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109화
* * *
화르르륵 보티스의 시체를 신성력을 이용해 태운 뒤 마르고엔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단 목표한 마족 영웅. 악마들을 전부 죽였으니 발걸음은 가볍다.
하지만 아직도 일이 남아있었다.
마르고엔이 원상태로 돌아갔는지 확인해야 한다.
혹시나 남은 마족이 있다면? 그 녀석들도 처리를 해야겠지.
하늘에 노란색으로 신성력이 빛난다.
세계수가 주변을 정화하려는 것처럼 신성력을 흩뿌리고 있지만, 살아남은 마족이 있을 수도 있다.
귀찮은 일이 없게 저거에 다 처리됐으면 좋겠는데.
오크 영웅 바르바고프 덕에 일처리가 더 빨라졌지만,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움직였더니 피곤하다.
빨리 일처리를 끝내고 에우제니아의 고향 마을에 놀러가고 싶었다.
일이 끝난다면 그곳에 하루 정도 들릴 생각이었다.
"크흐흐! 호전적인 건 좋지만 내 검은 자비가 없다네!"
"인간 치고는 기개가 있군. 하지만 나의 쌍 도끼에는 무조건 패배하게 되어있다."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
보티스를 쓰러뜨렸던 바르바고프는 헨리크 공작과 기싸움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은 듯이 허릿춤에 있는 쌍도끼를 매만졌다.
바르바고프가 에우제니아의 아버지였다니. 의외네.
닮은 건 강하다는 것 뿐. 그 외에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보티스를 여기서 잡아서 다행이네."
"그래. 그 마족새끼가 튀었다고 했을 때 자꾸 신경 쓰이더라고."
에우제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이 도망쳐서 피해가 확산되는 것도 좋진 않다.
거기에 고향이 엉망이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사령관님의 고향이라.. 궁금하긴 하네요."
노아의 말대로 궁금하긴 하다.
오크 부족이 간단한 건물을 지어놓고 사는 상남자 종족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가게 됐네.'
여기까지 온 거 에우제니아의 고향을 가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고르미엔으로 다시 왔다.
서쪽 문을 통해서 들어가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민들이 보인다.
"으으..."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엘프.
그들을 돕기 위해서 다가갔다.
"하아...읏..."
신성력을 불어넣어주니 숨소리가 편해진다.
세리스와 노아도 마찬가지로 신성력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있었다.
이미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 행동한다.
'생각보다 빠르게 복구가 되겠네.'
마족들에게 피해를 입은 고르미엔이지만,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아."
마기에 침식돼서 힘들어하는 인원들을 치료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모두를 치료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의식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세계수 안으로 이송했다.
신성력으로 치유받다 보면 언젠간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둡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별이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떠있었다.
"오늘 일이 많아서 그런지 일이 힘들었네요."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보고 있으니 세리스가 다가왔다.
가슴을 어루만지며 신성력을 불어넣어준다.
[칭호 세계수의 수호자]
세계수의 근처에 있으면 회복속도가 50% 증가합니다.
이 칭호 덕분에 회복속도가 빨라졌지만, 세리스가 주는 신성력에 비하면 택도 없다.
"...여기에 누워요."
그녀가 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린 뒤 자신의 쪽으로 당긴다.
부드러운 허벅지에 누우니 하늘보다는 세리스만 보인다.
그렇게 누워있으니 세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열심히 한 상을 주려는데 괜찮나요..?"
"당연히 좋지."
붉게 달아오른 세리스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톡 코가 가볍게 닿았다. 눈을 감고 기다리니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게 닿는다.
입술의 감촉이 반대로 느껴지니 새롭다.
쪼옥 가벼운 키스지만 만족할 만한 포상이었다.
"성녀님의 키스는 언제나 야하네요."
"정말... 강한윤. 놀리지 마요. 이렇게 만든 게 누구인데요."
세계수 아래에서 이러고 있으니 좋다.
눈을 감고 즐기고 있으니 에리엘과 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라고 믿었더니 벌써 하고 있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인 건가."
"그러게요."
에리엘과 노아가 놀리듯이 말하니, 세리스의 얼굴이 푹 익은 것처럼 빨개졌다.
"저... 그... 그런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어쩌다보니.."
풋풋한 세리스의 반응에 에리엘과 노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여동생을 보고 있는 언니 같은 모습이다.
에리엘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손짓했다.
작업이 끝났으니 이동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에우제니아의 고향. 그 곳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
마차를 타고 고르미엔에서 빠져나왔다.
서쪽에 위치한 마을까지는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좋네."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등에 탄 채로 날아가고 있었다.
바르바고프까지 마차에 타기엔 공간이 부족했으니까.
베아트리스만 마차에서 내려서 날아가면 쓸쓸하기도 하고.
이왕이면 좀 더 편하게 가라고 강한윤도 같이 이동했다.
"오크 부족에 초대받는 건 처음이에요."
상기된 베아트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개 죽지를 간질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기대하고 있는 걸까.
"으흣! 간지러워요."
아마도 날개를 건드려서 그런 것 같다.
"초대받는 건 처음이라고?"
"네. 오크 부족은 조금 폐쇄적이거든요. 세계수를 제외하고 개방적인 엘프들에 비하면요."
"흐음..."
'폐쇄적인 오크 부족이라.'
가만 보면 종족마다 특성이 있었다.
천족은 등에 아무나 태우지 않는 특성.
엘프는 세계수를 우선시 하는 특성.
게임에서는 나오지 않는 특성들 말이다.
오크는 폐쇄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에우제니아를 보면 생각보다 폐쇄적이진 않던데."
"그녀는 특별하니까요."
"뭐가? 강한거?"
"아뇨. 폐쇄적인 오크들 사이에서 그만큼 개방적인 오크는 없어요."
그런가.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그랬다.
인간이라고 편견을 갖지 않고 받아들였다.
오크는 털털하고 쿨한 이미지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그럼 반발도 심했을 텐데."
"심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걸 증명했잖아요.
북부의 사령관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영토는 넓어지고.
그것만으로도 오크들 사이에서 입지가 늘어났을 거예요."
물론 그녀 혼자서 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서 보좌하고 실제로 작전을 짠 건 강한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건 그녀의 능력이었다.
"대단하네."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나니 궁금하다.
폐쇄적이라니 얼마나 폐쇄적인 걸까.
아래에 불빛이 보이는 마을이 하나 있었다.
마차도 서서히 멈추는 것을 보아하니 저곳이 목적지인가보다.
'게임에서는 그냥 평범한 마을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베아트리스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외부인... 바르바고프님! 거기에 에우제니아까지!"
"손님이다. 문을 열어라."
"예! 알겠습니다!"
반응만 보면 평범한 마을 같다.
마법처리가 된 문으로 굳게 닫혀있고 오크가 자경단처럼 지키고 있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문이 열리고 마을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보이고 근육이 빵빵한 오크들로 가득하다.
경계가 서려있는 눈빛과 행동이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초대받은 손님이라고 얘기를 들어도 이런 반응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축제가 시작됐다.
횃불로 마을을 밝히고 갖가지 음식들을 준비해온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과 술이 차려지고 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유일하게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한 잔 할까? 모두 내가 한 잔씩 따라 줄게."
에우제니아가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잔에 술이 채워질수록 강한 술냄새가 확 올라온다.
도수가 강한 술임에 틀림없다.
"... 딱 봐도 센 술인데?"
"어차피 내일 일정도 없잖아. 마시고 취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술을 따라주던 에우제니아는 마로스의 잔은 채우지 않았다.
"넌 어른이 되고나서 마셔."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딱 어른이 된 정도의 나이인데.
마로스는 너무 어리지. 술을 마시기엔 말이다.
후우.
심호흡을 한 뒤에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술.
뜨겁고 속이 불타는 것 같다.
숨을 내쉬니 술 냄새가 가득하다.
"어우..."
"어때? 마실 만해?"
"아니 아닌데."
도수가 너무 세다.
한 잔 마셨는 데도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래? 일단 한 잔 더 해."
에우제니아는 또 다시 술잔을 채웠다.
"맨 정신으로 있기에는 즐거운 게 남아있거든."
"즐거운 거라니."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마을 가운데의 공터가 있다. 관리가 되어있는 공간에 무기가 진열 되어 있다.
딱 봐도 대련장 혹은 연무장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크하하! 이런 장소가 있다니! 싸울 맛이 나는 군!"
"역시 싸울 줄 아는 무인인가! 그래 좋다! 힘을 보여주어라!"
검을 꺼낸 헨리크 공작과 쌍 도끼를 쥔 바르바고프.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려했다.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무조건 헨리크 공작이 이기지 않을까.
아무리 바르바고프가 강하다한들 소드마스터 하급과 중급 사이에 있다.
헨리크 공작은 중급에서 더욱 성장했으니 격차가 날 거다.
채애앵 콰과과 검과 도끼가 부딪힌다.
저기에 있는 둘은 진심으로 즐거운 눈을 한 채로 싸우고 있었다.
마나가 부딪치고 부서지며 푸른빛을 세상에 흩뿌린다.
밤에 보니 생각보다 아름답네.
그런 감상을 한 채로 술을 마셨다.
"잘 싸우네. 그래도 격차가 확실하긴 하네. 아버지가 힘도 못쓰잖아."
"아버지! 쪽팔리게 지면 오늘 집에 못 들어오게 할 거에요!'
"뭐?! 그럼 안 되지!"
옆에 있는 에우제니아도 저 둘의 싸움을 즐기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을까.
에리엘과 노아는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베아트리스는 오크 부족의 털옷을 신기하다는 듯이 살펴보고 있고.
마리아와 마로스는 고기를 먹고 있다.
마리아는 술을 좀 마셨는지 평소보다 얼굴이 붉다.
라이라는 어느새 왼쪽에 앉아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까아아악! 맛있다!"
비엔도 좋다는 듯이 술을 마신다.
저 새끼는 왜 술을 마셔. 까마귀인데 술을 마셔도 돼?
술잔을 날개로 붙잡고 마시는 폼이 무슨 아저씨 같다.
"어우... 잠깐만..."
취기가 확 올라온다.
얼굴이 화끈화끈거리고 세상이 어지럽다.
눈이 알아서 감기는 게 벌써 한계였다.
"마신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자러가게?"
"응."
다른 오크들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구석에 위치한 오두막 같은 건물이다.
"하아."
숨을 내쉬니까 알콜 냄새가 가득하다.
베개에 머리를 대니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세 번. 어지러워.
그렇게 누워있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구지. 누가 들어온 걸까.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불을 살며시 걷어서 품속으로 들어왔다.
스륵 스륵 이불에 옷이 스치고 상대방의 손이 은근슬쩍 바지로 향했다.
누구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렇게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몸을 원해오는데. 안 할 이유가 없다.
비몽사몽. 눈을 감은 채로 상대를 당겨왔다.
허리를 끌어와 안은 다음 가볍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과 쪼옥 쪼옥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약간의 저항이 있지만 곧바로 순응하고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다.
세리스일까. 세계수 아래에서 그렇게 끝내기는 애매했지.
츄웁 츄웁 이제는 혀를 섞는 키스를 했다.
완전히 몸을 밀착한 채로 체온을 나눴다.
몸에 닿는 살의 감촉을 느꼈다. 엉덩이를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졌다.
상대의 몸이 왠지 낯설다. 엉덩이도 만져본 느낌이 아니고, 가슴은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이즈였다.
한 손에 넘칠 정도의 크기가 아닌 손에 가득 찰 정도의 적당한 사이즈.
...
천천히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그곳엔 녹은 표정을 한 마리아가 있었다.
"깨어나셨네요... 제가 더 좋은 거 해드린다고 했었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