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21화
* * *
"모두 진형을 지켜라!"
프로이벤의 영주. 하이스타인이 소리쳤다.
갑작스레 늘어난 하급 마족들의 숫자때문에 문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겨난 거냐.'
최근 들어서 마족들이 잠잠하다 싶었다.
하급 마족들의 웨이브도 없었고, 가끔씩 튀어나오던 중급 마족들도 보이질 않았다.
평화로운 시간이 계속되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어졌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까지 프로이벤을 유지하고 있던 베테랑 병사들이 있다.
이번 웨이브도 완벽히 막아낼 거란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은 틀린 지 오래였다.
나흘 동안 이어진 몬스터 웨이브에 모두가 지쳤다.
검을 드는 것도 힘겹지만 전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북쪽 성문이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최대한 쪽잠을 자며 버텼지만, 서서히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다. 하급 마족들의 시체는 산처럼 쌓여있지만, 아직도 프로이벤을 향해 공격해온다.
'원래대로라면..'
충분히 막아낼 만한 웨이브였다.
이렇게 힘겹게 막아낼 웨이브가 아니다.
세르브리아 여왕이 프로이벤의 병력을 징집해서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힘겨운 전투를 이어나갈 일은 없었다.
'왕국이 문제였다.'
하이스타인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딱히 여왕을 따르진 않았다. 애초에 왕국을 좋아하진 않았다.
왕국에서 지원을 해주는 건 좋지만, 그만큼 간섭이 심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마족이 다른 지역으로 흘러나간다면 몇 날 며칠을 난리치는데 좋을 리가 없었다.
왕국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은 이번으로 완전히 틀어박힌 채였다.
여왕이 프로이벤에서 병사들을 징병해서 서쪽으로 떠났다.
연락이 두절 된 여왕은 그 병력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들린 소문은 여왕이 마족과 결탁했다는 것.
왕국이 분열되고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터졌다.
잠잠하던 프로이벤으로 마족들이 들이닥쳤다.
여왕이 징병한 병사들만 아니라면 무난하게 막을 숫자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넓은 방어지역에 비해 병사의 질은 자연스레 낮아진 상태였다.
하이스타인은 왕국으로 서신과 수정구로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길고 긴 침묵이었다.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 없이 마족 웨이브를 막아내던 하이스타인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망할 왕국 새끼들.'
첫날에 마족들의 규모를 예측해서 미리 연락을 보냈건만.
왕국은 프로이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여왕이 죽어서 재정비를 하고 있는 건지, 내분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프로이벤을 버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연합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이스타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연합군으로 넘어가버린 레오리스로 연락을 보냈다.
연합군으로 들어가겠다고. 그 대신에 지원을 원한다고.
그렇게 연락을 보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들의 연락을 기다릴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콰직! 북쪽의 성문이 부서지는 중이었다.
'망할 왕국 새끼들.'
하이스타인은 검을 굳세게 쥐면서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왕국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정치가 어떤지, 뭐가 이득인 지 신경 쓴 적도 없다.
오직 마족을 막는 것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정작 도움을 주진 않다니.
프로이벤에는 갈 곳 없는 영주민들이 많았다.
여기가 뚫린다면 다른 지역들도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죄 없는 평민들이 죽어나가는 걸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성문은 부서지려는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콰직! 콰직! 중급 마족들이 성문을 두들긴다.
작은 고블린처럼 생긴 하급 마족들과 달리 강인한 몸을 가진 매끈한 동물같다.
그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성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분. 아니 몇 초일 수도 있다.
곧 있으면 성문이 부서지고 그들을 상대해야하는 건 정해진 일이었다.
"모두....성문이 뚫린다....! 대비하라! 전투를 준비해라!"
잠을 자지 못해서 손이 부르르 떨린다.
휴식 없이 치른 수많은 전투로 인해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하이스타인은 검을 바로잡았다.
싸워야하니까.
그 순간에도 떠오른 것은 연합군이었다.
'신성교단과 손을 잡았으니 도움이 될 터인데.'
연합군에 신성교단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한 성기사 여럿이 온다면 전황이 확 뒤바뀔 텐데.
연합군이 오기엔 너무 늦었다.
콰직! 성문이 부서진다.
날카로운 이과 발톱을 자랑하는 마족들이 성으로 들어왔다.
"모두 방패와 창을 들어라!"
저 녀석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한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소드익스퍼트 최상급과 소드마스터 세명으로는 커버가 되지 않을 물량이었다.
크르르! 마족들이 땅을 박차고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막아라! 이 녀석들을 막아!"
"죽을 힘을 다해 창과 방패를 들어 올려라!"
"뒤져! 뒤져! 이 새끼들아!!"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마족들과 전투를 치른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하이스타인을 포함한 소드마스터들이 마족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진형이 무너지는 게 훨씬 빨랐다.
'이대로 끝인가.'
이제는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도 버겁다.
그렇게 손아귀의 힘이 빠져나가려고 할 때, 하이스타인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노란색의 물결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에 그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땅을 강타한다.
빛에 맞은 마족들은 재만 남긴 채로 불타버렸다.
크르르르! 크롸아아아!
성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마족들이 차례대로 정리된다.
성 바깥으로도 쏟아지는 빛에 모두가 어리둥절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마치 신의 천벌 같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동의했다.
닿는 족족 마족이 불타 녹아내린다. 상대하기 힘겨운 녀석들이 쉽게 죽는 모습에 모두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그건 검을 힘겹게 쥐고 있는 하이스타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보고 있으니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이벤의 영주. 하이스타인인가?"
명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이는 오크였다.
아는 얼굴을 아니었지만, 숨기지 않는 그녀의 강대한 마나에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오드웰 연합군 북부의 사령관. 에우제니아.
그녀가 하이스타인 앞에 서있었다.
"오드웰 연합군의 지원을 바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연합군에 들어오고 싶다는 내용도 사실인건가. 여기에서 쉬고 있어라. 많이 지친 것으로 보이는 군."
하이스타인을 살펴보던 에우제니아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쿠웅! 땅을 박차고 단숨에 성문 쪽으로 날아갔다.
"후우! 역시 몸을 움직여야 살만 하다니까!"
그녀가 신나게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서 뒤를 따라 움직였다.
홀리 제네시스
세리스가 기도를 올리자 또 다시 하늘에서 빛이 떨어진다.
거대한 빛의 기둥과 함께 마족이 소멸하는 모습에 하이스타인이 중얼거렸다.
"오... 맙소사.."
그녀와 옆에 서있는 이들에게 시선이 향한다.
그 중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세리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에서 나오는 용사의 모습이었다.
하이스타인은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전장이 정리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
"마족이 쳐들어오고 왕국은 저희를 버렸습니다. 결국에 연합군에 연락을 보냈는데. 마침 뚫리려는 찰나에 오신 거죠."
"위험했네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이스타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피해가 심각했을 거다.
물적 자원과 인명 피해에 전선이 무너졌다면 수습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다.
부서진 성문을 수리하는 것으로 성벽 보수가 완료됐으니 천만 다행이다.
콰앙!
하이스타인이 동맹 제안서에 가볍게 사인을 하고 도장을 세게 찍었다.
그가 건네는 동맹 제안서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프로이벤도 연합군의 손으로 들어왔고, 북부의 70%는 점령한 상태가 되었다.
"그보다 타락한 땅으로 간다는 얘기가 사실입니까?"
하이스타인은 불길함을 느꼈다.
마족들의 웨이브를 수십 년간 처리해왔지만, 이번처럼 이질적인 웨이브는 처음이었다.
중급 마족의 비율이 너무 높았으니까.
타락한 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아무리 신성력이 있다한들 마기에 둘러싸인 타락한 땅에서는 효과가 줄어든다.
그 사실을 아는 하이스타인은 염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냥 조사할 게 있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정찰대나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부르겠습니다."
"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길을 잘 알고 있다 한들, 모든 맵을 달달 외워버린 강한윤보다는 못할 게 뻔한 사실이었다.
정 안 되면 미니맵 보고 찾아가면 되니까.
길을 찾는 데에도 여러 가지 꼼수가 있는 법이었다.
강한윤이 걱정하는 것은 타락한 땅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게 아니었다.
'보라색 안개가 잔뜩 껴있는 것 따위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지.'
마족은 웨이브의 비율에 따라서 원인이 다르다.
상위의 마족 영웅이 탄생하면 상급 마족 하나가 포함된 웨이브를 조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중급 마족이 이렇게 많은 건 이상하지.'
중급 마족의 숫자에 비례해서 상급 마족의 숫자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대충 둘러봐도 너무 많은 숫자의 마족이다.
확실히 이상한 상황이라는 건 인지했다.
"일단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찰을 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진 않을 테니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이동하기 위해 소모한 간이 식량과 물.
그런 물자들을 보급하고 난 뒤 북쪽 성문으로 나섰다.
"어우."
성문을 열자 진득한 마기와 안개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느낌.
화생방 cs탄을 진하게 터트린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세리스가 신성력으로 모두에게 버프를 부여하지만, 고통이 줄어드는 것 뿐.
화생방처럼 눈과 코가 따가운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강한윤.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지도를 보던 에우제니아는 눈을 찌푸렸다.
적힌 내용을 읽어보아도 아는 게 없으니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거기에 지도는 타락한 땅의 반의 반 정도만 정찰이 된 상태였다.
나머지는 백지 상태. 결국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흐음...어디로 갈까."
여기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바엘과 아가레스가 있을 테고.
서쪽으로 가면 아몬과 가미긴.
동쪽으로 가면 마르바스와 발레포르가 있다.
중앙에는 바사고와 바르바토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음... 일단 올라가죠."
일단 가장 가까운 곳이 중앙이기도 하고 정보를 얻으려면 그들을 잡는 게 훨씬 낫다.
바사고와 바르바토스는 둘 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미래를 보는 능력은 무조건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
키에에엑!
하급 마물이 가볍게 반 토막이 난다.
이런 잡다한 녀석들이 덤벼드는 것을 처리하면서 타락한 땅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 곳엔 높게 솟아오른 성이 있었다.
성의 주변에는 황폐할 정도로 가뭄이 진 땅과 마족들이 다니고 있으니 언밸런스하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재개발로 성을 지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들어가 보자."
우리는 당당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열자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중급 이상의 마족들이 있었지만.
"그에에.."
이미 바닥에 달라붙은 시체가 된 지 오래였다.
사아아. 성의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것도 없이 바람만 불고 있었다.
누군가 활동한 흔적도 없고, 다른 마족들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모두가 성을 버리고 떠난 모습이야. 만진 지 한참 된 것들뿐이야."
"그러게요. 확실히 그렇네요."
노아와 세리스가 2층의 물건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성 구석에는 먼지가 케이크처럼 수북이 쌓여있고, 선반의 물건에도 마찬가지로 꼬질꼬질하다.
그렇게 3층,4층,5층을 뒤져봤으나 특별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금화 1개가 들어있던 주머니가 수확의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6층의 보스방.
여기엔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1층부터 5층까지 퍼져 있어야 할 마족이 이 곳에 뭉쳐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 뭐가 있을까."
"글께."
안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문에 가로막혀서 그럴 지도 모른다.
에우제니아가 힘차게 문을 열었다.
"...나의 잠을 깨운 자가 누구지?"
그 곳에는 의자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땅에 박혀있는 거대한 대검을 뽑았다.
자신의 몸처럼 커다란 검을 가볍게 다룬다.
뭐야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서쪽과 동쪽 끝에 봉인되어있는 고대 악마 중 하나인 자르간.
그가 이 곳에 앉아있다니.
뭔가 크게 뒤틀린 게 틀림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