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07화
* * *
세계수가 타락하고 있다.
엘프들의 우상이자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세계수가 검게 물드는 중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끄트머리부터 잎이 검은색으로 변한다.
그 모습을 본 에리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아프다.'
에리엘은 세계수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세계수로부터 미약한 사념이 흘러오고 있었다.
세계수의 고통이 전해져오고 있다.
"읏..."
노아도 사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만큼 더욱 영향이 큰 걸지도 모른다.
에리엘은 그녀를 힐끔 쳐다본 뒤에 고개를 돌렸다.
내일 싸우려면 오늘 휴식을 취해야 한다.
잠을 자기 위해 모닥불을 피울 생각이었다.
"강한윤 내일 계획은 어떻게 되지?"
"별거 없습니다."
세계수 정화를 끝마친 뒤에 남은 마족을 족치고 정화하면 된다.
"일단은 세계수부터 구해야겠죠."
"역시 나와 생각이 겹쳤군."
에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를 먼저 구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세계수는 그냥 커다란 나무가 아니니까.'
커다란 만큼 광합성을 많이 하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아니다.
세계수에는 정화작용이 존재했다.
마기를 마나로 정화시켜주는 공기청정기의 역할을 한다.
지금 공기에 마나 대신 마기를 띄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마기에 침식당하는 동안에는 세계수가 제 역할을 못하니까.
세계수를 먼저 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완전히 타락해버리면 그것도 까다로워.'
그렇게 되면 세계수는 공기청정기가 아니라, 더러운 공기를 내뿜는 노후디젤차량이 된다.
마나를 흡수해서 마기로.
정 반대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게 타락한 세계수였다.
"내일 일어나면 바로 세계수로 향합니다."
그래야 한다. 그게 최선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에 들었다.
"..."
하지만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잠에 든다면, 누군가는 불침번을 서야 하니까.
강한윤은 에리엘과 함께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심심하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걸 구경하고 있으니 더욱 심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모닥불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
맞은편의 에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강한윤. 입으로 빼줬으면 하는 건가? 얼굴 표정이 그렇군."
무료함이 가득 담긴 표정인 건 스스로 알지만, 펠라로 이어지는 이유가 뭘까.
에리엘의 분홍색 입술에 시선이 간다.
저 입에 펠라를 받는다면 확실히 기분 좋겠지.
"아니 그것보다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에서 섹스는 위험하다. 강한윤."
에리엘의 시선이 자고 있는 이들에게 향한다.
이 곳에서 섹스를 하다간 들키기 십상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섹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내일 있을 전투에서 도움이 될 만한 실험을 해야 하니까.
최면과 매혹을 거는 제파르를 쉽게 이기는 꼼수를 떠올렸다.
"일단 이것부터 먹어보자 에리엘."
강한윤은 인벤토리에서 상태 이상 물약을 꺼냈다.
*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고르미엔으로 향했다.
크다.
고르미엔에 가까워질수록 세계수가 커진다.
어제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세계수를 본 감삼평은 그랬다.
루드밀라에 있는 세계수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점점 공기가 매캐해지고 있었다.
"큿.."
세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옷소매로 코를 막았다.
신성력으로 마차를 보호하고 있지만, 마기가 띄고 있는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모두가 괴로운 얼굴을 한 채로 숨을 쉬었다.
"거의 다 왔어요."
세계수 너머로 나무와 함께 지어진 커다란 성이 보인다.
성에 나무가 자라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라난 나무 위에 성을 지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성이다. 실제로도 높은 방어력과 내구도를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저 안에 한 놈이 있을 테고 나머지는... 세계수에 한 놈.'
남은 마족은 둘. 대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녀석은 세계수를 타락시키기 여념이 없는 놈이고.
한 녀석은 세력을 관리하는 데 특화된 내정 영웅이니까 안전한 곳에 숨어있겠지.
강한윤은 움직일 동선을 생각한 뒤 주변에 마차를 세웠다.
"걸어가야 해요."
모두가 마차에서 내렸다.
성벽은 견고하고 문은 닫혀있다.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목이 끌리는 행위를 할 이유는 없다.
몰래 들어가서 일처리를 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스륵 라이라가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간이 사다리가 내려져왔다.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자 세계수가 더욱 크게 보였다.
'대략 40% 정도 인가.'
세계수의 잎이 검게 물든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은 양호하다. 50%가 되기 전에만 처리하면 된다.
강한윤은 소리를 죽여서 이동했다.
"주변이 조용하네요."
"처음에 봤던 마을처럼 모두 조종당하고 있겠지. 봐."
에우제니아가 가리킨 곳에는 주민들이 보였다.
엘프와 오크 그리고 수인들.
그들은 넋이 나간 채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거기에 약하게 마기를 띄고 있었다.
"모두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어요."
세리스는 지금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공기 중의 마기 농도가 짙다.
미족들은 고르미엔의 중심부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마기에 오랫동안 접촉한 주민들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잠식.
마기에 잠식당하면 영원히 의식을 잃으며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체내의 마나를 전부 마기로 변환시키는 몸으로 변해버린다.
잠식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세리스는 주먹을 쥐었다.
여기의 모두를 빨리 원상태로 돌려놔야한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고 말이다.
"세계수를 지키는 이들도 없네요."
베아트리스는 세계수 주위를 확인했다.
세계수를 지키는 병력과 천족들도 없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천족이 이상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령들도 없고.'
세계수가 공격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빛의 정령들도 보이질 않는다.
어두컴컴한 내부를 지나서 세계수의 중심으로 향했다.
"읏..."
"노아 괜찮아?"
"아니.. 그냥 머리가 아파서."
노아는 눈을 찌푸린 채로 답했다.
세계수의 고통이 계속해서 전해져온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빨리 처리해야겠네."
노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이쪽이 아파온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면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디메리트로 작용하고 있다.
중심부로 빠르게 향하기 위해서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등에 탄 채로 이동했다.
어두컴컴하던 통로를 지나자, 보라색 불빛이 보였다.
불길한 기운이 내포되어있는 불빛.
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마족이 기다리고 있겠지.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등에서 내린 뒤 에우제니아에게 다가갔다.
"에우제니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으라고?"
"응. 그게 도움이 될 테니까."
오히려 그녀가 이 안에 들어간다면 방해만 된다.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에우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응. 그리고 비엔 너도."
"까악! (왜!)"
"그럴 이유가 있다니까."
굳이 설명할 시간은 없다.
비엔과 에우제니아만 통로에 남은 채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보라색 불빛으로 가득한 세계수 내부.
"손님인가? 아니, 아닌 것 같은데."
세계수의 기둥에 손을 대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입고 있는 붉은 갑옷은 마치 피칠 갑인 것처럼 보였다.
불길함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한 그가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손님이 아니라 맛있는 식사였군."
그가 음흉하게 웃었다. 특히, 이쪽의 여자들을 보면서 말이다.
"여자라는 건 참 쉽지. 그냥 한 번 스윽 만져주면 좋아 죽는 족속이야."
그가 손을 공중에 휘젓는다.
마치 여성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사랑에 빠지기도 참 쉽지."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멍청한 녀석들.
이 녀석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제파르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는 모든 여성들을 함락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여성들과 눈을 마주치면 반하게 만들 수 있고.
대화만 한 번 하더라도 발정을 나게 만들 수 있다.
배에 손을 대기만 해도 불임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제파르였다.
'여자를 데리고 온 걸 후회해라.'
제파르는 상대를 둘러보았다.
남자 둘에 나머지는 전부 여성.
거기에 여성들은 전부 강자들이었다.
남자 둘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는 전력이다.
사아아
마기에 닿은 여성들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매혹과 최면이 걸렸다는 증거.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 제파르는 웃음을 흘렸다.
여기에서 간단한 명령으로 남자부터 죽여볼까.
그 뒤에 상등품의 여성들을 맛봐도 늦진 않을 테니 말이다.
"적을 죽여라."
제파르의 명령에 여성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수염이 덥수룩한 남성이 당황해하며 외쳤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왜 칼을 겨누냐며 당황하고.
싸워야할 지 말아야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칼에 찔려 죽고.
반항하다가 결국에는 팀원이었던 여성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를 말이다.
그래 .그렇게 서로를 죽여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쪽에게 무릎 꿇고 함락당해라.
뒤틀린 웃음을 짓는 제파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한윤은 입을 열었다.
"명령한다. 복종해라."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오른다.
[각인 명령이 4회 남았습니다.]
무기를 들어 올렸던 모두의 눈빛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게 무슨.."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제파르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풀렸다면 다시 걸면 된다.
사아아 또 다시 마기를 퍼트렸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마법을 걸려고 했지만 공기 중으로 흩어질 뿐.
걸었던 최면과 매혹이 한 순간에 풀려버렸다.
효과가 전혀 없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제파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인간 대화를 하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응 필요 없어."
기껏 해봐야 줄 수 있는 게 여자인 제파르와는 이야기할 게 없다.
약해빠진 영웅이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거기에 난 여자가 많으니까 위험하거든'
뒤통수를 당할 가능성이 언제가 열려있다.
그러니 살려둘 필요가 전혀 없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라이라였다.
탓 땅을 박차고 제파르에게 달려든다.
서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제파르의 목이 날아갔다.
바닥에 톡 하고 머리가 떨어진다.
혹시 살아있나 싶어서 발로 톡 건드려보니 확실히 죽었다.
화르륵 저쪽에서는 세리스가 남아있는 시체를 신성력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대체 뭐야.
"... 조종당하는 기분이라 불쾌했어요."
그렇지. 매혹과 최면으로 좋아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엔 마법이니까.
제파르는 결국 시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리스에게 전부 불타버렸다.
"남은 건 이거네."
마기에 오염되어있는 세계수.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이 안 잡힌다.
이 기둥에 손을 대면되나?
"오."
손을 대고 있으니 손바닥이 따끔따끔하다.
닥터피쉬가 손바닥을 세게 물어뜯는 느낌이다.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세리스와 노아도 다가와서 기둥을 만졌다.
마기의 반발력을 느끼며 억지로 신성력을 쑤셔넣는다.
세계수의 정화작업을 시작하자.
[칭호 세계수의 수호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뭔가가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