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4화
* * *
푸니아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폐광산.
오히려 에리엘이 머무르고 있는 하이벤 산맥 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크르르르르"
드래곤이 고개를 돌리자 가슴팍 쪽에 깊은 자상이 보인다.
날카로운 칼 같은 것으로 다친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 깊다.
상처가 회복되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무언가가 회복을 방해한다.
신성력.
상처에 남아있는 신성력이 드래곤의 상처에 스며들어있었다.
마기를 지니고 있는 블랙 드래곤 특성상 신성력에 약할 수밖에 없다.
블랙 드래곤 프리엘의 거대한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크르르 인간들 나의 잠을 깨운 이유가 뭐지?"
아래를 내려다보자 인간들이 보인다.
적은 수의 인간들. 하지만 느껴지는 힘이 약하지 않다.
거기에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신성력을 가진 이들이 셋이나 있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길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승리의 길이 보이질 않는다.
"말하라. 인간."
최대한 강압적인 분위기를 프리엘이 만드려고 했지만.
'뭐냐 얘.'
프리엘의 몸 상태도 온전하지 않은 건 뻔히 보인다.
이 멤버라면 프리엘이 정상이었어도 쉽게 이겼을 텐데.
협상을 시도하고 시간을 끌어보려는 모습에 강한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원하는 게 있긴 한데. 그걸 줄 수 있나 모르겠네."
"뭘 원하지? 금은보화, 보물, 유물, 정보 뭐든지 줄 수 있다."
"드래곤의 심장인데."
강한윤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자, 프리엘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협상 결렬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깨닫자마자 전투를 하기 위해 날개를 폈다.
크르르...
아프다. 아프지만 프리엘은 전투를 이기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브레스
입에 마기가 모인다.
단숨에 브레스가 완성되고 검은색 불길이 모두를 뒤덮었다.
이스타르님 도와주세요.
그때, 세리스의 기도가 울려퍼졌다.
그녀에게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며 빛이 모두를 감쌌다.
발키리가 나타나면서 포근하게 감싼다.
브레스가 날아오는 것을 본 발키리는 배리어를 시전했다.
쩌저적 쩌적
단숨에 배리어가 금이 가고 부서질 정도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탓! 에우제니아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버프를 받아서 그녀의 마나는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다.
커다란 전투 도끼위로 오러가 생겨났다.
푸른색 빛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그 위로 노란색의 물결이 흐른다.
반대쪽으로 향하는 라이라도 단검을 치켜 올렸다.
붉은색의 오러. 은은하게 타오르는 노란색의 스파크.
쏟아지는 브레스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프리엘을 향해 달린다.
피슝!
노아는 신성력이 담긴 마나화살을 만들어내서 쏘아낸다.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군더더기 없는 공격 세레를 퍼붓는다.
마리아와 마로스도 프리엘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얼음으로 주위를 막아버리고.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하는 느낌으로 한기를 쏘아내고 있었다.
세리스는 하던 것처럼 모두에게 신성력 버프를 주고, 바깥에 신성력을 흩뿌린다.
공간을 가득 메운 신성력이 프리엘의 능력치를 떨어뜨리는 중이다.
"크르르르 덤벼라!"
공격을 막아내면서 거세게 울부짖는 프리엘.
검은색 안광이 소름끼칠 정도의 살기를 담고 있었지만.
쿠웅
결국엔 프리엘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콜록.. 콜록.. 어우."
거대한 덩치가 바닥에 엎어지니 흙먼지가 일어난다.
정말로 죽었나 확인하니 바닥에 검은색 피가 흘러나왔다.
마기가 가득한 건지 바닥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걸 담아갈 수 있으려나.
혹시나 해서 자그마한 플라스크에 피를 담으려고 시도했지만
치이이익
플라스크가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린다.
드래곤의 피가 연금술에 좋은 물질인 걸 알지만 마기가 너무 짙다.
역시 마기는 신성력에 쥐약이라는 걸까.
신성력으로 정화를 하려 시도하니 츠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증발해버렸다.
남은 것은 드래곤의 시체뿐이었다.
"이걸 연금술에 쓰게요?"
세리스는 드래곤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마기에 절어서 사용할 곳이 마땅히 없어 보이는 시체다.
연금술에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이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은 전부 사용자에게 끔찍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쓸 생각이지."
여기 말고는 드래곤의 심장을 얻을 곳이 없다.
근처에 드래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해진 드래곤이 아니라면 잡기 쉬운 것도 아니다.
거의 최종 보스 급으로 강했으니까.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들이다.
"성수를 이용해서 중화시킬 거야."
이것도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사용하면 녹아내리겠지만, 녹아내리기 전에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조합법대로 아이템을 넣으면 어떻게든 현자의 돌은 완성될 테니까.
"그럼 시체를 분해해보자고."
강한윤은 드래곤의 심장을 꺼내기 위해 팔을 신성력으로 감쌌다.
***
"혹시 내 결정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나요?"
세르브리아의 한마디에 회의실 내부가 침묵에 잠겼다.
괜히 리스크가 있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신성교단과 척을 진다는 것 자체가 섣부른 선택일 수도 있다.
신성교단 뿐만이 아니라 동부의 정화성전교단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여왕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침묵을 지켰다.
목숨이 위험하다.
저렇게 칼을 갈고 말하는 여왕이라면 반드시 누구 하나에게 문제개 생긴다.
죽이진 않아도 유배를 보내거나 '정신교육'을 명목으로 고문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처리한다. 그게 저 아리따운 여왕의 본성이었으니까.
한편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전쟁으로 장사를 하는 이들. 그들은 전쟁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전쟁은 오랫동안 유지되고 무기와 물자를 팔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기회였다.
신분 도약의 기회.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신분이 올라가거나.
돈을 벌어서 영향력을 높이거나.
둘 중 하나를 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그렇게 모두 침묵했고, 여왕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죠. 우리는 신성교단의 속국이 아니니까."
그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들어줄 필요는 없다.
마족이 적이라고 한들, 진짜 적은 눈앞에 칼과 창을 들고 쳐들어오는 연합군 쪽이다.
마족이 있다는 증거를 들이대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연합군의 공격이었다.
"연합군을 쓰러뜨려야 해요.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
"예 맞습니다."
모두가 동조하는 것으로 회의가 끝났다.
"후우..."
회의실에서 먼저 나온 여왕은 쉬고 싶다는 생각에 본채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에 목욕이라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여왕님."
하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온 인물이 있었다.
이안 베르첼. 북부에서 가장 넓은 전선을 맡고 있고, 가장 큰 상인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자.
"무슨 일이지? 이안 베르첼 공작. 혹시 나의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이안 베르첼도 동의했다.
연합군과의 전쟁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조건 그래야 했다.
하지만 가장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만약 신성교단과 직접적으로 부딪힌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성교단과의 분쟁. 그건 원치 않았다.
같은 인간끼리 싸우려고 전쟁을 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그들이 나쁜 이들도 아니다.
이안 베르첼도 신성교단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단이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칼을 겨누는 건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분열이다.'
신성교단의 신자. 그리고 신자가 아닌 자.
두 가지 파벌로 나뉘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들을 제압하면 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응한다면 벌을 주는 수밖에 없겠지."
벌을 준다니.
신성교단의 사람들을 죽이라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왕의 말에 담긴 속내를 읽어낸 이안 베르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렇게는 안 된다니. 이안 베르첼 경. 정신이 나간 건가? 전쟁에서 지고 싶은 건가?"
"당연히 이기고 싶습니다."
카브란 산맥까지 진격해야하는 이유가 있는 한.
이안 베르첼은 계속해서 이기고 싶었다.
"하. 그런가요?"
그에게 다가온 세르브리아의 얼굴은 험하게 구겨진 채였다.
그녀는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신성교단의 팔라딘과 기사들을 앞세워서 공격해온다면 어떻게 할 거지? 제발 비켜달라고 애원할 거죠?"
"그건.."
그들을 최대한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쪽으로 한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그런 행동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써서라도 신성교단과의 직접적인 부딪침은 피해야 한다.
그게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하. 그래서 신성교단과는 싸울 수 없다 이건가요?"
"신성교단과 싸운다면 득보단 실이 클 겁니다."
이안 베르첼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를 한참을 쳐다보던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뒤돌았다.
"이안 베르첼 경.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책임도 당신이 져야겠지요. 레오리스를 제외한 지역의 지휘권을 박탈하겠어요."
말을 툭 던지듯이 내뱉고서 여왕이 떠나간다.
지휘권 박탈.
그것은 레오리스의 병력만으로 계속해서 이겨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가능할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현자의 돌을 얻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던 그때,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안 베르첼님 도움이 필요해보이시군요."
그의 목소리에선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강한윤은 드래곤의 심장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연금술에 사용할 부위니 상하면 안 된다.
[드래곤의 심장]
마기를 품고 있지만 시스템으로 보니 정상적인 아이템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상태라면 현자의 돌은 만들 수 있다.
칼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라이라를 바라보았다.
"라이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 대신에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뿜는다.
조금 민감한 내용의 질문이라 얘기해도 되나 망설이자, 그녀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아버지는 왜 현자의 돌이 필요한 거야? 알고 있지?"
라이라의 정보력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모두의 시선이 라이라에게 쏠렸다.
"얘기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
"아뇨. 언젠가는 얘기하려고 했어요."
라이라가 바닥에 담배를 떨어뜨린 뒤, 발로 비볐다.
"그것 때문에 제가 가문을 나온 이유기도 하니까요."
라이라는 작게 심호흡했다.
어린 소녀였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레오리스의 저택에서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예쁘고.. 심성이 고운 분이었지만 세상은 어머니를 가만히 두지 않았죠.
그렇게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가 깊은 실의에 빠져있었을 때 어디선가 소문이 들려왔어요."
"그게 현자의 돌이야?"
"네."
라이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돌은 만능이어서 죽은 어머니를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어요."
저택의 별채의 한 구석의 방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안치되어있다. 시체를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급속 냉동 되어있는 어머니의 시체가 말이다.
라이라는 그 모습을 떠올린 뒤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고 싶어 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