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138화
* * *
"아.. 저게 신경 쓰이나 봐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길래 죽였어요."
길가의 돌멩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무덤덤하다.
이렇게 말하니 무서운데.
안 그래도 싸했던 분위기가 눈이 내릴 것처럼 싸해졌다.
"아차... 너무 긴장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서 조금 그랬죠?"
강한윤의 미묘한 표정을 읽은 마녀. 키리아가 황급히 수습하려 이야기 했다.
이런 민감한 얘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니! 저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준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래서 그랬어요."
"아... 그래서..."
저렇게 곤죽을 만들어 놨구나.
그래도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해놨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윤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마녀 키리아는 괜히 마녀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강하고 자비가 없다. 얘기가 통하지 않아서 협상할 수 없다면, 저렇게 마족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
그래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강한윤은 그녀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이라기보다는 팬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널찍한 거실에 복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는 침실이고 아래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마법 연구 같은 걸 하나보다.
진열대에 플라스크가 가득 진열되어 있다.
보라색과 검은색으로 불길한 액체들부터 빨강 연두 파랑. 이상한 색의 액체들도 보였다.
구석에는 대형가습기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게 망각의 안개를 만드는 도구였다.
진짜 아무리 봐도 가습기인데.
"일단 앉으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쇼파에 앉으면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분위기다.
손님으로서 대접해줄 생각도 다분해 보이고 쇼파도 푹신하다.
여기에 누우면 낮잠 두 시간은 그냥 자버릴 것 같네.
강한윤은 편하게 등을 기댄 채로 키리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를 끓이는 평범하게 예쁜 여성의 모습이다.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 남성을 홀리고 큰 가슴이 포옹력이 넘칠 것 같지만, 정작 아이러니하게 마녀라 불린다니.
"자 여기요."
"감사합니다."
키리아가 찻잔을 건넨다. 향긋한 냄새에 강한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
"둥굴레차에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를 추가 했어요. 어때요 맛은?"
지금 당장 맛을 보고 평가를 내려달라는 것처럼 키리아가 빤히 쳐다본다.
조금 부담스러운데. 강한윤은 차를 후후 분 뒤에 한 모금 마셨다.
달다. 첫맛은 달고 끝 맛은 풍미가 가득하다. 좋은 향이 입과 코에 맴돌았다.
"맛있네요."
솔직하고 담백한 평가.
이것보다 더 좋게 평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키리아는 흐뭇함을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에요. 하아. 이걸 마시면 몸이 풀려요... 그래서"
말을 하다가말고 키리아는 차를 한잔 마셨다.
후아. 하는 작은 한숨소리가 은근 야하게만 들린다.
"그쪽도 뭔가를 바라서 왔겠죠? 그냥 왔을 리는 없으니까요. 뭘 원하죠?"
뭐든지 말해도 들어주겠다는 듯이 그녀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는 타이밍이다. 강한윤은 입을 열었다.
"안개를 없애길 원합니다."
"흐음... 왜요?"
"안개가 점점 퍼져나가면서 피해를 입히고 있으니까요."
안개가 퍼져나간다는 건 좋지 않았다.
특히 일반인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게 망각의 안개인 만큼, 안개가 닿는 지역은 전부 사용할 수 없다.
중부의 넓은 지역이 안개에 먹혀서 사용할 수 없는 구역.
혹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된 지 오래였다.
'거의 방사능 오염지대나 다름없지.'
심지어 방사능은 정화라도 할 수 있지, 이놈의 안개는 중화하는 게 전부다.
그런다고 범위가 좁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없앨 수 있죠. 안개는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키리아가 손짓하자 구석에서 가습기처럼 안개를 만들던 장치가 작동을 멈췄다.
이렇게 손쉽게 작동을 멈출 수 있구나.
그녀가 또 손짓하자 다시 안개를 내뿜기 시작한다.
"어때요?"
자신이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키리아는 강한윤에게 턱짓했다.
"안개를 없애는 대신 손님 분은 뭘 해줄 수 있나요?"
"그건..."
강한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들어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참! 제가 뭘 원하는 지 말을 안했었네요. 죄송해요."
키리아가 손을 뻗자 강한윤의 허리춤에 있던 단검이 뽑혀져 나왔다.
단검을 가볍게 받은 그녀는 그대로 주저 없이 팔을 찔렀다.
윽.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찌푸렸다. 꽤나 아파보이는 모습이다.
칼에 찔린 팔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다량의 출혈. 이대로라면 과다출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그녀가 서서히 칼을 뽑자 상처가 재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칼을 전부 뽑아냈을 땐 원래부터 다치지 않은 것처럼 새하얗고 뽀송뽀송한 팔로 돌아와 있었다.
"제 몸은 이런 상황이에요. 어릴 때 마녀가 저에게 저주를 옮겼죠. 죽지 못하는 저주. 그 덕에 오래 살고 있긴 하지만... 별로 좋진 않네요."
죽지 않기에 축복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거기에 저주의 영향인지 몰라도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와야 했다.
즐거운 기억도. 슬픈 기억도. 지금 당장 떠올린다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또렷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처럼 죽는 방법이 있긴 하다. 다른 이에게 저주를 옮기는 것.
그 방법으로 평범한 사람의 삶을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키리아는 이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모든 걸 기억하면서 오래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죠. 그래서 이 안개를 만들었어요."
이것조차도 없었다면 미쳐버렸을 게 분명하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이 숲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만.
그녀 본인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말 이기적인 방법이네. 키리아는 씁쓸한 웃음을 내보였다.
"최대한 괴로운 생각을 줄이기 위한 처방전인 거예요.
안개가 퍼져나갔을 때 남들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아도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고 할까요."
안 좋은 기억을 새기지 않아도 되니까. 남들과의 접촉은 없는 게 좋았다.
키리아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어느새 찻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또 다시 차를 끓였다.
"죽음 외에는 바라는 게 없습니까?"
"글쎄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평생 동안 저주를 풀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니까요."
저주를 풀기위해 매달린 지난날들은 그랬다..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하고, 생체 실험을 당하기도 하고, 빈민가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저주에 관한 정보는 많이 얻어냈지만, 결국엔 해답을 찾지 못했다.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풀기 위한 여행. 그녀의 삶은 그러했다.
"아. 이제 시간이 다 됐겠네요."
키리아는 끓이던 차를 내버려두고, 플라스크 병을 하나 집었다.
완전히 담흑색의 빛을 띄고 있는 플라스크.
누가 봐도 불길함 그 자체다.
하지만 그녀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흐윽.."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진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죽은 건가? 여기서 죽는다면 일이 쉽게 풀릴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한윤은 그녀의 정보를 열었다.
[Hp : 1]
아. 역시나. 속으로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게임에서도 그녀를 죽이는 방법이라고는 존재하질 않는다.
체력이 1에서 떨어지질 않고 죽이려고 노력해도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
마나를 봉인하고 재생 효율을 떨어뜨리는 저주를 걸고 마나가 없는 곳에서 죽여도 부활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저주가 키리아. 그녀에게 걸려있었다.
"후아.. 또 실패했네요."
그녀는 무덤덤하게 일어나서 안개 생성기로 다가갔다.
안개 생성기에 이어져 있는 작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후우.."
무슨 물 담배 피우는 거냐고.
안개를 잔뜩 들이마신 뒤에 내뱉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내뱉은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쇼파에 다시 앉았다.
"하아... 조금 살 것 같네요."
이거 완전 마약 중독자인데?
저 안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망각 중독자.
그게 망각의 숲에 살고 있는 마녀. 키리아의 실체다.
"저를 죽여줄 수 있나요?"
"그건 힘들겠는데요. 저도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런가요."
키리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뒤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돌아 가주세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하얀색 사탕을 올려놓았다. 방금 전에 먹었던 안개 사탕이었다.
"이걸 먹는다면 무난하게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완전히 나가달라는 분위기다.
이걸 받고 돌아간다면 목숨의 위협은 없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강한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뇨. 안개를 없애기 전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런가요. 저를 죽일 수도 없고 안개를 없앨 생각이군요."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뒤 마나를 피어 올렸다.
"그럼 손님 분을 죽일 수밖에 없네요."
"아뇨! 잠깐! 잠시 만요."
이렇게 깔끔하게 죽이려고 한다고? 당황한 강한윤이 손짓을 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죽진 못해도 안개가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방법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강한윤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망할. 게임이었다면 설득시도라는 창이 뜨고 능력치로 찍어 누를 수 있을 텐데.
설득 성공! 짜잔 하면서 그녀의 의견을 굽힐 수 있다.
게임대로라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여행을 다닌다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진짜로 가능할까? 강한윤은 게임의 대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안개가 없는 바깥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제는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도"
"아뇨. 나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안개를 거둘 생각도 전혀 없고요."
망할 전혀 통하질 않는다. 이대로라면 뜻을 굽히고 돌아 가야하나 싶던 그때, 키리아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안개에 너무 의존하는 건 나쁠 지도 모르겠네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죠? 한 번 해보세요. 말리지 않을 테니까요."
이 정도면 긍정적인 대답인가.
쫓겨나는 대신에 마녀의집에 머무를 기회가 생겼다는 점은 나쁘지 않은 듯하다.
죽일 수 없는 키리아를 죽이는 것보단 안개에 의존하지 않게 만드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
"물론 조건이 있어요. 제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바로 쫓아낼 거예요."
그녀의 말이 어떤 의도인지 알아챈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기억들을 없애기 위해서 안개를 만들어낸 거니까 말이다. 굳이 나쁜 기억을 또 만들 필요가 없다.
'여기까지 온 건 좋은데.'
망각의 안개 의존도를 어떻게 낮추지.
나쁜 기억을 없애려면 수없이 많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씌우는 게 제일인가?
그렇다면 일단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갈피가 잡힌다.
그녀의 호감도를 올린다.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럼 제가 저녁식사를 준비해도 될까요?"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일단 배부터 채우는 게 좋겠지.
강한윤은 음식 솜씨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요리를 잘 하는 건가요?"
"어느 정도는 합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남이 해주는 음식을 얼마 만에 먹는 걸까. 키리아는 주방으로 향하는 강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오두막 안에 좋은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냄새로 보아서는 맛있을 지도.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있었고.
'시발 여기까지 와서 요리를 한다니.'
강한윤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요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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