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17화
* * *
"레오리스가 우리를 배신했다! 모두 돌격하라!"
여왕을 따라서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칼을 높이 들고 마나를 담아 소리치자 뒤에 있는 병사들도 칼을 들어올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레오리스를 향해서 공격을 하려는 찰나.
레오리스의 성벽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같은 편에게 칼을 들다니!"
성벽 위에서 이안 베르첼이 소리쳤다.
깊은 배신감을 느낀 것처럼 실망이 담겨있었다.
"그렇다면 문을 여시오! 이안 베르첼 경!"
"왜 열어줘야 하지?"
기사단장의 외침에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쪽으로 올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왕님의 명령이다! 문을 열어라!"
"여왕님의 명령이라...! 명령이라면 내가 전부 따라야 하는 건가? 아무런 이유가 없는 명령이라도?"
그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안 좋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더라도 말인가?"
"여왕님을 모욕하지마라! 모두 레오리스를 향해 돌격하라!"
기사단장이 소리침과 동시에 이안 베르첼도 소리쳤다.
"여왕은 마족과 결탁했다! 명령을 따르지 마라!"
"이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저 녀석의 입을 찢어버려라!"
오히려 역효과로 기사단장의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역시 쉽게 나오진 않네.'
성벽 위에 숨어있던 강한윤은 몰래 여왕을 쳐다보았다.
저 표독스러운 얼굴을 보면 무조건 마족과 계약을 했을 텐데.
그녀의 상태창이 떠오르고 자세한 정보가 나타났다.
[세르브리아 2세 : 레벨 23]
피의 계약
'피의 계약이라면...'
악마와 계약을 한 게 맞다.
그것도 약해빠진 녀석하고 계약을 한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상위의 마족과 계약을 한 상태였다.
'조금 위험하려나.'
하늘 위에서 날고 있는 까마귀. 비엔에게 지금 당장 움직이라고 살짝 눈치를 줬다.
"저 녀석의 말을 듣지 마라! 모두 돌격하라!"
기사단장이 소리치자 주춤하던 병사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레오리스를 향해서 달려오는 병사들. 그때 여왕을 향해서 화살이 날아왔다.
빠르고 날카로운 화살. 기사와 병사들의 반응이 늦은 상황.
"여왕님!"
여왕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린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콰직!
여왕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검은색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화살을 막아내고 가볍게 검을 툭 털어냈다.
"마... 마족..."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여왕을 호위하듯이 둘러싼 이에게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로... 마족이랑...!"
"여왕이 마족과 계약을 했다! 마족과 결탁했다!"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습에 모두가 여왕을 둘러쌌다.
"여왕. 위험했다."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조용한 외침에 여왕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왕. 명령을."
한 순간에 모두의 적의가 여왕에게로 향한다.
여왕을 충실하게 보좌하던 기사단장마저도 불신의 시선이 가득했다.
"여왕님... 설마... 진짜로...!"
"이런 망할...! 여왕이 마족과 결탁한 건가!"
그의 검도 여왕에게로 향한다.
여왕을 둘러싼 병력들도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
"명령을."
기사가 기다리는 것처럼 여왕의 눈치를 보고 있다.
마치 여왕이 명령을 내리고 기사가 따르는 모양새.
"큿.."
여왕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마족과 계약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녀가 계약한 마족은 이 기사가 아니었다.
방금 처음 본 마족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족이 갑자기 등장해서 공격을 막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대체 뭔데 이러는 거야!! 뭐냐고!'
자신과 계약한 마족은 가만히 있는데, 이 녀석이 알아서 마족과 계약했다는 티를 낸다.
모두가 두려워하며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망할...!"
여왕의 몸이 마기에 오염되고 마나는 전부 마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도움이 필요한 건가.
어디선가 어두운 목소리가 들린 뒤에 여왕을 중심으로 마기가 흘러나왔다.
수증기처럼 흘러나온 마기에 닿은 병사들의 몸이 녹아내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도망치지만 마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훨씬 빨랐다.
"뭐... 뭐야...!"
"크아아악! 모두 도망"
"살려줘!"
미처 도망치지 못한 병사들이 마기에 침식되며 바닥으로 끌려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병사로 다시 태어난다.
악마의 하수인이 된 병사들을 여왕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다.
빠르게 들키긴 했지만 계약한 마족.
파이몬이 힘을 되찾는다면 왕국이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겠지.
세르브리아 여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모두 쓸어버려. 그리고 저기 성벽 위에 있는 녀석들도 전부 죽여 버려."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드리죠."
매혹적인 목소리로 파이몬이 답한다.
그리고 더 빠르게. 더 강한 마기가 흘러나오며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네가 말한 대로 진짜였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음... 일단 기다려보죠."
파이몬이 폭주하는 건 기다려야 좋으니까.
거기에 싸울만한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저 상태의 파이몬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건 좀비에게 물리러 달려가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전황을 지켜보는 강한윤의 옆모습을 이안이 쳐다보았다.
'...능력은 확실히 있는 사내인가.'
강한윤의 논리대로 사건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왕이 마족과 결탁했다면 세력 흡수를 하기 위해 레오리스로 온다.
그게 아니라면 올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건만 그건 아니었나.
이안 베르첼의 시선이 강한윤을 따라 성벽 아래로 이동했다.
레오리스로 끌고 온 병력들의 절반 정도를 흡수하고 나서야 파이몬의 폭주가 멈췄다.
파이몬은 검은색의 낙타를 타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먹어 치워라."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병사들이 레오리스로 달려든다.
'최대한 전투는 피하고 싶었는데.'
레오리스로 여왕이 오게 된다면 전투를 하는 건 사실상 확정이었다.
인간 병사들인 채로 싸우거나.
마족의 끄나풀인 것을 밝히고 싸우거나
레오리스로 온다는 것부터가 싸우려는 의도가 다분한 일이니 말이다.
"비엔. 작전대로 진행해."
어깨에 앉아있는 녀석을 톡 건드리자, 마나를 담은 포효를 내질렀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볼품없는 외침이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성벽 너머로 숨어있던 모두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강한윤. 저 녀석을 처리하면 되지?"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으... 끔찍하게 생기긴 했네요."
"... 더러워 보여요. 뭔가 묻을 것처럼 생겼어요."
"확실히 그렇긴 해요.
에우제니아, 노아, 세리스, 마리아, 마로스,라이라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갑자기 등장한 모두의 모습에 병사들이 당황한 모습이지만 칼을 겨누진 않았다.
성벽 아래에 공공의 적이 있었으니까.
이스타르님. 모두에게 축복을.
무릎 꿇은 세리스가 두 손을 모아서 기도를 올린다.
레오리스 모두에게 닿을 정도로 신성력이 넓게 퍼져나간다.
하늘에서 내려온 발키리가 그녀의 옆에 살며시 다가와 어깨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파이몬의 군세들이 레오리스르 향해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모두 전투 준비!"
신성력의 보호를 받는 병사들이 칼과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어어어!"
벌레가 우글우글 하는 것처럼 마기에 찌든 녀석들이 달려온다.
한참 뒤에 물러서있는 파이몬과 여왕.
저 녀석들을 죽이려면 파이몬의 군세를 다 뚫고 지나가야 한다.
"저희가 상대할게요!"
마리아와 마로스가 마나를 끌어올리자 공기가 전장에 한기가 몰아친다.
아이스 스피어
둘의 손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생겨난다.
그나마 강해보이는 녀석들을 단숨에 처리하고 나서 마리아가 마법을 사용한다.
블리자드
성벽 아래로 혹한이 찾아온 것처럼 모두가 얼어붙는다.
얼음 파쇄
마로스의 얼음 파쇄에 얼어붙은 적이 부서진다.
완벽한 콤보로 상대를 처리해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쓰러뜨려도 피아몬이 살아있는 한 적은 계속 등장한다.
"노아. 부탁할게."
"응. 알았어."
노아가 활을 당겼다.
신성력과 마나가 담긴 화살이 만들어진다.
암살
화살이 날카로운 예기를 띤다.
강화사격
활시위에 마나가 깃들며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 상태로 여왕을 조준하자 에우제니아와 라이라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리아, 마로스에게 당하고 있는 병사들의 머리를 밟고 앞으로 진격한다.
"이따위 걸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에우제니아가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파이몬이 소환한 해골기사가 똑같이 칼을 휘둘렀지만, 칼을 맞대나 그대로 부서져버렸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네."
그제야 파이몬이 움직인다.
다가오는 에우제니아와 라이라를 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마기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원형으로 둘을 감쌌다.
라이라가 단검을 역날로 쥐었다.
어렵다. 이 방어막을 부수기엔 기량이 역부족이다.
약간의 틈. 그 정만 만들면 된다.
파스스! 단검을 내려 찍자 방어막에 약간의 틈이 생겨났다.
"후우!"
에우제니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도끼가 그 틈을 파고들고 배리어의 구멍이 넓어졌다.
피융!
두 사람이 여왕에게 공격할 기회를 만들자, 노아는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저 멀리 날아간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화살은 여왕의 가슴에 명중했다.
"크흐윽...! 크헉..."
박힌 화살을 빼내려고 노력하지만, 화살을 잡은 손이 신성력에 불타고 있었다.
신성력의 여파로 온 몸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윽...흐윽..."
아무리 시도해도 역부족이다. 화살에 깃들어있는 신성력은 그녀를 좀 먹어 들어갔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여기서..."
여왕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는 몸을 움직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여왕의 헐떡거림은 천천히 느려진다. 결국엔 힘이 축 빠지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 남은 건 이 녀석이네."
방어막을 찢고 들어간 에우제니아가 도끼로 파이몬을 겨눴다.
강해보이는 상대다. 이 정도라면 싸울만 하겠지.
에우제니아는 웃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
"그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파이몬은 죽어가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강력한 에우제니아가 버프를 받았으니, 전투에 약한 파이몬이 버틸 리가 없다.
꿈틀거리는 파이몬에게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파이몬.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크큭...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파이몬이 비웃음을 담아 대답한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기대하고 있진 않다.
"너 정도의 서열이라면 타락한 땅에서 살아도 되지 않나? 왜 여기로 나온 거지?"
등급이 낮은 마족들이 기어 나와서 계약을 걸고 세력을 갖추는 건 자주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파이몬은 마족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영웅이다
이 녀석이 바깥에 나올 정도면 타락한 땅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궁금해?"
"응."
"내가 네 엄마냐? 궁금하면 알아서 찾아... 크크.."
"..."
파이몬은 패드립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허."
어이가 없네. 마지막까지 인성질이라니. 어떻게 보면 마족다운 결말이었다.
아니 근데 죽기 전에 정보 하나 알려주면 안 되나? 괜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마기로 오염된 주변을 정리하고 시체를 수습했다.
그 와중에 다른 병사들이 힐끔 힐끔 이쪽을 쳐다봤다.
몇 주 전만 해도 서로 검과 창을 겨누고 싸웠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같이 전장을 수습하는 중이다.
어색함이 감도는 전장이다.
적? 아니면 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이안 베르첼이 강한윤에게 다가왔다.
"이번에 도움이 없었다면 레오리스는 무너졌겠지. 고맙네."
"아뇨. 해야할 일을 한 겁니다."
"그런가."
그는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자의 돌을 준다고 했지.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말이야,"
"예. 그렇게 말했었죠."
"그게 지금인가?"
마치 이 모든 걸 계획한 거냐는 내용이 담겨있는 물음이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강한윤이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속내를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가. 뭐 상관없지. 나는 현자의 돌만 받으면 되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강한윤은 슬그머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동맹 제안서
"마족과 함께 싸운 팀이지 않습니까. 저의 제안은 어떻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