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6화
*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멍하니 콜로세움의 중앙을 쳐다보았다.
억지로 끌려왔다고 하기엔 오크 병사는 상태가 좋아 보인다.
쇠 목줄이나 그런 걸 착용한 모습도 보이지 않기도 하고.
상태창을 살펴봐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싸움을 구경했다.
카앙! 파스스! 검이 부딪치며 오러가 바스라진다.
공격을 주고받을 때 마다 공중으로 푸른빛이 흩날렸다.
"가르간! 이겨라!!!!!"
"막스!!!!! 너한테 전 재산을 걸었다고!!!!!!!!!"
"가르간!! 저 오크 새끼를 때려 눕혀!!!!!!"
"막스!!! 이겨라!!!! 1.5배라고!!!!!!!"
반응이 격한 것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건전하게 이 결투를 즐기고 있었다.
뭐지 여기 인간 세력 아닌가? 그런 의문도 잠시.
라이라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서류를 건넸다.
어두컴컴한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아하니 딱 봐도 그녀의 길드원이다.
"읽어봐요."
"뭔데?"
라이라가 건넨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콜로세움의 탄생 과정
콜로세움의 탄생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게 무슨 내용이야 대체."
내용은 이러했다.
중부에서는 활발하게 전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성교단의 전선 이탈과 더불어 미묘한 교류가 흐르자 전투는 줄어들었다.
서로 싸우자니 마족이 눈에 밟혀서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었다.
마족이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모든 전투가 멈춘 이 순간에도 싸움을 원한 인간 세력 측의 병사 '마르타'가 연합군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그렇게 결투가 이루어지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됐다.
결투는 하나의 볼거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왕 싸운다면 콜로세움에서 싸우고, 시민들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으나 싸움을 원하는 자들의 욕구를 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콜로세움에서 결투는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점차 확산되어 뤼네아까지 퍼지게 되었다.
"..진짜냐고"
그냥 싸우고 싶어서 뤼네아까지 와서 싸우는 거라고?
전선과 맞닿아있는 헤이네라스를 넘어서 뤼네아까지 싸우러 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기서 싸우고 있는 막스라는 녀석. 탈영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해요. 휴가를 내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휴가까지 내서 왜 콜로세움에서 전투를 하는 건데.
전쟁의 양상을 바꿔놨더니 알아서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다.
뭐하는 녀석들이야 이거.
"중부 사령관 카이보옌은 부대 관리를 안 하는 거야? 아니면 싸움에 미쳐서 이런 것까지 허용한 거야?"
에우제니아가 중얼거렸다.
한편으로는 콜로세움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건전하게 싸우는 장소였으니까.
전쟁으로 수십 수백 명이 매일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아보였다.
"하... 이건 좀 따져야겠는데."
에우제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모리를 잡고 난 뒤에 얘기를 해봐야하지 않을까.
'이상한 일이 이거구나.'
레오리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양쪽이 전쟁을 멈추고 결투를 벌이는 것.
이게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구도는 아니었다.
'잘하면 전투를 멈추고 손을 잡을 수 있으려나.'
동맹, 종전은 불가능해도 휴전까지는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결투를 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강한윤은 결투를 지켜보았다.
콰직! 결국에는 가르간의 검이 부러진다.
"그오오오오오!!!!"
이긴 뒤에 포효하는 막스. 그리고 울고 웃는 도박꾼들.
그들을 뒤로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뭐라 할까요..."
"여기는 마족과 관련이 없어 보이네."
"그러게."
마족과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냥 깨끗하게 운영되는 결투장이 있을 뿐이다.
'여기도 이런데 헤이네라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얼마나 많은 결투가 벌어지고 있을 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헤이네라스의 영주. 거프란을 생각한다면 어울리긴 하다.
전투에 미친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중부의 사령관 카이보옌도 마찬가지고.'
이쪽도 전투에 미친놈이다. 잘 맞는 놈들끼리 싸우고 있었는데, 싸울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 오죽하겠지.
'오히려 좋은 건가?'
이렇게 결투로 친목들 다지다보면 휴전은 유지 될 테고, 종전 분위기가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분위기가 풀어지는 것을 상상하니 나쁘지 않았다.
영주들의 권리도 보장해준다면 거절하는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응 그럴까."
"괜찮은 것 같네요."
"저도 좋아요."
"그래 해보자고."
멍하니 결투를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지금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거든."
노아가 방금 나눴던 대화를 설명했다.
어차피 밖에 나가도 할 건 없고, 결투를 보는 것도 재미있으니 내기를 시작했단다.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독점하기로.
"...절대 질 수 없어요."
"누가 쉽게 져준대? 당연히 이겨야지."
"하룻밤 독점... 무조건..."
"...후우"
모두 달아오른 표정으로 결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배당은 청 1.71 vs 홍 1.81
이번엔 배당이 훨씬 쌔네.
앞으로 다섯 경기를 더 남았으니 그 안에 결판이 난다.
신중한 표정으로 선수의 정보를 확인하고 이길 생각이 가득했다.
'근데 내가 한다고 안 했는데.'
한 사람과 하룻밤을 보낸다고 동의한 적은 없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가만히 있어야지.
한편으로는 승리 욕을 불태우는 그녀들을 보고 있는 것도 재밌었다.
"으으... 이런 건 처음인데..."
배팅을 전혀 해본 적 없는지 고민만 하고 있는 세리스.
"음... 저쪽이 더 강하긴 한데... 일단 2골드만 해볼까."
색적으로 분석해서 확률을 높이는 노아.
"쟤가 이길 거 같은데? 이런 건 역시 올인이지"
자신의 느낌대로 선택하는 에우제니아.
"후우..."
담배를 피우며 선수의 데이터를 읽고 있는 라이라.
"...홍 코너..."
연필을 데구르르 굴려서 결정하는 마리아.
각자 자신의 방법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도 10골드로 배팅해볼까.'
선수들의 정보창을 띄우고 분석을 시작했다.
홍코너의 선수가 이길 확률은 대략 70% 정도다.
'이런 건 그날 컨디션이나 운이 좌우하기 마련이지.'
확률은 확률일 뿐이다. 나도 그녀들을 따라서 배팅을 시작했다.
"경기!!!! 시작 하겠습니다!!!!!!"
그렇게 결투가 시작되고.
"...다 잃었어요."
가장 먼저 돈을 잃은 사람은 세리스였다.
노는 것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 사치 향락과는 거리가 먼 성녀님이니 어쩔 수 없다.
"야!!!!!! 아이 씨! 거기서 왜 검을 놓치는데!!!!!"
그 다음으로 돈을 전부 잃은 에우제니아가 화를 냈다.
올인 메타로 2라운드를 딴 건 대단했지만, 역시 한 번 미끄러지니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남은 건 노아와 라이라, 마리아 뿐.
"...후우"
담배를 태우던 마리아가 자신의 종이를 태워버렸다. 다 꼴았나보다.
집문서까지 홀랑 다 태워버린 아저씨마냥 연속해서 담배를 피운다.
그녀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얼마 남았는데 그래?"
"...3골드 남았어요."
3골드로는 확실히 이길 수 없다.
노아와 마리아가 가진 골드는 최소 20골드 정도다.
남은 경기는 한 경기.
라이라가 전부 딴다고 한들 역전할 수 없었다.
"독점...독점... 하룻밤 같이... 하아.. 하아... 꼭 할 거야..."
흥분한 눈빛으로 연필을 데구르르 굴리는 마리아와 턱을 괸 채로 집중하는 노아만이 남았다.
마리아는 홍 코너의 선수를 선택했고, 노아는 청 코너의 선수를 선택했다.
둘 다 신중하게 배팅을 마치고 결투가 시작되었다.
"크아아아!!!!"
쓰러진 건 홍 코너의 선수.
마리아가 울상으로 종이를 구겼고, 노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왔다.
"독점! 독점! 강한윤 나랑 오랜만에 단 둘이서 보내는 거네? 후후..."
말에 하트가 잔뜩 붙어있다. 확실히 노아와 단 둘이 보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확인하기 전까지 모르는 법.
각자 가진 돈을 꺼냈다.
세리스 0골드
에우제니아 0골드
라이라 5골드
마리아 8골드
노아 27골드
'전락젹으로 머리를 썼네.'
상대가 돈을 잃는다면 최소한의 돈을 투자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리아는 피해를 줄인 것 같다.
"어..."
마지막으로 마로스 33골드.
"어... 제가 이겼나요?"
"아니... 잠깐...!! 마로스는 빼야지! 그렇잖아!"
".. 가장 많은 사람과 보내기로 했으니까 노아도 탈락인가?"
"가.. 강한윤.. 진짜야...?
노아가 울먹였다.
방금 전까지 기대하던 목소리는 온데 간데 없다.
"아하하..."
어쩌다보니 가장 많은 돈을 따게 된 마로스는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
물론 마로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이도 아니고 남자랑 시간을 왜 보내.
마찬가지로 마로스도 장난삼아서 배팅을 했을 뿐이라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마로스는 나중에 내가 좋은 무기를 챙겨주는 걸로 약속할 게."
"형. 고마워요."
그래도 이기긴 했는데 뭔가 챙겨는 줘야지.
마로스가 주먹을 부딪쳐왔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노아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방금 억울해서 울 뻔 했다니까?"
내기가 없던 일로 될 뻔했지만, 노아는 모두의 동의하에 하룻밤 이용권을 얻었다.
마로스는 처음부터 제외하고 얘기된 상태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벌써 기대되네?"
노아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하룻밤을 단 둘이서 같이 보낸 다라. 의식하니까 괜히 설레서 가슴이 간질간질 거렸다.
"이쪽으로."
라이라의 안내를 따라서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뤼네아의 귀족들과 만나기 위해 연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모두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움직였다.
"이따가 보자?"
노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각자 다른 길로 헤어졌다.
아무래도 남녀가 같이 옷을 갈아입는 건 이상한 모양새지.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이동했다.
옷이 잔뜩 나열되어있다. 휘황찬란하고 보석이 달려있는 걸 보니 귀족을 위한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캐주얼하고 정장의 느낌이 나는 옷을 골랐다.
'...아무리 귀족만의 멋이 있다고 해도..'
저렇게 보석이 치렁치렁 달리고 불편해 보이는 옷은 좀 꺼려진다.
마로스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흰색 계열의 옷을 골랐다.
역시 잘생긴 놈이라 그런지 옷맵시도 좋고 외모가 확 눈에 띈다.
마로스를 본 뒤에 거울을 봤다.
평범한 20대 대한민국 청년이 그 안에 있었다.
'...뭐냐 이건.'
조금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떻게 해.
옷을 다 입은 뒤에 바깥으로 나가자, 역시나 우리가 더 빨랐다.
여자들이 옷 입는 속도가 더 느린 거겠지.
탈의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대체 언제 나오려는 걸까.
5분 정도가 지나자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리스다.
평소의 성녀복장이 아니라 오프 숄더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어울려요?"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세리스는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특히 가슴 부분이 훤히 드러난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엄청 어울려. 한 눈에 반할 것처럼 예뻐."
"그럼 다행이고요..."
수줍게 웃은 세리스의 뒤로 에우제니아가 나타났다.
베이지 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평상시와 너무 다르다.
가슴이 흘러나올 것 같은 디자인에 저절로 성욕이 끌어 올랐다.
"아씨. 불편하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엄청 좋나 보네. 변태 같긴."
속 내용물은 에우제니아 그대로였지만, 드레스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인간보다 뾰족한 귀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썼는데. 이것도 색다른 매력을 보이고 있었다.
"오빠. 저는 어때요?"
마리아는 푸른 머리칼에 어울리는 흰 드레스를 입었다.
일부러 가슴골을 팔로 모아서 이쪽을 도발하는 자세를 취했다.
"으슥한 데로 가서 만지실래요?
은근슬쩍 가슴 안쪽을 보여준다. 핑크색 젖꼭지가 보이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다음에."
"칫.."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표하는 마리아.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노아가 나올 차례인데. 기다려도 나오질 않는다.
"노아?"
그제야 바깥으로 나온 노아의 얼굴은 붉었다.
어깨와 허리부분은 검정색에 배 부근은 하얀색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는 드레스. 과감하게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귀를 숨기기 위해 에우제니아와 마찬가지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아마 어딘가에 귀를 고정한 게 아닐까.
머리스타일로 귀를 가리려는 노력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귀족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아. 이렇게 보니 어디 가문의 여식처럼 보인다.
"...어때?"
"예뻐. 반할 정도로."
칭찬에 노아가 히죽 히죽 웃었다.
귀가 보인다면 위아래로 파닥파닥 거리겠지.
"강한윤 너도 엄청 멋져. 반할 정도로."
그런가? 거울을 봐도 잘 모르겠던데.
노아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그럼 이제 가죠."
라이라는 평소와 같은 과감한 드레스 복장이었다.
옆트임이 심한 붉은 색의 드레스. 저 복장이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앞장 서는 라이라를 따라서 모두 움직였다.
귀족들의 연회는 처음이라는 생각에 긴장도 되지만 자신감이 유일한 무기다.
괜히 겁먹을 필요 없지. 우리가 할 일은 그레모리의 흔적이 있는 지.
그레모리와 연관된 귀족이 얼마나 있는 지 파악하는 거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