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39화
* * *
"자요."
강한윤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특별한 레시피로 조리한 것도 아니다. 간을 잘 한 스튜와 간단하게 달달한 양념을 만들어서 소시지에 잘 베이도록 구웠다.
스튜를 접시에 담으니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오두막에 퍼진다.
다른 접시에는 찬장에서 발견한 호밀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고 치즈덩어리를 얇게 썰어서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적당히 간이 된 계란말이까지 완성하는 것으로 음식 준비가 끝났다.
그저 그것뿐이지만 키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남이 해주는 음식을 얼마 만에 먹는 걸까. 최소한 년 단위로 세야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음식이다. 전부 집에 있던 재료들로 만든 거니까.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이유가 뭘까. 요리 실력이 좋아서? 아니면 스스로 조리하지 않아서?
냄새가 좋다. 평상시에 요리해서 대충 먹기만 한 키리아는 기대하며 소시지를 포크로 썰었다.
"으음...! 맛있어요!"
소세지를 한 조각 먹은 그녀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달달한 소스와 짭조름한 소세지가 이렇게 어울리다니.
간단한 음식이지만 정성이 들어가 있다는 걸 키리아는 눈치 챘다.
이런 음식은 그저 실력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소스는 어때요? 즉석으로 만들어봤는데."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던 강한윤.
그는 키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맛있어요! 간단한데 이렇게 감칠맛을 내다니.. 신기해요."
"다행이네요."
평상시에 좋아하는 맛으로 조리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평가가 좋다니 다행이다.
취향이 비슷해서 그녀에게 점수를 쉽게 따낼 수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확실히 빠른 편인데.'
키리아의 정보창을 열자 띠링 하면서 정보가 갱신된다.
호감도 : 32 / 100
적당한 부탁이나 요구를 들어주는 친함 단계가 호감도 70이다.
일단 임무를 해야 하니까. 안개를 없애기 위해 부탁을 하려면 호감도부터 올려야한다는 게 강한윤의 생각이었다.
'맛있게도 먹네.'
음식을 만드는 건 힘들지만, 저렇게 기쁜 표정으로 먹어주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렇게 착해 보이기만 하는 여인이 어째서 마녀가 됐을까.
그녀의 설정을 전부 꿰고 있는 강한윤은 소시지를 반 잘라서 그녀의 접시에 옮겼다.
"더 먹어요."
",..고마워요. 이름이..."
"강한윤이라고 합니다."
"저는 키리아라고 부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얼마만의 호의인지 모른다. 키리아는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이제 자야하는데.. 미안해요 손님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서..."
"아뇨. 그럴 수 있죠."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잠 잘 준비를 끝낸 키리아와 반대로 강한윤은 쇼파에서 자기 위해 누웠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점은 여벌 이불이 있어서 뭔가를 덮을 수라도 있다는 걸까.
아무것도 없이 자는 건 정말 너무하지. 강한윤은 이불을 덮었다.
차가운 이불은 체온을 머금어서 금세 따뜻해진다.
등과 자세가 조금 불편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잘 수 있지 않을까. 강한윤은 눈을 감았다.
방금 막 씻고 나와서 몸도 따스한데 쇼파는 푹신하고 이불은 따뜻하다. 잠이 딱 잘 오는 상황이다.
망각의 안개를 헤맬 때만해도 엄청 위험한 거 아닌가. 지금이라도 돌아 가야하나 고민하던 게 거짓말 같다.
지금은 키리아의 집에 와서 편하게 잘 준비를 하고 있다니. 점심의 상황이랑 너무 대비된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키리아의 호감도를 올릴 만한 행동을 생각해보자.
먼저 일어나서 아침이라도 준비한다면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까.
강한윤의 의식이 어둠 저 너머로 향하던 그때.
"으으... 흐으... 으윽..."
키리아의 침대 쪽에서 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잠이 깨버린 강한윤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이라도 꾼 건가. 아니면 환청을 들은 건가?
깨자마자 소리가 멎다니. 잘못 들은 거겠지.
다시 눈을 감은 강한윤이지만.
"윽...흑... 으윽..."
또 다시 키리아의 괴로운 신음소리에 눈이 떠져버렸다.
몸을 일으킨 강한윤은 키리아가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스륵 스륵 하고 이불에 뭔가가 비벼지는 소리가 난다.
키리아가 몸을 비틀며 이불에 다리를 비비고 있었다.
"하아... 하아... 흐윽... 윽...."
숨이 턱턱 막히는 신음소리에 강한윤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키리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깨지 않았다.
"윽... 흐으... 으윽..."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이 숨을 내쉴 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상태가 영 좋지 않다. 가슴이 답답한 지 잠옷을 풀어 헤치고 있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상태다.
풍만한 가슴골이 잠옷 사이로 보이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괴로워한다면 강한윤이 잠을 못자는 것도 당연했다.
'하아... 이건 좀 심각한데.'
악몽을 꾸고 뒤척일 수는 있지만 계속 이런 반응을 내보이는 키리아다.
몇 분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자 강한윤은 집을 뒤져서 몇 가지 물건을 챙겼다.
마른 수건을 물이 담긴 그릇에 살짝 담갔다 빼서 적당히 물기를 조절했다.
그 다음 키리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이렇게 땀을 흘려대는 데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다.
드러난 부분을 최대한 수건으로 처리하고 엉망이 된 이불을 정돈 했다.
병든 사람을 간호하듯이 키리아의 상태를 신경 쓰자 서서히 소리가 멎어들었다.
"으...으으..."
그럼에도 여전히 고통이 담긴 신음을 내뱉는 키리아.
강한윤은 그녀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다가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하면 편안하던데. 키리아의 배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듯이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깨어난다면 확실히 일이 터질만한 상황이지만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감기에 걸리거나 배탈이 났을 때 배를 쓰다듬어주었던 어머니의 손길.
그 기억을 떠올리며 키리아의 배를 쓰다듬었다.
"죄송해요...죄송..."
무슨 악몽을 꾸는지 몰라도 이런 소리를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하지만 효과가 있는지 그녀의 소리는 점점 멎어들었다.
"으으...으..."
강한윤은 키리아의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좀 괜찮아졌나. 땀에 젖은 키리아를 간호하다보니 오히려 땀을 흘린 강한윤이었다.
"으....음..."
서서히 신음이 잦아들고 키리아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새액. 새액. 소리와 함께 깊이 잠든 모습을 확인한 강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건도 그릇도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고 잠을 잘 생각이었다.
"하암..."
이게 첫날부터 무슨 짓인지. 아마 한두 시간은 매달린 것 같은데.
졸음이 몰려오는 강한윤은 쇼파에 털썩 누웠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의식이 가라앉았다.
*
"...으음"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난 키리아는 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엄청 가볍다. 얼마 만에 악몽 없이 잠을 잔걸까.
키리아는 자신의 잠옷을 내려다 본 뒤 가슴골까지 열려있는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의 분위기가 왠지 바뀐 느낌이었으니까.
확실히 어제의 기억과 다른 위치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이지만 움직인 카펫. 주방의 물건들. 닫혀있었지만 열려있는 찬장.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그녀의 시선은 슬며시 쇼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손님으로 찾아온 사내. 강한윤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키리아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다. 동부의 사람인 걸까. 그녀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다가가기 쉬운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어떻게 한 걸까.'
평소대로였다면 악몽을 꾸다가 괴로워하면서 일어났을 텐데.
그가 뭔가를 했기 때문에 악몽을 꾼 게 아닐까.
과거의 악몽을 꾸며 일어나는 일은 셀 수 없는 시간동안 똑같았다. 스스로 노력해도 바꿀 수 없던 것이다.
유일하게 달라진 건 손님으로 있는 강한윤 뿐이었다.
"음... 흐아아암..."
팔을 쭉 뻗으며 눈을 살며시 뜬 강한윤과 키리아는 눈을 마주쳤다.
"잘 잤나요? 잠이 좀 많은가 봐요?"
"...그러게요. 좀 피곤하네요. 바로 아침 준비할 건데 드실 건가요?"
"네. 먹을게요."
부스스한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한윤.
눈 밑의 다크서클과 어제보다 묘하게 피곤한 음색으로 보아하건대 확실하다.
그가 뭔가를 했다. 키리아는 그를 보며 확신했다.
그리고 키리아의 속마음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평범한 손님이라는 인상에서 특별한 손님으로. 강한윤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아침은 어제 먹은 저녁처럼 맛있을까. 자리에 앉은 키리아의 입고리가 묘하게 올라간다.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강한윤은 아침을 준비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망할 피곤해..'
키리아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까.
하품을 하며 아침을 준비하는 강한윤의 뒤에선 키리아가 턱을 괸 채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좋네.
키리아는 그런 감상을 가졌지만. 강한윤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근데.. 그 밖에 있는 마족은 대체 뭐죠?"
"아하.. 그거요..."
마족을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키리아가 떠올렸다.
"마법재료요? 마족은 마나가 많이 있어서 쓰기 좋거든요."
활기차게 대답한 키리아의 대답에 강한윤의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역시 키리아는 무서운 여자니까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요리에 집중했다.
*
키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일주일.
"하아.. 망할."
한숨을 내쉰 강한윤은 손에 들고 있는 옷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호감도를 올리겠다고 지금까지 안 한 짓이 없다.
식사 준비, 청소, 빨래, 목욕 준비, 목욕 준비를 위한 땔감 구하기 등등.
물론 지금 강한윤이 하고 있는 것은 빨래였다. 쪼그려 앉아서 손빨래를 하고 있으니 세탁기가 그리워지는 건 덤이었다.
'에휴.. 내가 참아야지.'
중동부의 지휘관이 된다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지금의 잡일에 불평불만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강한윤은 빨래를 하나씩 집어서 빨래 줄에 널었다. 그러다가 검은색의 커다란 브래지어가 손에 잡혔다.
확실히 크긴 크네 한 손으로도 잡히지 않을 크기다.
같이 붙어있다 보니까 그녀의 가슴이 큰 걸 의식할 수밖에 없다지만.
호감도 63 / 100
키리아의 호감도는 가슴을 드러내거나 보여줄 수치가 아니다. 그런 걸 기대하기엔 너무 낮은 수치다.
일주일의 노력.
그 덕에 그녀의 호감도는 63까지 올랐지만, 강한윤은 죽을 맛이었다.
키리아는 잘 때 마다 악몽을 꿨으니까. 매일 저녁마다 그녀가 자는 걸 간호한 만큼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머지 빨래를 전부 해치운 강한윤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흐아아..."
그 곳엔 망각의 안개를 담배처럼 흡입하고 있는 키리아가 있었다.
의자에 반쯤 주저앉은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안개를 한 모금 빨고 뱉어냈다.
"그거 어떤 느낌이에요."
일주일동안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 해볼까. 궁금증이 생겼지만 저 고농도의 안개를 흡입한다면 죽는 게 아닐까.
단숨에 상처를 치유하고 버틸 수 있는 마녀. 키리아만 가능하다는 걸 강한윤은 쉽게 알아챘다.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몸이 나른해져요.. 제가 없어진 것처럼... 한 번 하실래요?"
파이프를 건네는 키리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마약에 찌든 여성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마약 같은 효과잖아.'
라이라가 피우는 담배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마약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보며 키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으니까.
정리해보니 진짜 그냥 마약이네. 강한윤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장작이나 캐러 갈게요."
이렇게 대충 말해도 알아먹겠지.
강한윤은 도끼를 들고 가까운 벌목장으로 향했다.
실제로 벌목장은 아니고 장작을 캐기 좋은 장소로 물색해놓은 곳이었다.
나이가 오래된 나무가 많아서 마음껏 베기 좋다.
강한윤은 가볍게 도끼질을 시작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안개로 풍경이 보이질 않는 것만 빼면 다 좋네.
심심해서 일을 찾아서 하는 꼴이지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키리아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땀을 흘리며 나무를 베던 강한윤의 뒤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스륵
망각의 숲에서 뭔가 있을 리가 없는데.
잘못 들어와서 목숨을 잃은 동물이거나 아니면 다른 녀석이겠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강한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고라니가 있었다.
아니 이 녀석은 망각의 안개에 내성인 거야 뭐야.
저번에 봤던 녀석이랑 똑같은 녀석인 것 같은데.
무늬가 저번의 녀석과 똑같나? 기억이 애매하다.
똑같은 녀석이라는 보장도 없고 길을 잃고 들어온 고라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헛되이 목숨을 잃지 않게 바깥으로 내쫓자. 남은 힘을 다해서 달린다면 안개가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강한윤이 고라니에게 다가가자 그 녀석의 밑에 다른 게 보였다.
작은 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중동부의 지휘관 후보로 나온 기사. 게리스가 여기에 쓰러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