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120화
* * *
"...남편님"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의 퉁명스러운 느낌이 아닌 사랑이 잔뜩 담긴 목소리다.
머리카락을 빗듯이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는 사람은 라이라였다.
작게 웃음소리도 들린 것 같은데.
평상시에 라이라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해서 그런지 새롭다.
눈을 살며시 뜨자 팔베개를 한 채로 내려다보는 라이라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줘."
"...깨어있었나요."
"당연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깨어났어."
까칠함이 담긴 당신 대신에 사랑이 듬뿍 담긴 남편님 이라는 말에 깨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라이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듣고 싶은데 안 될까."
"읏..."
"듣기 전에는 밖에 안 나갈 거야."
강력하게 의지를 표하자 라이라는 고민하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남편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아요?"
"애정이 담겨있어서 훨씬 좋지. 비교할 바가 안 돼."
라이라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남편님."
그녀는 부끄러운 지 얼굴을 가슴팍에 파묻은 채, 시선을 마주치려하지도 않는다.
"나는 듣기 좋은데 왜 이렇게 수줍어하는 지 모르겠네."
놀리듯이 말하며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머리칼처럼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놀리지 마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녀가 웃는 걸 보고 싶었는데.
이 상태로 보아선 아무래도 기대하기 힘들어보였다.
"이제 나갈 시간이에요. 아침 식사할 시간이니 미리 나갈 필요가 있어요."
"벌써?"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널널한 것 같았는데, 어느새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강한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어제 벗어둔 옷을 하나 둘 씩 입었다.
바지와 팬티는 바닥에 있고 웃옷은 침대에 걸려있다.
그가 옷을 입는 걸 도와주던 라이라는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남편님"
강한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 히죽거렸다.
입고리가 진정되지 않는다. 볼을 어루만지며 최대한 표정관리를 노력한 뒤에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가요. 모두가 기다릴 것 같으니까요."
아직 그에겐 미소를 보여주기 부끄러웠다.
*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길.
바깥의 병사들은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무리에 섞여있는 이들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
노아가 데리고 온 수색, 정찰대의 인원들.
그들은 레오리스의 병력들과 섞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맹을 위해서 교류를 한다는 선택은 항상 괜찮은 편이야.'
사티라의 경우에서도 그랬듯이 레오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못한다는 것.
그 점을 이용해서 병사들끼리 교류를 유도한다.
여태까지 살벌하게 전투를 해왔던 것을 정으로 잊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서로 교류하고 호감도가 올라가다보면 정착하게 된다.
'잘 되고 있나보네.'
재밌는 농담이라도 나누는 건지 엘프, 오크 병사와 인간 병사들이 웃고 있엇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다. 이대로 동맹이 정착되기까지 기다리면 된다.
'사실상 왕국은 사라진 상태니까 버티기만 하면 되거든.'
그 사실을 떠올리고서 작게 웃었다.
여왕은 죽었다. 여왕을 제외한 직계 후손이 있을 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이 순간을 노려서 세력을 흡수해나가는 게 중요한 점이다.
왕국에서 수습을 해나가기 전에 일을 해치운다.
그걸 위해 오늘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끼익. 식당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메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이동했다.
기다란 식탁에는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앉아있었다.
"야. 우리 없이 즐거웠냐?"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에우제니아가 주먹으로 톡 하고 건드린다.
그럴 리가. 그녀들이 없으면 이제는 허전하다.
3P로 섹스 하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라이라와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그제야 모두 식기를 들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되네."
그렇게 식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이리스가 이안의 옆구리를 톡 하고 건드렸다.
"크흐흠... 사위... 라고 부르려고 하니 어색하군. 아무튼 베르첼 가문에 온 걸 환영하네."
"네. 감사합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긴장이 되는 것보다는 이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게 더 크다.
달그락 달그락. 모두가 식사를 시작하면서 어제처럼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귀족의 예법이랄 게 크게 없는 연합군인 만큼 모두 적당히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진짜 맛있긴 하다. 요리 가르쳐달라고 해도 되려나?"
"민폐 아닐까요...? 하지만 저도 배우고 싶은데... 강한윤은 요리를 잘하는 여자를 좋아하겠죠...?"
에우제니아와 세리스가 작게 대화하는 게 다 들린다.
그녀들의 대화를 들은 이리스가 온화하게 웃었다.
처음 요리를 배우던 시절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스테이크 소스 정도만 알고 싶어요."
그나마 요리에 자신이 있는 노아.
그녀는 소스와 향신료 쪽에 관심을 가졌다.
'맛있네.'
장모님 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이 모든 걸 직접 만들진 않았어도 메이드들이 그녀의 도움을 받은 건 확실하다.
고기 수프를 한입 떠먹고 있으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윤... 아니 사위."
장인어른의 목소리였다.
"이번에 동쪽에서 연락이 왔다네."
"동쪽 말입니까? 프로이벤입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 살고 있는 타락한 땅과 연결이 되어있는 곳이다.
'프로이벤에서 연락이라.'
마기가 항상 북쪽에서 불어오는 지역이라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없다.
좋은 방향의 연락이더라도 딱히 기대가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도움을 요청해왔다네. 동맹요청인데. 사실상 연합군으로 받아달라는 얘기지."
"그 대신에 원하는 게 있을 텐데요."
왕국 소속이었던 프로이벤에서 괜히 받아달라는 게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있을 터.
힘든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은밀하게 요청을 보내오는 것이다.
"아마 자원일걸세."
정해지지 않은 요구사항과 합의 내용이지만 이안은 그렇게 짐작했다.
프로이벤의 지역은 끔찍한 곳이니까.
마기때문에 식량과 자원을 구하기 어려운 곳이고, 매일 하급 마족들과 전투를 벌인다.
척박한 땅에서 요구할만한 사항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쪽으로 소식이 간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연락이 오다니.'
레오리스를 점령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이벤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는 건 그만큼 급할만한 사항이 있다는 거다.
"강한윤. 프로이벤은 어떤 곳인데?"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에우제니아가 물었다.
북부의 모든 작전에 대한 승인권은 그녀가 가지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거기에 연합군이 가진 프로이벤의 정보는 적은 편이었다.
그게 아니라 에우제니아가 프로이벤까지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프로이벤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해보였다.
"북쪽에 타락한 땅이 있어서 항상 물자가 빨리 소진되고, 공격의 위험이 있고, 농도가 낮은 마기 때문에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곳이지."
"... 별로 끌리는 곳은 아닌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확실히 끌리지 않는다. 프로이벤을 가진다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거니까.
넓은 영토인 만큼 전선도 넓어지고, 물자소모도 훨씬 늘어난다.
그렇게 지원해준다고 돌아오는 것은 딱 하나다.
남침하는 마족들을 막아준다.
딱 그 메리트 하나 만을 위해서 프로이벤은 존속되어야한다.
물론 그게 잘 되는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위험한 상황이겠지.
"그래도 지금 점령하기엔 나쁜 곳은 아니야. 마족들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하니까."
나중에 정화작업으로 마기를 몰아낼 수도 있고, 마족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왜 마족들이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타락한 땅에 가려면 프로이벤을 들러야하니까.'
보급 같은 문제가 있기도 하고 바다로 가봐야 마기에 찌든 크라켄 같은 녀석들이 나타난다.
바다 속에서 올라온 촉수에게 하루 종일 공격당하다가 배가 난파될 수도 있으니 육지에서 이동하는 게 낫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어쩔 수 없는데. 땅을 이용할 순 있어?"
"없을 걸. 그 곳은 저주받은 땅이나 다름없으니까."
게임에서도 딱히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세계수를 심어서 모든 땅을 정화하는 방법 말고는 말이다.
"그럼 프로이벤 말고 다른 지역에서 연락 온 건 없습니까?"
"아직은 없다네. 하지만 다들 고민하고 있겠지. 연합군과 왕국. 둘 다 장단이 있으니."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다른 지역의 반응은 미묘한 것 같다.
이대로 왕국 전체를 먹어치울 수 있나 고민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아쉽다.
"사위. 프로이벤에 가려는 건가?"
"예. 그럴 생각입니다."
사위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프로이벤에 가긴 해야 한다.
마족들이 머무는 타락한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 확실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연락을 넣어주도록 하지."
그의 도움으로 일이 더 편하게 진행되려나.
우리는 밥을 먹고 떠날 채비를 갖췄다.
*
"연락은 취했으니 이제 가보게. 그 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을 걸세."
"예.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이안 베르첼의 배웅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섰다.
프로이벤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휴식을 취하거나 정비를 하거나. 그건 프로이벤이나 그 근처에서 가능할 테니 말이다.
"저.. 사위?"
장모님이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는 이리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에 올 땐 결혼 날짜를 잡을 생각이 있나요?"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데.
일단 대륙의 상황이 평화로워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 전쟁의 끝이 다가온 뒤로 생각은 해둔 상태였다.
"결혼에 대해 생각은 있긴 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구상해놨습니다."
"그런가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할 게요. 그런데 오래는 못 기다려줘요. 사위?"
"아하하.. 네 알겠습니다."
무언의 압박을 받고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할 것 같다.
에리엘의 아버지 에키르도 그렇더니 이쪽도 그러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이동했다.
손을 흔들고 있는 이리스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이안이 점점 작아진다.
아예 보이지 않게 되자 베아트리스의 등에 탑승했다.
"오늘 안에 프로이벤까지 갈 생각이에요?"
"그렇지. 갈만 한 거리잖아."
마차로 사흘 정도 걸리는 거리다.
프로이벤까지 빠르게 간다면 저녁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한참을 이동하고 있다가,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챈 것은 에우제니아였다.
"점점 마나가 옅어지는데?"
공기에 포함된 마나의 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다른 지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농도라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러면 회복력도 떨어지는데.
에우제니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마기의 농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네요."
세리스가 걱정을 담아 말했다.
마기는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여기가 이런 상황이라면 아직 거리가 남은 프로이벤은 어떤 상황일 지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마기로부터 모두를 보호하며 이동한다.
마기에 침식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프로이벤이 시야로 보이는 거리까지 오니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이건... 싸우고 있네."
프로이벤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