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34화
* * *
에키르의 말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투표로 이미 결정된 사항을 번복할 수도 있는 이야기니까.
모두가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일 때, 에키르가 강한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강한윤 소령. 자신을 증명하면 된다는 말이 싫은 건가? 아니면 두려운 건가."
에키르의 말에 힘을 입은 것 같은 기사 게리스가 가슴을 크게 편다.
이 사람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투표는 이쪽에 해놓고 갑자기 중부의 편을 든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강한윤은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할 만한 이야기지 않은가. 그만한 자리에 오르려면 능력이 있어야한다. 그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지휘관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그의 말은 맞았다. 강한윤이 평상시에 생각하고 있는 견해와 일치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여기에서 투표를 번복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뜻을 굽혀서 그의 말을 들어야 하나.
머릿속으로 수많은 고민이 오간 뒤 강한윤은 입을 열었다.
"저를 시험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능력이 없는 낙하산과는 같이 싸울 수 없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중동부의 후보 기사 게리스."
"예. 맞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건 재앙이나 다름없죠."
기회가 주어질까봐 낼름 대답하는 게리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여준 행보로는 능력이 있다는 게 확실하지 않나. 그렇다면 증명하면 되지 않은가. 다른 지휘관들의 생각은 어떻지?"
에키르는 화살을 다른 이들에게 돌렸다.
"크흠..."
서부의 지휘관 아르기르는 헛기침을 해댔다.
투표까지는 얘기가 된 상태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아르기르는 바르바고프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어떻게 말해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기르는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북부의 지휘관 에우제니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애매한 문제는 다른 이한테 돌리기. 적당한 수였다.
"지휘관의 능력이 있는 지 확인해야 한다고? 굳이?"
에우제니아는 흠 하고 작게 소리를 낸 뒤에 강한윤을 쳐다보았다.
능력이 좋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저기 있는 게리스라는 녀석도 만만치 않게 능력이 좋지만, 지휘관이라는 자리에서는 강휸이 월등이 잘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근데 저 새끼 표정이 좀 열 받네.'
게리스라는 녀석의 표정이 참 띠껍다. 어떻게 처리할 수 없나? 에우제니아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강한윤.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저 새끼가 원하는 대로 그냥 다 해주고 콧대를 꺾어버려."
어차피 강한윤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에우제니아는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뭐로 증명할 건데? 싸움은 안 될 거 아냐. 강한윤이 저 새끼랑 맞붙으면 주먹한 방에 머리통이 깨져버릴 걸?"
하지만 싸움은 아니다. 강한윤에게 싸움을 붙인다면 분명 쪽도 못써보고 죽을 테니까.
"증명할 방법은 이미 생각해 놨다. 망각의 숲. 그곳에는 망각의 안개라고 불리는 안개가 펼쳐져있지.
그 안개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
곧 있으면 중동부에도 닿을 정도의 크기가 된다더군.
이 현상을 처리하는 자라면 지휘관이 될 자격은 있지 않은가."
주변을 슥 둘러본 에키르가 말을 이었다.
"물론 첫 번째 도전 기회는 강한윤 소령이 가져가겠지. 어떠한가?"
"어때?"
얘기를 전부 들은 에우제니아가 조용히 물어보았다.
뭘 어떻긴 어때. 먼저 도전해서 먼저 뒤지면 위험한 건데. 강한윤은 툴툴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참았다.
'그래도 공략방법은 없는 건 아니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 굳이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결국엔 제가 지휘관이 될 테니까요."
그까짓 실력 발휘쯤이야 해주면 그만 아니겠냐고. 강한윤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
능력을 증명하는 것. 거기에 또 다른 조건이 붙어버렸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일을 해결해야할 것.
파티를 짜서 캐리를 받는 다거나, 일처리를 쉽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된다.
하아 좀 귀찮게 됐네. 강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안개를 처리하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 움직인다면 엄청 피곤할 텐데.
회의가 끝난 강한윤은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의로 인해서 지휘관이 될 기회를 얻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
에키르는 왜 중부의 편을 들었을까.
중부, 중동부, 서부의 인물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고 회의실에는 에키르가 남아있었다.
"에키르님. 왜 중부의 편을 드신 겁니까. 그냥 투표로 결정된 사안이라고 밀어붙여도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좀 답답한 결과다. 결국에는 어차피 지휘관의 자리를 얻을 텐데. 가까운 길을 빙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기어오르는 녀석들의 싹을 밟아놔야 하는 게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에키르는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저쪽이 수를 쓴 건 맞지만, 이쪽도 수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반감을 가질 확률도 높지."
사실이지 않은가? 그는 짧게 덧붙였다.
"우리는 저런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안고 전쟁을 계속해야 하지. 그렇다면 미리 밟아두는 게 맞지 않나."
"그래서 말이 나오지 않도록 기회를 주는 척 했던 겁니까?"
에키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약간의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의 뒤에 서있던 엘프 기사가 아공간에서 종이를 꺼냈다.
기사는 종이를 강한윤에게 건넨 뒤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음... 이건...'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니 망각의 숲에 대한 정보다.
생각보다 많고 자세하다. 망각의 숲에 대해서 꽤나 오래 조사했는지, 적혀있는 정보가 세세했다.
망각의 숲의 안개가 마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마녀와 접촉했나본데.'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들어주지 못했는지, 공략법이 완벽하게 적혀있진 않았다.
"그래서 이 마녀를 제가 만나서 처리하면 됩니까?"
"그렇지. 그 정보를 가지고 열심히 해줄 거라고 믿네. 자네의 능력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글쎄요."
마녀의 집까지 가는 길을 완벽하게 뚫을 수 있을까.
그것부터가 문제인데 너무 신뢰하고 있어서 부담스럽다.
"해보긴 해야죠. 이기면 중동부를 제가 가지는 거 아닙니까."
일단 답한 강한윤에게 에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중동부의 지휘관 정도가 된다면... 에리엘과의 교제에 대해선 더 이상 건들지 않겠네."
"그런 조건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에리엘과의 관계를 인정받는 거니까. 강한윤은 어쩔 수 없이 일을 받아들였다.
"아무튼 이번 일이 끝나면 헤티미아로 둘 다 오도록. 따로 얘기할 것도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에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에키르와의 대화가 끝났다.
'근데 생각보다 망각의 숲 공략법이 많은 건가.'
아니면 기능상으로 구현되지 않는 방법을 찾은 것뿐일까.
종이에 적힌 안개 공략법이 가장 눈에 띄었다.
기억을 잊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자아까지 잡아먹는 안개.
그 안개를 받아치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억을 잊은 만큼 기억을 만들어라.
강렬한 기억을 새겨서 계속 상기하고 떠올려라. 그렇다면 안개의 효과가 줄어든다.
강렬한 기억을 위한 매개체가 있다면 더욱 좋은 방법이다.
강렬한 기억? 이걸 어떻게 만들라는 거지.
이것부터가 고비라는 느낌이 강하다.
"일단 숙소로 돌아갈까."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 어차피 돌아가기엔 시간도 애매하잖아."
뤼네아로 향하다보면 어두컴컴해져서 길을 헷갈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회의실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엘!!!"
"윽... 흑령..."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에리엘은 침음을 흘렸다.
검은색 귀와 꼬리를 가진 흑령이 에리엘에게 달라붙었다.
"에리엘..!! 엄청 보고 싶었는데 왜 연락 안했어? 응?"
머리와 볼을 에리엘에게 쉴 새 없이 비비는 흑령.
그녀는 에리엘의 옷에 얼굴을 파묻은 뒤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힐링이 되는 기분이야... 에리엘."
"그만 떨어졌으면 좋겠군. 흑령."
"내가 싫어진 거야 에리엘?"
"그런 제멋대로인 점이 싫은 거다."
흑령은 붙고 에리엘은 떨어지려고 노력한다.
이 사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흑령도 어지간히 고집이 쎈 영웅으로 유명하니 말이다.
고양이 귀와 꼬리가 움직이는 건 귀엽긴 한데. 굳이 관여하고 싶진 않다.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에리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우린 먼저 가 있을 게."
"읏... 알겠다."
달라붙어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떼어내지 못한 에리엘은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강렬한 기억이라.."
"음.. 잡생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그냥 좆같은 기억을 떠올리면 되는 거 아냐?"
망각의 숲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니, 에리엘과 에우제니아가 의견을 제시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좋지만, 여기에 적혀있는 매개체가 거슬린다.
매개체가 없으면 기억을 떠올려야한다는 사실조차 까먹을 수도 있는 건가.
좆같은 기억은 떠올리기 싫으니 역효과가 아닐까.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계속 고민을 해봤지만 또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기억을 새겨놔야하지.
예시가 단 하나도 적혀있지 않으니 어떤 것을 사용해야할 지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침대에 대자로 누운 강한윤은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뭔가를 알았다는 듯 에리엘이 반응했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후후. 에우제니아와 함께 외출을 다녀와도 되겠는가?"
"다녀와 그동안 난 좀 쉬어야겠다."
몸이 피곤하다.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강한윤은 에리엘과 에우제니아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돌아오면 깨우겠지.
톡 톡
누군가 볼을 손가락으로 만진다. 약간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도 느껴졌다.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이 뭐로 가려져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대체 뭐지.
주변에서 느껴지는 달달한 향으로 보아선 에리엘과 에우제니아. 그녀들이 맞다.
"에리엘? 에우제니아?"
"자고 있길래 장난을 좀 쳐봤다. 후후. 엄청 귀여운 얼굴로 자고 있더군."
"야. 우리를 내버려두고 잠을 자?"
보이질 않지만 에우제니아가 바지 위를 살살 어루만지는 건 확실하게 느껴진다.
약간 거칠지만 기분 좋게 어루만질 생각이 가득하다.
"망각의 숲에 들어가기 위해선 강렬한 기억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리고 도움이 되는 매개체까지 말이야."
"그런 게 필요하다고는 하니까 대비하는 거지."
망각의 숲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의 준비를 할 뿐이다.
에리엘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강렬한 기억이 필요하다면 오늘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앞에 보이는 것은 에리엘과 에우제니아다. 옆으로 누워서 달라 붙어있었다.
"고양이 귀..?"
머리에는 고양이 귀를 착용하고 옷도 하트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속옷을 입었다.
엉덩이 부근에는 고양이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마법적 처리를 해놓은 걸까.
"강렬한 기억을 만들러 왔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에리엘이 옆에서 그렇게 속삭이고.
"야, 야옹..."
에우제니아가 수줍게 야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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