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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21화 (121/163)

〈 121화 〉 118화

* * *

이안은 이 종이를 받아야할 지 말아야할 지 고민하고 있다.

지금 타이밍이 완벽한 동맹 타이밍이다

왕국이라는 구심점은 여왕의 죽음으로 사라진 상태고 마족과 같이 싸운 병사들은 반응이 누그러져있다.

모두의 적의가 조금이라도 적어진 이 순간을 벗어난다면 또 다시 칼을 겨누게 될 거다.

"계속 싸우는 게 의미 없다는 건 알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전쟁이 멈춰야 한다.

그 시기가 빠르다면 더 더욱 좋지. 나쁠 건 없는 선택이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게 있다.

"...아버지"

"레이네."

이안은 라이라가 다가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딸이 가문을 떠나고 나서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른다.

아내가 죽고 남아있는 딸이라도 소중히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 관계를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몇 년 만에 손을 잡는 지 모르지만, 그리운 느낌이었다.

"...정말 영악하군. 당연히 동맹을 맺지 않는다면... 딸아이와 만나지도 못하겠지?"

"협상 조건에 당연히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이안은 동맹 제안서를 빼앗듯이 잡아든 뒤에 마나를 새겼다.

강한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다시 받아들었다.

"현자의 돌은 곧 준비하겠습니다."

이제는 현자의 돌을 만들 차례였다.

***

강한윤은 레오리스 근처에 숨겨져 있는 순간 포탈 생성기를 통해 푸니아로 향했다.

현자의 돌을 만들려면 5중 각인이 필요하다.

달리스와 세베라가 없다면 작업을 시작조차할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

달리스는 초췌한 눈으로 각인이 담긴 스크롤을 내밀었다.

"오."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는데.

5중 각인이 새겨진 스크롤은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모아두었던 재료를 꺼내서 스크롤을 사용하자 눈이 아플 정도의 빛이 나오며 아이템이 생성되었다.

자그만한 조약돌 크기의 현자의 돌은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불순물 섞인 현자의 돌을 만들었습니다!]

[행동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2개 밖에 안 나왔네.'

최소 1개 최대 3개까지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딱 평범한 수준의 결과였다.

거기에 불순물이 섞였다는 건, 아마도 드래곤의 심장이 좋지 않아서인 걸까.

[불순물 섞인 현자의 돌]

­불순물이 섞여있습니다. 하지만 성능에는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흐음..'

설명을 읽어봐도 현자의 돌은 맞다고 되어있으니 효과는 비슷하겠지.

"이게... 현자의 돌...!"

처음으로 현자의 돌을 본 달리스와 세베라는 눈을 반짝였다.

미안하지만 이 둘한테 줄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줄 수도 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

"물어볼 필요가 있나! 연금술의 정수인 현자의 돌이 탄생했는데!"

"나중에 현자의 돌을 만들게 되면 그건 챙겨줄게."

"정말로? 정말이지?"

세베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난 이런 걸로 거짓말은 안 해."

주면 주고 안주면 안줬지. 줬다가 뺏거나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기대의 눈초리로 가득한 세베라를 뒤에 두고 다시 푸니아를 향해 이동했다.

'현자의 돌로 사람이 살아난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현자의 돌로 만들어낸 엘릭서도 그만한 힘은 없으니까.

혹시나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엘릭서를 만들어봤지만, 게임에서 알고 있던 그대로의 엘릭서였다.

[불순물 섞인 엘릭서]

­모든 상처를 치유합니다. 훼손된 신체까지 복구할 수 있습니다.

­불순물이 섞여있지만 엘릭서의 성능은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불편한 진실을 안은 채로 푸니아로 이동했다.

푸니아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것은 이안 베르첼과 라이라였다.

같이 붙어있으니까 확실히 부녀처럼 보인다.

"장인어른 가져왔습니다."

가져온 현자의 돌을 슬며시 보여주자, 그는 오오 하며 작게 감탄을 내질렀다.

"이게... 이게..."

현자의 돌을 받아든 그는 귀한 물건을 얻은 것처럼 소중하게 손에 쥐었다.

"빨리 별채로 가도록 하지."

이 순간을 몇 년이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혹시나 현자의 돌이 가짜인가 싶었지만, 본인이 알고 있는 특징에 부합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마나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쥐고 있으면 계속해서 서늘하다는 것까지.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안 베르첼은 잔뜩 기대를 한 채로 별채를 향해 걸었다.

별채의 3층 구석의 방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얼음이 그를 반겨주었다.

서늘한 공기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자 얼어붙어있는 여성이 보인다.

평생의 반녀. 이리스.

자신은 이렇게 늙었지마 얼음 속의 이리스는 젊은 모습이었다.

죽었던 때의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음을 유지하고 있는 마법을 해제하자 이리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방금까지 살아있던 것처럼 혈색이 좋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서 상태를 유지한 결과였다.

"제발."

이리스가 살아나기를.

그렇게 빌며 이안 베르첼은 현자의 돌을 이리스에게 가져다대었다.

그녀의 심장 부근에 현자의 돌을 가져다 댄 뒤에 가볍게 눌렀다.

"이리스.. 눈을 뜨게.."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희망 한 줌이라도 잡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자의 돌은 반응하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슬프네.'

현자의 돌은 모든 아이템의 조합에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이자 마스터피스인 물건이다.

당연하지만 현자의 돌로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현자의 돌과 다른 물건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거다.

"이리스..."

이리스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안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나왔다.

무릎을 꿇고 시체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안 베르첼.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라이라의 표정도 슬퍼보였다.

"..어머니"

라이라는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몇 년 만에 보지만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소녀 시절에 봤던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젊다.

자그마한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역시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는 없었다.

"아버지. 이제 어머니를 놓아줘요. 어머니도 이런 모습을 보시면 싫어할 거예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어쨌든 계속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라이라의 말을 들은 이안 베르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사람을 살리는 건 안 되는 모양이다."

이때까지 허비한 시간과 돈은 아깝지 않다.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포기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제는.. 포기해야겠지."

코가 시큰거림을 힘겹게 참아내며 이리스에서부터 멀어졌다.

이제는 장례도 치러주고 보낼 시간이었다.

이안 베르첼은 그녀를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장모님..?'

장모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젊은 모습이다.

라이라와 나이차이가 조금 있는 누나라고 해도 될 정도.

장모님이라 부르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하나 더 시도 해봐도 될까요."

강한윤이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불순물 섞인 엘릭서]

빨간색에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차례대로 바뀌었다가 다시 빨간색으로 돌아온다.

보기에는 불길한 물약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확실한 엘릭서였다.

"...이건 엘릭서인가."

손에 들린 게 엘릭서라는 걸 그가 알아챘다.

"예. 시도를 해본다면 최대한 해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래.. 해보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까.

"음."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얼굴을 만져서 입을 벌려야 하는데 뭔가 뻘쭘하다.

라이라가 조용히 다가와서 장모님의 입을 벌려주었다.

[불순물 섞인 엘릭서]

..이 상태로 써도 되나?

신성력으로 강화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신성력을 엘릭서에 천천히 흘려 넣자, 노란 빛이 병을 감쌌다.

[신성한 불순물 섞인 엘릭서]

­신성력으로 강화된 상태입니다.

신성력으로 강화된 엘릭서를 입으로 천천히 흘려 넣었다.

엘릭서가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도록 한 병을 전부 흘려 넣은 뒤 천천히 기다렸다.

5분. 10분. 15분이 지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 그것도 죽은 지 한참 된 사람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나보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하다.

'아쉽네.'

그래도 건진 건 있었다.

이안 베르첼의 호감도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엘릭서가 공중분해 됐다는 아쉬움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누워있는 이리스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모두가 당황한 채로 굳어있었다.

"설마..."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이안 베르첼이었다.

이리스가 누워있는 침대로 이동한 그는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으응.."

눈이 부시는 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이리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안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리스..."

이 순간을 기다려왔건만 정작 말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고.

해준 게 많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이 손을 놓치지 않겠다고.

이안이 눈물을 흘리며 눈을 뜬 이리스를 껴안았다.

"꺄악! 누구..."

갑작스레 포옹한 사내에 놀라 이리스가 밀쳐내려고 손을 휘저었지만.

킁킁. 마음이 안정되는 냄새다.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냄새.

단 하나뿐인 남편. 이안 베르첼의 냄새였다.

"여보... 왜 그래요? 아니 왜 이렇게 붙어요?"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던 이리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새치하나 없던 머리가 아니라, 흰 머리가 지긋하다.

양 손으로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이리스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확인했다.

자신이 알던 사내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는 젊음 대신 연륜이 담겨있는 얼굴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서 이안의 얼굴을 껴안았다.

"그랬던 거네요..."

자신은 정원에서 쓰러졌었다. 그 뒤로 쭉 기억이 없다.

이리스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니"

어린 소녀가 아니라 완전히 성인이 된 딸이 그곳에 서있었다.

"레이네..."이리스는 자신의 시간이 여태껏 멈춰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이 쓰러지고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5년? 10년? 하지만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리오렴."

라이라도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다가가서 포옹했다.

그래. 그래. 이리스는 등을 토닥이며 시선을 돌렸다.

"저... 그쪽은..?"

"라이라.. 아니 레이네의 사위입니다."

"사위라고요? 어머! 진짜요?"

눈을 크게 뜬 이리스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잔치를 해야겠네요!"

*

"엄청 맛있어... 혀가 황홀할 정도라니.."

"우후후... 고마워요! 그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 자신 있거든요."

노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이리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그런지 다른 여자들도 이리스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맛있긴 하다. 음식 하나하나 특별하진 않지만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 10명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었다니.

요리 실력이 스킬로 나온다면 만렙에 가깝지 않을까.

우물우물.

음식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식사시간이라서 그런지 더 맛있다.

"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해도 돼요! 후후..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네요."

이 모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리스. 그녀가 있기 때문 아닐까.

활달하고 밝은 분위기로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 배부르다."

식사가 끝나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라이라의 방으로 향했다.

'제 방에서 기다려요.'

식사 도중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라이라의 속삭임 때문이었다.

방에서 기다리라니.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약간의 기대심을 품은 채로 침대에 앉아있으니 문이 열렸다.

평상시와 같이 옆트임이 심한 드레스다.

잘하면 팬티까지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라이라가 요염하게 걸으며 다가왔다.

침대 옆에 앉은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요. 정말로.. 어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사실 나도 몰랐어."

오히려 죽은 사람이 갑자기 부활해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가요. 상관없어요. 어쨌든 당신의 도움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까요."

라이라가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한 스킨십이다.

눈을 마주친 그녀는 조용히 아공간에 손을 집어 넣었다.

"저... 그..."

라이라가 말하기를 망설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아공간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다.

목걸이를 자연스럽게 쥐어 주길래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이걸 왜 내 손에 쥐어주는 거지?

손으로 쥐니까 이 목걸이가 얼마나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건지 알아챘다.

튼튼하고 질기고 고급지다.

"부모님이 결혼을 오히려 응원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목걸이를 준비했다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애꿎은 목걸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 목걸이 안쪽에 무언가 적혀있다.

목걸이를 뒤집어서 글자를 확인했다.

­강한윤의 영원한 노예­ 라이라

"...오늘부터 남편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주인님?"

주인을 위해 노예가 선물을 가져온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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