 아니다! 모두 조심해라."
"후... 아직 준비가 안 됐지만 일을 시작해야겠군."
노인으로부터 사악한 마기와 함께 검은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보기만해도 불길한 연기에 모두가 더더욱 긴장하며 무기를 들어올린다.
[높은 재치로 혼란에 저항합니다.]
'이런 씹.'
메시지를 읽은 강한윤은 욕을 내뱉으며 연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
"카이보옌. 뤼네아에 도착하면 바로 대련이야. 좋지?"
어깨에 도끼자루를 퉁퉁 두드리며 에우제니아가 웃었다.
좋겠냐고 망할년아. 마음같아선 그녀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다. 아니면 따지고 싶었다.
같은 계급에 직급인데.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 참을 수 없다고.
...당연히 좋다. 강해지는 게 싫은 전사가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대들진 못했다. 대들었다가 맞은 기억이 머릿속에 깊게 새겨져 있으니까.
대련이라는 핑계를 빙자한 구타를 당하느니 고개를 숙이는 게 나았다.
거기에 대련을 하면서 강해지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카이보옌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그저 자존심과 자존감이 조금 구겨지는 걸 빼면 말이다.
"흐흥."
뤼네아로 지원을 간다는 사실에 에우제니아는 평소보다 들떠있었다.
강한윤과 오랜만에 만나는 게 기쁘다. 아마 시간이 남을 것 같으니 찐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대련과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찾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에우제니아의 정면에 공간이 일렁거린다.
"...모두 전투준비."
에우제니아가 도끼를 들어올리자, 다른 병사들도 전투대형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거대한 마나가 모여들고 하나로 뭉친다. 공간이 완전히 찌그러진 뒤에 누군가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인간. 여자. 아는 얼굴이다. 에우제니아는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키리아?"
헤이네라스에서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나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마나 탈진의 증상도 보이고 있었다.
지친 사람처럼 걸어온 그녀는 에우제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에우제니아는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
"죽어! 죽어! 마족 녀석아 죽어 제발!"
"정신 차려! 왜 나한테 검을 휘두르는 거야!"
"모두 대형을 유지하라!"
기사가 소리치지만 한 번 무너진 상태는 복구 되지 않았다.
부대가 무너지는 상황에 아가레스는 작게 웃었다.
'그래. 서로 죽이고 죽여라.'
시체가 쌓이고 쌓일수록 자신에게 유리해지니까.
계획대로라면 뤼네아의 인원까지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졌다. 저쪽에 숨어있는 강한윤 저 녀석 때문이다.
계획을 눈치 챈 건지 혼자 다가와서 시간을 끌고 일을 벌였다.
'더 이상은 놔둬선 안 돼.'
욱신! 미래 예지를 사용한 대가로 지불한 눈이 시큰거렸다.
강한윤을 죽여야 수월한 작전이 가능하다. 미래가 알려준 사실을 확인한 아가레스는 바닥에 쓰러진 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크윽.."
기사의 목을 붙잡자 생기와 지식이 아가레스에게 흘러들어간다.
이 녀석도 쓸모있는 지식은 없군. 아가레스는 아쉬워하며 강한윤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봤던 미래에서는 강한윤의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나와있었다.
'나를 위해 제물이 되어라.'
아가레스가 손짓하자 시체들이 하나로 뭉쳐서 살덩이가 되었다.
그 살덩이는 주위의 인간들을 죽이면서 강한윤을 향해 나아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강한윤은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하며 병사들의 사이를 지나다녔다.
난전 속에서 도망만 친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닌데. 강한윤은 아가레스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바닥에 떠오른 큰 마법진은 서서히 붉게 물드는 중이었다.
[마법진 : 바알 소환이 진행 중입니다.]
바알을 소환하고 뤼네아를 공격할 생각인 건가. 거기서 생겨난 시체로 또 다른 권속을 소환하겠지.
아가레스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병사와 기사들을 흡수하고 다니는 아가레스. 저 녀석에게 타격을 줘야 한다.
"...후우"
강한윤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뒤얽혀서 서로 싸우고 있는 전장 속에서 도망칠 수 없다.
'기회는 한 번인가?'
앞으로 달린다. 주변의 싸움을 무시하고 노인의 모습인 아가레스를 향해 달렸다.
"그어어어!"
호문쿨루스들이 강한윤을 향해 달려든다. 그래봐야 마기로 이루어진 시체들.
강한윤이 신성력을 흩뿌리자 살덩어리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멈추지 않고 달려나간 강한윤은 손을 뻗는다.
아가레스에게 타격을 줄 방법은 이것 뿐이었으니까. 강한윤은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뻗은 손은 닿지 않았다.
"크흑.."
"스스로 잡혀주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아가레스는 웃으며 강한윤의 목을 붙잡았다.
처리해야 할 대상이 직접 오다니. 불에 뛰어드는 하루살이 꼴이다.
아가레스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강한윤을 서서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