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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34화 (134/163)

〈 134화 〉 131화

* * *

"언제 온 거야?"

"방금 막 도착한 참이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군."

에리엘의 목덜미에 땀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녀는 살며시 다가와서 강한윤의 몸 위로 올라탔다.

"강한윤. 그대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쪽. 강한윤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에리엘은 웃었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에리엘을 보니 강한윤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에리엘이 여기에 왔다고?'

에리엘이 여기에 있으면 하이델 산맥의 트라이든과 문제가 생기지 않나.

트라이든은 북부와 중부 양쪽에 걸쳐있을 정도로 큰 영지다.

그만큼 상대하는 게 중요한 곳인데. 에리엘이 여기에 왔다는 건 저쪽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얘기일까.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던 강한윤은 답을 찾지 못했다.

"북부는 전부 정리된 거야? 트라이든에서 항복을 한 건가?"

"그렇지. 바로 눈치를 채는 군. 요구한 사항이 까다롭긴 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였지."

"어떤 조건?"

에리엘은 트라이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영지관리는 자체적으로 하고 귀족 작위를 인정해달라더군. 그 외로도 세금과 통행료 문제나 포로 교환, 노예 해방 등등. 얘기할게 많았다."

"아하. 조금 까다롭긴 하네."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달라는 점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노예를 인정해달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오드웰 연합군에 노예 제도는 없으니 말이다.

'애초에 여러 종족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데 노예 제도는 말이 안 되지.'

종족끼리 부딪치는 걸 막기 위해서 노예제도는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라리 종족끼리의 갈등이 일어나는 편이 훨씬 낫다.

'포로로 잡혀온 세베라도 노예는 아니지.

그저 노예처럼 부려먹을 뿐이다. 형식적으로 노예는 존재할 수 없었다.

"노예를 인정해달라고 얘기한 건가?"

"그렇지. 노예제도를 없애는 걸로 결국엔 합의했다. 그렇다고 한들 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지는 모르겠다만."

에리엘은 그들의 삶을 보고 왔다.

노예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집, 돈, 여유. 그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한들 도움이 될까.

노예에서 벗어난다고 뭔가 달라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도적으로 도움을 주기위해 헨리크 공작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래? 혼자서 하기엔 힘들 것 같은데."

신경 쓸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잡음이 많이 나올 거다.

강한윤은 서류 더미에 깔려있는 헨리크 공작의 모습이 떠올렸다.

고생 좀 하겠네. 헨리크 공작. 강한윤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그가 전부 맡은 거다."

에리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100번 싸워서 1번 이긴 정도였지만,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겼다는 게 중요했다.

'얼마나 강해진 거지?'

강한윤은 그녀의 상태창을 열어보고 놀랐다. 스펙을 보아하니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에리엘 ­ 레벨 : 50]

­마나 : 1,657,127 / 1,657,127

이 정도면 밥만 먹고 수련만 한 수준이다.

헨리크 공작도 곧 있으면 따라잡지 않을까.

에우제니아를 이기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상태창을 보고 있는 강한윤에게 에리엘이 달라붙었다.

"나보다는 헨리크 공작이 더 도움이 되는 건가?"

원한다면 헨리크 공작을 대신 데려올 수 있는데. 에리엘은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니지 당연히. 여러모로."

근육질 덩어리 헨리크 공작보단 야한 몸매의 에리엘이 30배는 낫지.

강한윤은 에리엘의 엉덩이를 콱 잡았다.

"역시 그런 건가? 후후"

에리엘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사내는 이런 순간에 확실한 대답을 해준다.

딱히 유혹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몸이 달아올랐다.

"저녁에 하는 것으로 하지. 보는 눈도 있으니까."

에리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에우제니아가 해보라는 듯이 옆으로 누워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그것도 야외에서는 쪽팔리는 군. 에리엘은 강한윤의 손을 슬그머니 치웠다.

"그리고 어차피 내기가 아니었더라도 헨리크 공작대신 내가 왔을 거다.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무슨 일?"

그녀 혼자서 할 만한 일이 있나. 강한윤은 의문을 표했다.

에리엘은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조그만 돌처럼 생긴 것을 꺼냈다.

"이것 때문이지."

에리엘이 손바닥을 펴서 앞에 내보이자, 강한윤의 앞에 아이템의 정보가 떠올랐다.

"이건..."

강한윤도 잘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엘프만이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세계수의 씨앗이었으니까.

[세계수의 씨앗]

­땅에 심는다면 세계수가 자라난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세계수를 피워낼 수 있는 씨앗.

게임에서도 많이 다뤘던 기억이 있는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가 이걸 줬구나. 영토를 넓히라고."

그녀만 할 수 있다는 얘기를 이해했다.

세계수의 씨앗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엘프. 그들에게 주어지는 아이템이니까.

헨리크 공작이 대신 올 수 없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는 엘프가 아니니까.

"총 다섯 개의 씨앗을 받았다. 왜 이렇게 많이 챙겨줬는지 모르겠지만 심을 곳을 알아봐야겠지."

"일단은 여기에 하나 심을거지?"

"그래. 역시 잘 알고 있군."

뤼네아의 위치를 떠올린 에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위치인 데다가 씨앗도 남아돈다.

충분히 심을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일단 세 개를 심을 곳은 확정인가?'

강한윤은 세계수를 심을만한 위치를 떠올렸다.

타락한 땅을 정화하기 위해 심어야 한다.

서쪽과 동쪽. 두 군데에 심은 다음 천천히 정화해 나간다면 그쪽까지 사람들이 살 수 있을 거다.

'수용할 마족은 서큐버스 하나면 충분하지.'

다른 녀석들은 쓸모가 없다. 마수나 하급 마물들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에우제니아가 마족을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이 되고 위협이 안되는 녀석들에 한해서다.

'이번에 왔던 임프 모르. 그 녀석은 서큐버스에게 마기를 받으면 된다지만...'

남자들의 정기를 먹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서큐버스를 제외하고선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결국엔 연합군에 합류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족들도 한정되어 있다.

"지금 바로 심으러 갈까?"

이왕 얘기가 나온 겸에 세계수가 자라나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나쁘지 않다. 좋은 터가 있는 건가?"

"음... 일단 주변을 둘러보자."

강한윤은 미니맵을 켜서 가장 적당한 지역을 확인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세계수를 심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

그런 장소를 찾다가 결국엔 발견할 수 있었다.

"심을 만한 곳을 찾았어."

*

"확실히 여기가 좋긴 하겠군."

에리엘은 이 곳을 보자마자 세계수가 어울리는 곳이라는 걸 알아챘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였으니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숲의 나무를 전부 베어버린 상태였다.

자라고 있는 나무들은 성인의 허리 높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야말로 죽어가고 있는 숲.

땅에도 뭔가 마법이나 화학물품을 이용한 걸까.

흙이 아닌 모래로 땅이 뒤엎인 상태였다.

죽은 숲에는 동물과 식물이 자랄 수 없다.

이 땅을 살려내려면 세계수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다. 몇 년이 지난다면 여기는 정말 사막이 되겠지."

숲의 상태를 확인한 에리엘은 결정을 내렸다.

이만큼 망가진 땅이라면 세계수를 심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사막이 생겨난다면 점점 크기를 넓혀나갈 테니까. 그 전에 미리 막는 게 중요하다.

"이쯤 심는다면 모든 지역을 감쌀 수 있겠지."

주위를 둘러본 에리엘은 땅바닥을 발로 그어서 x자로 표시를 냈다.

이 곳이 숲의 정중앙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숲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엘프였으니까.

무릎을 꿇은 에리엘이 x자로 표시한 부분의 모래를 한 움큼 파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세계수의 씨앗을 바닥에 심은 뒤 모래로 덮었다.

"후우..."

에리엘은 세계수의 씨앗이 덮인 부분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앞으로 잘 자라달라고 부탁하듯이 말이다.

"강한윤. 도움이 필요하다. 이 곳에 손을 대라."

에리엘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강한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왜?"

그냥 심으면 자라는 거 아닌가. 게임에서는 그러던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보다.

강한윤은 에리엘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땅에 닿아있는 에리엘의 손위로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색의 마나가 피어올랐다.

"세계수도 자라려면 양분이 필요하다. 이렇게 마나를 흘려 넣고 그 다음에는 신성력이 필요하지."

"아하."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거구나. 강한윤도 그녀를 따라 마나와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바닥으로 신성력이 빨려 들어간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신성력을 흘려 넣어도 뭔가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거 맞아?"

"괜찮다.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

에리엘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겠지. 의심을 거둔 강한윤은 신성력을 계속 흘려 넣었다.

그렇게 신성력을 절반 넘게 사용하자 바닥에서 자그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됐다. 이제 손을 떼고 물러서면 된다."

"오..."

바닥에서 자그맣게 생겨난 새싹이 순식간에 나무줄기를 피워냈다.

나무줄기는 주변을 먹어치우며 점점 크기가 커진다.

성인 남성의 몸통만큼 커진 세계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크기를 키워나갔다.

다른 지역의 세계수의 절반 크기 쯤 되자, 바닥에서 자그마한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게 세계수인가.'

기적처럼 죽어가던 숲이 순식간에 되살아난다.

마치 시간을 뒤로 돌린 것 같네. 강한윤은 간단한 감상을 내뱉었다.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세계수가 자라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혹은 무슨 일이 터졌나 싶어서 다가온 뤼네아의 주민들이었다.

"이야... 진짜 신기하네."

이게 이렇게 금방 자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에우제니아도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렇게 세계수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랗게 자랐다.

***

동부의 시작지점인 펠리스.

그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진 세계수.

나무를 본 상인들과 주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나무 왜 이이리 크냐?

저거 밤나무 아녀?

아니 밤나무는 무슨 저 정도면 사과나무지.

아이고 이 사람들아. 연합군이 코 앞까지 닥쳤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좆됐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펠리스의 영주. 펠리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중부에서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만.'

그 약속을 믿고 중부에 많은 지원을 해줬다.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주진 않았지만 그들을 믿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으니까.

"하아..."

입을 싹 닦고 항복한 망할 놈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끝까지 싸우다가 점령당한 녀석들을 탓할 수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펠리칸은 바깥으로 나왔다.

"영주님."

"일단 밖으로 나가지."

그를 호위하는 기사를 한 명 대동하고 밤거리를 걸었다.

착잡하다. 착잡할 때 일수록 바깥을 산책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던 펠리칸이 도착한 곳은 어둑한 골목의 한 건물.

그곳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 오셨네요. 이히히.. 오늘도 즐겁게 노실 거죠?"

"당연히 그렇지. 메리."

펠리칸에게 달라붙은 메리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흐음...'

메리는 펠리칸의 몸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직 이 사람에겐 마족의 냄새가 나지 않네?

몰래 킁킁 냄새를 맡고 몸을 어루만져도 마족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며칠 전부터 그의 몸에 짙게 배어있는 자신의 냄새만 날 뿐이었다.

"일단 옷 벗으시구... 즐겁게 놀아볼까요?"

정보를 얻었으니 이제는 먹어치울 시간이네? 메리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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