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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36화 (136/163)

〈 136화 〉 133화

* * *

헤이네라스로 향하는 당일 날 아침.

강한윤과 에리엘. 단 둘이 마차를 기다리기 위해 바깥에 나와 있었다.

지휘관인 에우제니아를 호위할 인물로 에리엘이 제격이었고 강한윤은 북부의 인간 대표로 나가기 위함이었다.

에우제니아의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에리엘.

그녀는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호위라니. 굳이 필요한 건가? 그녀의 강함을 알지 않은가."

지휘관이라는 위치를 견고하게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강함.

에우제니아가 얼마나 강한지 아는 그녀이기에 지은 헛웃음이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호위도 없이 등장한 지휘관을 상상해봐. 모양새 빠질 걸?"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에우제니아를 생각하니 멋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무를 수도 없지 뭐. 강한윤은 가볍게 생각했다.

"아니면 사적인 욕심 때문에 나를 호위에 넣은 건가? 강한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눈빛에는 약간의 즐거움과 요염함이 맺혀있었다.

남성에게 음심을 불러일으키는 암컷의 도발적인 표정이다. 강한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사적인 욕심이라. 저렇게 얘기하니 오히려 생기는 것 같다.

에우제니아와 에리엘이 같이 있다면 나쁘지 않겠네.

강한윤은 일부러 차분한 척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런 의미도 있긴 한데... 싫어? 뭐, 빠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어. 말리진 않을게."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한 번 장난쳤다고 짓궂게 나오는 군. 너무한 거 아닌가?"

에리엘은 살며시 강한윤에게 달라붙었다. 옷깃 너머로 들어난 목덜미에 짧게 입술을 부딪쳤다.

쪽. 소리가 나는 간단한 뽀뽀다.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아니다. 내가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살짝 기대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번 여정엔 단 둘만의 시간이 조금 있을 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다."

에리엘은 슬며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정말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지 않은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욕심을 가지게 되기 마련인데.

요새는 그런 욕심을 채울 기회가 없었다.

많은 여인들과 경쟁을 해야 쟁취할 수 있는 게 단 둘만의 시간이다.

노아가 가진 하룻밤 독점권이 부러웠던 에리엘은 드디어 그것에 준할 정도의 기회를 얻었다.

"그럼 나도 기대해도 되는 건가?"

생각보다 훨씬 기대하고 있나보네. 그녀의 반응을 본 강한윤은 히죽 웃었다.

"알아서 생각해도 좋다."

"그래. 알았어. 기대할게?"

강한윤은 에리엘의 엉덩이를 은근슬쩍 주물렀다.

"읏.."

에리엘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달콤한 교성읻.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네. 강한윤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해서 만졌다.

그렇게 에리엘을 괴롭히는 것도 잠시.

그들의 앞에 마차 하나가 다가와서 속도를 줄였다.

연합군의 표시가 그려져 있는 마차는 4인 정도가 탑승할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게 작은 크기에 비해서 말들의 상태가 월등히 좋다.

푸르르 마차를 끄는 말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이 콧김을 거세게 내뿜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리고 싶어서 날뛰는 녀석 같네.

강한윤의 감상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하아.. 망할... 일단 타서 움직이자."

마차 안에는 연둣빛 머리칼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에우제니아. 그녀는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비어있는 자리에 대충 손짓했다.

"피곤해? 엄청 피곤해보이는데."

척 보기에도 피곤해 보였다. 눈빛은 힘이 없고 다크서클도 내려와 있다.

옆자리에 앉으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누웠다.

"하아.. 편안하다."

에우제니아가 좋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자, 크흠 하고 에리엘이 작게 기침을 내뱉었다.

에우제니아에게 눈치를 주려는 건 아니고 약간의 부러움이 서린 눈이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러는데."

"망할 서류작업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지. 이번에 먹은 지역만 몇 개야. 그걸 전부 내가 처리했으니까."

강한윤은 속으로 동의했다. 하긴 지역이 적진 않았지.

"밑에 간부들 시키면 되잖아."

"그렇게 해서 이 정도라는 게 말이 안 된다니까. 됐어. 일단 좀 잘래. 도착하면 깨워."

에우제니아는 서류작업에 취약하다. 서류를 읽고 있으면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크흠.."

에우제니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헛기침을 하며 뭔가를 원하는 눈빛이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라도 잡고 있을까. 하듯이 말이다. 에리엘은 웃으며 손을 잡아왔다.

'이대로라면 잠자는 건 글러먹었네.'

에우제니아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하고, 호위하는 에리엘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

눈을 잠시 붙이는 건 불가능하겠지.

헤이네라스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그 정도만 버티는 건 충분히 쉬운 일이니까 다행인가.

하아. 강한윤은 작게 한숨을 쉰 뒤에 마차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

헤이네라스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보다는 짧았다.

'거의 2시간이긴 한데.'

뭐 상관없다. 도착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으으응! 아. 낮잠 자고 일어나니까 개운하네."

이제 곧 내릴 타이밍이 되자 에우제니아는 기분 좋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다.

발을 쭉 뻗으며 피로를 해소한 그녀는 강한윤에게 달라붙었다.

"강한윤. 이리와."

아. 키스를 하고 싶은 눈이다.

바로 알아챈 강한윤은 눈을 살며시 감고 그녀에게 입술을 내밀었다.

쪽. 쪽. 쪽. 세 번의 짧은 입맞춤.

그녀 특유의 달콤한 체취가 코끝에 맴돌았다.

"나머지는 오늘 회의가 끝나고 난 뒤에 하자."

"당연히 그래야지."

"밝히긴."

에우제니아의 대답에 강한윤이 웃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텐데.

에우제니아가 마차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를 따라 나가기 위해 계단으로 발을 뻗었는데.

텁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잡아왔다.

에리엘이다. 그녀가 손목을 붙잡은 채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리엘도 키스를 원하는 눈이네.

이쪽과도 키스를 마친 뒤에야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건 뭐 키스 검열관이냐고. 물론 두 명의 달달한 향기가 남아서 나쁘진 않았다.

"북부의 사령관 에우제니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깥에선 엘프들이 고개를 숙이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인간 기사들도 호위라고 나온 건지. 표정이 엄숙하다.

그들을 따라서 회의가 열리는 건물로 이동했다.

귀족들이 연회를 열 것 같이 생긴 호화롭고 아름다운 건물.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에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서있었다.

왼쪽에는 맞춰서 연합군의 병사들이 서있다.

저렇게 서있으면 분위기가 서먹하지 않을까. 강한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끼익 하고 회의실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에우제니아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에우제니아...!"

그러자 안쪽에서 누군가가 으르렁거리듯이 소리쳤다.

"여. 카이보옌. 오랜만에 보네? 크흐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에우제니아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저번에 맞은 곳은 잘 치료했고? 그러게 왜 깝치래. 북부의 일에 간섭하면 큰 코 다친다니까?"

그냥 때릴 만해서 때린 건가.

에우제니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서 이동하고서야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

누가 왔나 궁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부의 사령관. 엘프 에키르.

조금 껄끄러운 상대인데. 에리엘의 아버지인 그의 시선이 이쪽에 닿아있었다.

호의가 가득 담긴 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대가 가득하진 않다.

그냥 이쪽을 살펴보는 건가. 강한윤은 시선을 돌렸다.

서부의 사령관. 드워프 아르기르.

그는 수염을 빗으로 정돈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바르바고프가 서있다.

말한대로 바르바고프가 와줬나 보네. 일은 거의 다 풀린 거나 다름없다.

분명히 투표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겠지.

바르바고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쭉 폈다.

미안하지만 중동부의 사령관 자리는 내가 먹어야겠는데? 강한윤은 속으로 웃었다.

"윽.."

자신만만한 강한윤의 옆에는 신음을 흘리는 에리엘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강한윤은 에리엘의 시선을 따라서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흑령이 있었다.

카이보옌의 호위로 온 건가. 아니면 에리엘이 여기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온 걸까.

모르겠지만 그녀의 모든 관심이 에리엘에게 쏠려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중동부에는...'

헤이네라스의 영주가 앉아있고, 그의 뒤로 강인한 기사가 서있었다.

저 녀석을 후보로 내세울 생각인가?

느끼하게 생긴 얼굴을 보니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영웅. 기사 게리스. 좋은 영웅 중 하나였다.

능력도 좋고 성장 기대치가 높아서 후반에도 활용하기 좋다.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 중상급이라는 미친 스펙은 사기적이었다.

실력 좋고, 스펙 좋고, 배신안하고, 정치질과 모략을 사용할 줄 알고 전략 전투 센스도 준수하다.

이거 완전 작정하고 뽑아 왔네. 그렇게 강한윤이 주변을 전부 둘러보자 엘프 한명이 회의실 중앙으로 이동했다.

"자. 모두 모였으니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후보자들의 자료를 나누어드리겠습니다. 내용을 읽을 시간을 드린다음 투표하겠습니다."

에우제니아의 앞에 종이가 주어졌다.

뒤에서 같이 쳐다보니 생각보다 양이 적다.

남부, 서부, 중부는 후보를 제출하지 않았고 중동부와 북부만 후보를 제출한 상황.

북부 ­ 강한윤 소령

중동부 ­ 기사 게리스

단 둘 밖에 없다. 이거 뭐 반장 선거인가.

반장 선거도 이것보다는 후보가 많을 텐데.

아니 어떻게 보면 닮아있다. 반장 선거도 결국에는 콜팝치킨이나 햄버거를 돌리는 녀석에게 유리한 법이니까.

스펙이고 자시고 그딴 건 상관없는 상황이 딱 어울렸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 저쪽이 뽑혀야 맞으려나.'

저쪽의 게리스도 만만치 않은 공적을 세우고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이쪽은 전략 전투 말고는 아무런 능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적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인 법.

'솔직히 나였어도 게리스를 뽑긴 했지.'

강한윤은 속으로 인정했다. 저렇게 사기인 녀석을 안 뽑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모두 투표해주시길 바랍니다."

후보들의 정보가 적힌 안내 책자를 읽은 지휘관들이 종이에 이름을 적는다.

다가온 엘프가 들고 있는 박스 안으로 종이를 던져 넣었다.

총 다섯 장의 종이가 모이고 엘프는 종이를 하나씩 폈다.

"강한윤 소령 한 표."

게리스를 안 뽑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기사 게리스 한 표."

모든 상황에 만능인 사기캐랑 특수 상황에만 사용할 수 있는 사기캐.

"강한윤 소령 한 표."

굳이 비교하자면 무조건 만능 쪽을 고르지.

"기사 게리스 한 표."

그렇게 모든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사기캐가 있지만.

"강한윤 소령 한 표."

투표의 결과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강한윤 소령 한 표."

이쪽은 커넥션이 이어진 적폐세력이니까.

불 보듯이 뻔한 결과다. 남부, 북부 확정인 상황에 서부까지 꼬드겼으니까.

이번에 마족을 처리한 사실을 강력하게 어필해달라는 부탁은 넘길 수 없었겠지.

서부의 지휘관 아르기르도 양심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쪽의 승리네 강한윤은 당당하게 웃었다.

"결과는 강한윤 소령 3표. 기사 게리스 2표로. 강한윤 소령이 중동부 지휘관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엘프는 무척이나 사무적인 말투로 결과를 읊었다.

투표가 끝나버린 상황. 그때 기사 게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런 결과라니... 인정할 수 없다...!

이미 투표는 끝났고 모두 이 사실에 동의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자라면 능력의 증명이 필요한 것 아닌가!"

치졸한 수다. 투표를 찬성하지 못한 게리스가 말하지만 다른 이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지.

여기는 이미 지휘관을 확정하고 나온 상태니까.

어떻게 말해도 3:2 구도다.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아.

강한윤이 속으로 웃고 있을 때, 가만히 있던 에키르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지. 증명이 필요해 보이는 군."

'어..? 장인어른..?'

강한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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