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140화
* * *
게리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그런 의문도 잠시. 게리스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려고 하는 걸까.
수많은 나무들과 안개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그렇게 둘러보던 게리스의 시선이 강한윤에게로 향했다.
"...강한윤"
눈이 마주친 강한윤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저 녀석의 눈이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눈엔 핏발이 서있고 초점도 맞질 않는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녀석을 조심하라고.
본능에 충실한 강한윤은 게리스와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아직 제 정신이 아닐 때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도망치면 된다.
안개도 자욱하고 시야 바깥으로 도망간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천천히.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움직이다보니 게리스의 모습은 실루엣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소드마스터의 색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일단 되는 대로 해봐야 한다. 저 녀석과 멀어지는 게 중요하니까.
"강한윤... 강한윤... 찾았다."
그때, 안개 속에서 게리스의 가래 낀 목소리가 들리고.
콰직 순식간에 강한윤은 땅에 쓰러졌다.
"커헉..."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무슨 공격에 당했는지 알아차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압도적인 무력의 격차.
강한윤은 얼굴이 뒤틀릴 정도의 격통에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배를 공격당해서 숨을 쉬기 어렵다. 몸이 산소를 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본능이 경고한 건 게리스가 적대를 표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멀어져야한다. 배의 고통을 무시하며 기어서 반대쪽을 향해 움직였다.
'게리스의 상태는 온전치 않아.... 기회는 있다.'
망각의 안개에 당해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법.
어떻게든 키리아가 있는 집으로 간다면 방법이 생길 거다. 그녀는 강하니까.
"기억났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하듯이 게리스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살의가 가득담긴 눈빛.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롱소드.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고통이 느껴진다. 강한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드디어 기억났다. 강한윤. 너를 찾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잊어먹지 않으려는 걸까. 게리스는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했다.
눈을 번뜩인 게리스가 이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큭...크큭... 내가.. 해냈다. 해냈..다...! 지휘관은.. 내 자리다...! 내가 이긴 거다!"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게리스는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듯이 소리쳤다.
"지휘관은 내 자리다! 내 자리... 어디.. 어디였지... 남부.. 동부... 남부... 어쨌든 내 자리다!!!"
게리스는 자신이 지휘관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듯이 소리치고 강한윤을 쳐다보았다.
"쿨럭..."
배에 검을 찔린 강한윤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 놈의 망할 지휘관자리. 그딴 게 뭐라고 가지고 싶으면 가지던가.
지휘관의 자리가 좋긴 하지만 목숨을 대신할 정도는 아니다. 목숨과 바꿔야한다면 결코 거부하리라는 건 확실했다.
"크흑..."
찔린 곳이 뜨겁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살이 아려왔다.
배에서 울컥 울컥 피가 흘러나왔다. 찔린 위치로 보아하니 폐와 심장이 다친 건가. 아니.. 간인가.
어디든 간에 죽어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강한윤의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때, 게리스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크하... 으...윽... 머리가... 머리가 아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치던 게리스는 척 보기에도 이상했다.
머리카락을 뽑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머리를 긁는다.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흐름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긁었다.
까드득 까드득 머리뼈가 부서질 정도로 긁던 게리스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머리...머리!!! 머리가 이상해....!!! 누군가... 도와줘...!!!"
"그런가요. 그러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마치 개미를 밟아 죽이는 사람처럼 무심한 목소리다.
누구지? 그 생각이 게리스의 머리를 스쳐감과 동시에 몸이 검은색 안개에 휩싸였다.
"크흑...크윽..."
목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게리스는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크흑...헉..."
목을 조르며 자신이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살고 싶다는 본능에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을 움직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누군가. 도움을... 게리스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혹시나 도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녀는 게리스를 지나쳤다.
키리아는 게리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게리스는 그녀에게 쓸모없는 침입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기에 스스로 죽게 만드는 저주를 걸었다. 그녀는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관심사는 침입자 게리스가 아니라 조금 멀리 떨어진 사내에게 있었다.
"크헉... 허억... 허억..."
"괜찮아요...?"
키리아는 죽어가는 강한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상처가 깊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다.
다행이었다. 바깥의 이상함을 눈치 채고 달려 나와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런 잔인한 건 얼마든지 봤을 텐데. 강한윤. 그가 다친 모습을 보니 손이 저절로 떨렸다.
키리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강한윤에게 꽂혀있는 칼날을 붙잡았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칼을 제거해야 한다.
얼마나 세게 내려찍었는지 칼이 땅 깊숙이 박혀있다.
"조..조금만 참아요."
"크아아아악....!"
키리아는 단숨에 칼을 뽑아내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응급 처치를 위해서 회복력을 극대화한다. 주르륵 흘러내리던 피가 뚝뚝 흐를 정도로 지혈이 되고 있었다.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제는 상처를 완전히 치유 할 타이밍이다.
키리아는 자그마한 포탈을 열어서 집 안에 있는 상처 치료약을 꺼냈다.
"조금 아플 거예요."
"크윽...네... 빨리 해요."
설마 칼에 찔린 것보다 아플까. 키리아가 치료약을 상처에 붓자 치익 하는 소리와 끓어올랐다.
"크으으윽...!!!!"
눈물 날 정도로 아프다. 강한윤은 정신을 놔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정신을 놔버렸다면 좋겠지만.
[높은 재치로 기절에 저항합니다.]
시스템이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그냥 날 죽여 이 새끼야!!!'
강한윤이 속으로 소리치는 것도 잠시. 상처가 치유되자 고통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몸의 힘은 여전히 들어가질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보다.
"이것도 먹어요."
키리아는 응축된 원기 회복제를 강한윤의 입에 털어 넣었다.
"윽.."
조금 쓰다. 한약 같은 맛에 강한윤은 눈을 찌푸렸다.
입 안에 남아있는 쓴맛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으니, 온 몸으로 따스함이 퍼진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 사실은 확실하다.
"크윽..."
강한윤은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날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이번엔 진짜로 죽을 뻔했다. 강한윤은 상의를 들어서 칼에 찔린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자국을 남기지 않고 치유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모습에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 새끼가 칼로 찌를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
강한윤은 발로 게리스를 톡 건드렸다. 확실히 죽은 상태다.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걸까. 왜 기다리지 않고 망각의 숲으로 온 거지?
혹시 키리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마녀니까. 강한윤은 물음을 던졌다.
"이 녀석의 기억을 읽을 수 있나요?"
"가능하긴 해요. 부분적이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게리스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마나를 끌어올린 키리아. 그녀가 게리스의 머릿속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살펴본 기억을 토대로 정리하면 그래요."
키리아가 설명한 내용은 이러했다.
강한윤이 망각의 숲으로 사라진 지 시간이 흐르고 게리스는 강한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의견은 반반. 강한윤이 죽었다. 아니면 일을 진행하고 있다. 둘로 나뉜 상황이었다.
그때 게리스는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할 겸, 확인하기 위해 망각의 숲으로 향하겠다고 말했고.
그 결과 망각의 숲에서 헤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거다.
'근데 나를 왜 죽이려 한 거지.'
내용을 전부 들은 강한윤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망각의 숲에서 안개나 없앨 생각을 하지 왜 칼로 찌른단 말인가.
처음부터 경쟁자 제거를 할 생각이었나. 그렇다면 최소한 일의 진행이 편해질 테니 말이다.
그거 말고는 그럴싸한 추론이 떠오르지 않는다.
합리적 의심이지만 사실상 사실이라고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죽어버린 자는 말이 없으니까.
강한윤은 식탁 의자에 앉아서 멍한 채 키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앉으면 이런 풍경인가.
키리아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 다쳐서 그런 걸까. 그녀가 먼저 요리하겠다고 말했고 강한윤은 그래서 요리가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다 됐어요."
"오..."
식탁이 부러질 만큼 많음 음식을 보고 강한윤은 감탄했다.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콘치즈처럼 낯익은 음식도 있는 반면, 베이컨을 두른 빵도 있다.
이건 대체 뭘까. 겉은 바삭바삭하고 촉은 베이컨 기름으로 촉촉한 맛이려나.
후후 불어서 한 입 먹으니 맛있다. 역시 베이컨은 진리지. 강한윤이 열심히 밥을 먹는 모습을 키리아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강한윤은 빵을 입에 가져가다가 멈췄다.
"안 드시나요..?"
"아.. 아뇨 먹어야죠.."
오늘 다치고 난 이후로 키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약간 멍하다고 해야 할까. 넋이 나갔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변화를 알아챈 강한윤은 눈치를 보았다.
키리아는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한윤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먼저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라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렇게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저녁식사가 이어졌고, 그 분위기는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똑같았다.
'...신경 쓰이네요.'
침대에 누운 키리아는 오늘 보았던 강한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는 분노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
그럼에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강한윤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죽어가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자신의 모습.
키리아는 스스로의 모습에 충격을 먹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받아들이려고 한 적이 있었을까.
마녀가 된 이후로 모두에게 도망치고 모두를 거부했던 삶이다.
누군가를 믿어서 배신당한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아무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녀사냥을 당해서 죽음에 가까운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모두를 미워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윤이라는 사내가 신경 쓰였다.
같이 지낸 시간이 일주일에 불과하지만 즐거웠다.
다른 사람과 지내는 게 이렇게 편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한 사람이다. 마음이 놓이는 사람. 키리아는 강한윤이 있는 쇼파를 쳐다보았다.
"혹시... 주무시나요..?"
"..네 불러서 깼네요. 거의 잠들었는데."
"앗.. 죄송해요. 제가 깨워버렸네요."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죠."
강한윤의 대답에 키리아는 작게 심호흡했다.
키리아는 강한윤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대화를 더 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까. 키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키리아. 무슨 이유로 부른 건가요?"
강한윤의 물음에 잠시 침묵이 맴돌고, 키리아는 이불을 반쯤 걷었다.
".. 혹시 이쪽으로 올 수 있나요? 다친 곳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 해보고 싶어서요."
자기 쪽으로 오라는 듯이 그녀는 침대를 톡톡 두드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