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116화
* * *
이안 베르첼의 인상은 날카로웠다.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인 만큼의 중년이지만, 눈빛에는 기세가 살아있었다.
확실히 부녀지간인걸까. 라이라를 힐끔 쳐다보면서 비교하니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저 인상과 기세를 라이라가 그대로 닮은 듯하다.
그의 뒤로 강인한 기세를 풍기는 집사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는 숫자만 해도 대략 30명. 그에 비해 여기는 라이라와 나뿐이다.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 모든 호위를 포기하고 나섰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이게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레오리스에서 공격을 오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해.'
교황의 시간 끌기도 이제는 약빨이 다할 때였다.
정상적인 수를 던져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자 이안 베르첼이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다가왔다.
"현자의 돌은 어디 있지?"
오자마자 대뜸 요구부터 말하는 이안 베르첼. 그는 마치 호감도 낮은 라이라처럼 행동했다.
"제가 현자의 돌을 들고 왔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은 협상을 할 뿐입니다."
애초에 현자의 돌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물건을 보여주지도 않고 현자의 돌이 있다는 걸 믿으라는 건가?"
위협을 하려는 것처럼 기사들이 칼을 꺼내들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 칼을 휘두르고 저를 죽이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현자의 돌을 얻을 기회는 사라지겠죠."
오히려 당당하게 나간다.
목숨을 담보로 줄타기를 하자, 이안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는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중이었다.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물건을 가져오겠습니까?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닙니까?"
당당함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도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건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믿겠다. 하지만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예. 그건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는데 의식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뭘 원하지?"
이제야 그가 협상할 생각이 들었나보다.
작게 미소를 지으며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동맹을 요구합니다."
"동맹?"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적이다."
"예. 그러니까 요구하는 겁니다. 동맹이 아니라면 잠시 휴전을 해도 됩니다. 길다면 한 달. 그 정도의 시간이면 되겠죠."
"..."
이안 베르첼이 침묵한다. 이쪽의 요구가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게 전부인가?"
"예. 그게 전부입니다."
현자의 돌은 그와의 전투를 피하기 위한 구실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다면 사티라를 통해서 북부와 중부를 쭉쭉 밀고 나갈 가능성이 생기니까.
'그것뿐만 아니지.'
잘하면 이번 협상으로 인해서 북부 전체를 먹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강한윤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이안 베르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의 휴전을 원한다고?'
그렇게 말하지만 그게 전부일리가 없다.
하지만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그 이상의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떤 속내를 가지고 이런 조건을 제시한 건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한 달의 여유를 준다.'
그것으로 전황이 뒤바뀌진 않는다.
레오리스의 병력까지 흡수해서 전력이 강해진 군대를 푸니아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상태로 밀어 붙인다면 그들이 안다이얄까지 후퇴해야하는 건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한 달.'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안 베르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거래는 항상 그렇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가치를 이쪽이 파악하지 못할 때다.
특히 오드웰 연합군의 날카로운 작전을 세운 강한윤이지 않은가.
이안 베르첼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 받아들이지. 현자의 돌은 바로 주는 건가?"
"아뇨. 일이 끝난 뒤에 드리겠습니다. 잘 이행되는 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런가."
이안 베르첼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정도면 기다려줄 생각이 있었다.
마탑이 현자의 돌을 만드는 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으니까.
"거래를 하도록 하지."
둘은 계약서 2장을 작성해서 서로 나눠가졌다.
마나로 지장을 찍은 것까지 완벽하다.
흠잡을 데 없는 계약서를 나눠가진 뒤에 강한윤은 작게 웃었다.
"한 달 뒤에 보겠습니다."
현자의 돌이 없긴 한데 나중엔 만들어낼 수 있다.
한 달 뒤에 현자의 돌을 건네주기만 하면 완벽하다.
이대로 조용히 빠져나가기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강한윤이 뒤를 돌았을 때, 목덜미에 무언가가 닿았다.
스윽.차갑고 서늘하다.이 감촉은 이미 알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확인하니 검이 목에 닿고 있었다.
"어딜 멋대로 가려는 거지?"
"계약이 끝났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계약서가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누군가가 보증을 서야겠지."
그 대상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목에 닿아있는 칼날이 나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을 한다면 목이 잘리겠지.
혹시나 해서 라이라를 쳐다봤지만빠져나갈 방도가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상태창을 확인하니 검을 겨누고 있는 자도 소드마스터의 실력자다.
망할.
"라이라. 이거 가지고 돌아가. 그리고 전부 계획대로 해."
품에 넣었던 계약서를 그대로 라이라에게 전달한 뒤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제야 목에 닿고 있던 검을 거두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는데.
목에 검이 닿는 건 언제 겪어도 적응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이를 해친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라이라는 눈을 흘긴 다음에 공기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기사들의 사이로 걸었다.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데 어떻게 할까.
여기서는 그들을 따라서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예상한 일이라는 걸까.
"가죠."
강한윤은 그들을 따라 레오리스를 향해 걸었다.
***
"포로 생활도 나쁘지 않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대우가 괜찮다.
라이라가 했던 말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대우를 이만큼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자유를 줬다.
성을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안주인의 침실이나 별채로 들어가는 것은 호위하는 병사가 제재했지만,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 라이라가 사용하던 방까지 말이다.
'레이네.'
라이라의 옛날 옛적의 이름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공주님처럼 풍요로운 방에서 생활을 했었구나.
그녀의 침대는 부드럽고 푹신하다.
혹시나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냄새도 맡아봤지만, 이불은 빨래 비누의 상쾌한 냄새만 가득했다.
이건 좀 아쉽네.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장에 꽂혀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뭐 재밌는 게 없나.
라이라에 관련된 내용은 게임에서 나오질 않으니 여기에 나오는 것들은 전부 처음이다.
그렇게 책장을 둘러보는데 허름한 양장본이 눈에 띄었다.
딱 중앙에 꽂혀있는 책을 뽑아들자 생각보다 묵직하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레이네 베르첼 이라고 작게 쓰인 글씨였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어린아이가 쓴 것치고는 단정한 글씨로 글이 적혀 있었다.
27년 2월 16일
오늘은 귀족 예절 수업을 받고 아버지와 놀았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한바탕했더니 피곤했다.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어서 책을 읽었다.
백마 탄 왕자님의 이야기였는데 생각보다 즐거웠다.
나도 언젠간 이런 왕자님과 결혼을 할까? 궁금하다.
"어..."
라이라의 어린 시절 일기가 적혀있었다.
이때는 완전히 순수함 그 자체였네.
나중에 라이라의 앞에서 읽어주면서 놀려주도록 하자.
인벤토리에 일기를 집어넣은 뒤 다른 재밌는 책을 찾으려 했지만, 꼬마 라이라의 일기보다 재밌는 건 없었다.
아쉽네. 라이라를 더 놀려줄 수 있을 텐데.
"강한윤 경. 영주님이 부르십니다."
라이라의 방 구경은 병사의 부름에 멈추게 되었다.
영주의 집무실로 향하자 그곳엔 내정업무를 보고 있는 이안 베르첼이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의 앞에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펜을 내려놓은 이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강한윤을 바라보았다.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형식상 한 말이었다.
진짜로 저택을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니라는 의미가 아니었건만.
이 사내는 정말로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원하시는 대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걸 원한 적이 없다."
"그럼 뭘 원하십니까? 별채와 관련이 있는 내용을 원하십니까?"
"말조심하게.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는 군."
그가 눈을 잠깐 흘겼다.
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도 제 제안을 들어보시겠습니까?"
포로로 잡혀온 지 벌써 나흘 차다.
그동안 강한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연합군에 합류를 하는 게 어떠냐.
연합군의 물자로 용병을 사고 싶다.
바깥에 나갈 수 있게 하는 대신 정보를 팔고 싶다.
그에게 질릴 정도로 얘기했지만 들은 척도 하질 않았다.
까악. 까악. 하고 바깥에서 까마귀가 운다.
우중충한 날씨까지 겹치니 무언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강한윤은 창밖을 바라보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왕이 마족과 손을 잡았더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도심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깥의 까마귀들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왕이 레오리스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라고.
이제는 간을 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협상을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여왕은 무조건 마족과 손을 잡았을 테니까.'
욕심이 많은 그녀다. 특히 이렇게 불리한 전황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
게임에서도 매번 불리한 양상이 되면 마족과 계약을 한다.
마족과 계약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니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방법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군대! 군대!"
까마귀가 소리친다. 비엔의 하수인들이 이런 식으로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여왕의 군대가 이 순간에도 가까워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여왕의 군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아느냐보단 어떤 정보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자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지?"
"의심이 많으시군요. 장인어른."
"난 자네의 장인어른이 아니네."
"이제 곧 될 겁니다. 장인어른."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답하자, 그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겁도 모르고 날뛰는 군."
버릇없는 이 녀석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지만, 딸의 얘기를 떠올랐다.
한 편으로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모든 얘기가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왕궁에 등장한 마족.'
그것만으로도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여왕이 마족과 손을 잡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거기에 여왕이 군대를 이끌고 레오리스 쪽으로 오고 있다면 상황이 대략 맞아떨어진다.
여왕이 레오리스로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중부로 진출한다면 수도인 가프라에서 레오리스까지 올 이유가 없다.
다른 영지에서도 중부로 가는 건 쉬우니 말이다.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장인어른."
여기에서 여왕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똥은 전부 푸니아로 향하게 된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으니 결의를 담아서 말했다.
"난 자네 같은 사위를 둔 기억이 없다네."
이안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고지식한 여왕과 능글맞은 적군. 어느 쪽을 믿을까 하고 말이다.
*
"문을 열어라!"
굳게 닫힌 문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외쳤다.
세르브리아 여왕의 목소리가 산맥 너머로 울려퍼진다.
문이 서서히 열려야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까득.
세르브리아는 작게 이를 갈았다.
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인데 감히 무시해?
"문을 열어라! 내 명령을 무시하는 거냐!"
또 다시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리스 안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들려오지 않는다.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기만 할 뿐,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읏... 이안 베르첼...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그녀가 불쾌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뒤 크게 소리쳤다.
"모두 레오리스를 향해 검을 들어라!"
막아서는 것은 전부 부수고 죽일 생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