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156화
* * *
보고를 들은 강한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했지?"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가오고 있는 경로는?"
"헬리에크와 가이안 사이의 협곡을 지나 오고 있다고 정찰대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나가보도록."
병사의 보고를 들은 강한윤은 눈물샘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적군이 몰려온다고? 지금 이 타이밍에? 대체 어떻게?
"강한윤.. 괜찮아요?"
"어. 괜찮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는 키리아를 향해 손을 내저은 강한윤은 생각을 정리했다.
베그시스에서 뤼네아까지 걸리는 시간은 행군으로 사흘 반나절 정도다.
지금 위치는 뤼네아까지 반나절 정도. 헬리에크와 가이안 사이의 협곡을 넘으면 바로 뤼네아다.
그렇다면 베그시스에서 군대가 출발한 건 사흘 전.
1팀이 출발하기도 전에 미리 출발해있었다는 얘기였다.
'망할. 어떻게 된 거야.'
1팀과 2팀은 이제야 전투를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맞춰서 움직여야할 텐데. 개별행동을 하는 것처럼 뤼네아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다고?
미쳤거나 정보가 흘러나갔거나. 아니면 그 이외의 무언가다.
"...하아"
강한윤은 작전실을 뛰쳐나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의 첨탑까지 올라온 강한윤의 눈에는 일렁거리는 동부의 병사들이 보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병사를 쥐어짰는지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은 숫자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
뤼네아의 전력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동부의 전력이라면 뤼네아를 뚫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중부부터 계속 세력을 흡수해온 결과가 여기에 있으니까.
확실하게 이기는 건 불가능해도 농성하고 방어하며 시간을 끄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앞으로 반나절이면 헤이네라스와 사티라에서 지원을 온다.
그 시간을 버티면 유리한 상황이 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투 그 자체였다.
'뭔가 이상해.'
뤼네아에서 지원을 바라고 버틴다. 가장 승률이 높아 보이는 방법이지만 강한윤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쪽에서 가장 쉽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상대가 원하고 있지 않을까.
'...아가레스'
아가레스는 싸울 때 생기는 시체를 권속으로 사용한다. 이 녀석은 이길 생각으로 뤼네아로 오고 있다.
자살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이길 수 있으니 뤼네아로 오는 게 확실하다.
준비한 게 없다면 그렇게 할 리가 없으니까.
강한윤은 뤼네아를 점령당하고 쭉 밀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원을 오면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원이 의미없는 상황이 된다면?
뤼네아에서의 전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들은 마족이니까. 제물을 얻기 위해 전투를 유도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전투를 피해야 해.'
아니 최소한 양측의 사망자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마족이 이상한 짓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곰곰이 생각하던 강한윤은 전투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렸다.
"뤼네아에서 전투를 막아야 해."
"어떻게 막을 생각이에요?"
"...내가 가서 설득하고 아가레스를 무력화 시켜야 해야겠지."
동부의 군대를 설득해서 전투를 피하거나, 아가레스의 힘을 깎을 기회를 만든다면 확실한 승리다.
강한윤은 손에 신성력을 띄워보였다. 이걸로 아가레스를 무력화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그건... 안 돼요."
강한윤의 얘기를 들은 키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하는 작전이라니. 너무 무모하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실패할 때 죽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제가... 제가 가겠어요."
저주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런 몸을 가지고 있으니, 강한윤 대신에 간다면 딱 어울린다.
마족을 죽이거나 시간을 끌며 전투하고 지원을 기다린다.
자신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키리아."
"그냥... 마족만 죽이면 되는 거잖아요."
"그건 불가능해. 모든 병사들을 방패로 내세울 거야."
불가능하다. 라고 못 박듯이 강한윤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죽지만 않을 뿐이지. 너 스스로 한계가 있는 걸 알고 있잖아. 키리아."
강한윤은 손을 뻗어 키리아의 턱을 어루만졌다.
"난 죽으면 그만이지만, 죽음보다 괴로운 현실이 다가올 수 있어."
"읏..."
강한윤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나왔다. 키리아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이 망가지고 말 거야."
마녀라고 마나가 무한한 건 아니다. 싸우다보면 언젠간 마나가 바닥난다.
죽지만 않을 뿐. 죽음과 비슷한 형태는 널려 있었다.
마나가 봉인된 채로 바다에 던져진다거나. 어딘가에 갇힌다거나. 아니면 마족에게 타락당하고 정신을 뺏길 수도 있다.
죽음보다 괴로운 현실은 키리아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이 된다.
"절대 안 돼."
키리아의 무력화 방법을 알고 있기에 강한윤은 더더욱 키리아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럼 나가서 뭘 어쩌려는 거예요. 전장으로 혼자 나가서 시간을 끌어봐야 얼마나 가능하겠어요. 5분? 10분?"
아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일 지도 모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대화를 해본다고요? 적과 대화가 통할 거라 생각해요?"
성공할 확률이 너무 희박하다. 공격하러 오는 적군을 설득시킨다니.
"안 가는 방법도 있잖아요."
뤼네아에서 버틴다. 지원을 기다리고 아가레스를 쓰러뜨린다.
그 방법이 어쩌면 제일 확실해 보인다. 확실한 승리다.
버티고 버티다가 카운터펀치를 먹이면 되는 싸움이다.
키리아가 생각하기엔 그랬지만 강한윤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야. 그건 절대 안 돼."
절대 그래선 안 된다. 본능과 직감. 그리고 쌓여있는 강한윤의 경험이 경고하고 있었다.
"상대가 원하는 건 뤼네아에서 농성하는 것일 확률이 높아. 다른 수를 써야 해."
아가레스는 뤼네아를 먹고 단숨에 상황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게 틀림없다.
강한윤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이게 상대의 함정이라면요...? 상대의 노림수가 처음부터 이거 였다면요?"
완고한 강한윤의 태도에 키리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죽게되는 거지. 강한윤은 말끝을 흐렸다.
비참한 최후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강한윤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썩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싸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키리아. 공간이동 마법 사용할 줄 알지."
"네.."
"나를 저 지평선 부근으로 보내줘."
군대가 다가오고 있는 근처. 그쪽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에 키리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싫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다. 키리아의 손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 잠깐만요."
마법을 캐스팅하다가 멈춘 키리아는 강한윤의 입에 짧게 키스했다.
쪽. 입술을 부딪친 뒤에 마법을 다시 전개하자, 강한윤의 몸이 발부터 서서히 희미해졌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그건 당연하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강한윤의 모습에 키리아가 웃음을 흘렸고, 강한윤은 완전히 사라졌다.
*
동부의 왕. 크릭스는 군세를 이끌고 뤼네아로 향했다.
협곡은 굉장히 위험한 장소다. 여기에서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군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르지만.
"그럴 일 없네."
마치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
겉보기엔 힘없는 노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왜? 두려운 건가? 그럴만하지.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만해."
힐끔. 국왕인 크릭스가 계속해서 눈치를 보았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악마가 저 노인이었으니까.
크릭스는 그와 계약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동부를 지키고 싶은 건가?
동부를 지키고 싶냐니. 당연한 얘기다. 동부를 넘겨주는 것보다는 지키고 싶었다.
그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이니까.
동부에 승리를 쥐어줄 수 있다.
그 얘기 한마디에 크릭스는 마족과 덥석 계약을 해버렸다.
잘못된 선택이었나. 마족과 손을 잡다니. 크릭스는 잠시 후회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뤼네아와 커다란 세계수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뤼네아만 점령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일이 술술 풀린다. 국왕 크릭스는 아가레스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뤼네아를 시작으로 연합군은 무너질 거라고.
'하지만...'
동부의 병력은 오합지졸에 가깝다. 기사들의 숫자는 적고, 병사들은 최대한 징집해서 끌어 모았다.
이 상태로 어떻게 뤼네아를 점령한단 말인가. 뤼네아엔 소드 익스퍼트 기사급의 병력들이 수비를 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걱정이 많군. 크릭스."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많으니 걱정이 많은 거다. 생각을 비워라. 그저 내 말에 복종해."
그게 가능하다면 진작 하고 있었겠지.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생각한 크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가레스의 말대로 협곡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걸까.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로 대륙을 점령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병력까지 협곡을 빠져나오고 진형을 갖추었다.
이대로 뤼네아의 근처까지만 갈 수 있다면. 아가레스가 모든 걸 해결해줄 거다.
안심하던 그때, 바로 앞에서 허공이 일그러진다.
"모두 전투 준비!'
갑작스런 마나의 반응. 선두에 서있던 기사가 칼을 빼어들고 자세를 취했다.
마법사들은 기습을 대비해 배리어를 전개하고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올린다.
거대한 마나 반응에 모두가 긴장한 그 순간.
"크학...아우 씨발..."
강한윤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온 몸으로 바닥에 착지해서 아프다.
돌부리에 찍었는지 특히 허벅지가 쓰라리다. 한 게 없는데 벌써 아프다니.
몸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낸 강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모든 시선이 쏠리는 것을 받아낸 강한윤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얘기를 하고 싶은데. 국왕 크릭스하고 말이야."
손을 들어 올린 강한윤은 보기엔 위협이 되지 않았다. 휴대하고 있는 무기도 없고 나약해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걷는 강한윤을 기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붙잡았다.
그대로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목에는 칼을 들이 댄다.
"어우."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는 건 언제 겪어도 적응되지가 않네.
"네 녀석은 무슨 자신으로 여기로 들어온 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다.
강한윤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엔 동부의 국왕 크릭스가 말에 타고 있었다.
"뤼네아를 지키고 있는 강한윤이다. 너희들의 기준으로는 영주라고 할 수 있겠지."
"영주?"
영주라는 단어에 크릭스가 반응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쉬워지겠군. 우리는 뤼네아를 점령하러 가던 참이었으니까. 죽이면 되겠군."
그의 말에 기사가 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신호만 준다면 목을 벨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강한윤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후회할 텐데."
"후회? 후회는 혼자 여기까지 온 자네가 하겠지."
"아니. 동부의 왕. 크릭스. 당신이 후회할 거야.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좋은 제안이니까."
크릭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쓸데없는 도발이군."
"아니. 사실을 말한 거야. 내 제안을 무시한다면 동부는 결국 무너질 테니까."
크릭스가 손을 들어올린다. 기사가 검을 거두는 것을 본 강한윤은 양반다리로 앉았다.
"저 뒤의 노인을 굳게 믿고 있나 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국왕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하려던 말은 계속 해야 하니까.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 국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