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0화
* * *
안데르센이 떠난 뒤, 넷은 자리를 옮겼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구역. 성녀의 예배당으로 향했다.
세리스는 각자에게 간단한 차를 대접했다.
이제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으니까.
세리스는 강한윤이 숨기고 있는 사실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사실은 오드웰 연합군의 작전 장교라는 것.
영지를 빠르게 점령하기 위해 행동했다는 것.
그렇게 행동하다보니 깊은 사이로 진행됐다는 것 까지 말이다.
"그렇다고 이 관계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어."
"...그건 참 다행이네요."
처음으로 고른 남자에게 하루만에 차일 걱정은 없었으니까.
세리스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었다.
"연합군 소속의 인간이라고요?"
"그렇지."
"지하 경매장과 관련이 있다는 건요?"
"관련이 있긴 하지만 내가 운영하는 건 아니야."
"하아.. 이게 무슨..."
이야기를 전부 들은 세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 거짓말이라고요...?"
"다는 아니지."
"아니 다 거짓말이잖아요!"
이름, 직업, 소속이 거짓말이다.
이 세 개를 제외하면 남는 거라고는 신성력 하나 뿐.
아니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걸까.
설마 여기에서 또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
세리스의 시선이 예배당을 둘러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다크엘프와 오크. 둘 다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녀가 보더라도 반할 정도로 예쁘고 모난 점이 없어 보인다.
그녀들은 지금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지만.
세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눈을 피했다.
"...설마"
세리스는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애인 관계 인건가요?"
"아, 아닌데....?"
"아닌 데는 무슨 아닌데 에요! 얼굴에 다 쓰여 있잖아요!"
세리스가 강한윤의 볼을 꼬집었다.
"흐어어"
"솔직하게 말해요! 그런 사이죠?"
"느흐에에"
볼이 끊어질 듯이 아프다.
강한윤은 세리스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볼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볼이 아프다는 듯 쓰다듬고 있는 강한윤을 바라보던 세리스는 측은함을 느꼈다.
너무 세게 꼬집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세리스는 말을 이었다.
"누구에요?"
"...누구냐니?"
"그런 사이인 게 누구냐는 뜻이에요."
"..."
강한윤은 침을 삼켰다.
그런 의미였구나. 산 넘어 산이다. 이걸 사실 대로 말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수많은 고민이 오간 뒤 결정을 내렸다.
"둘 다야."
"둘... 둘 다 라고요...?"
세리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관계인 거지?
정찰, 수색 소대의 소대장 다크엘프 노아.
북부의 사령관 오크 에우제니아.
저기 있는 다크엘프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북부 전체를 관리하는 사령관과도 그런 사이라니.
완전히 바람둥이였다. 능력 있는 바람둥이.
세리스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했다.
"여자가 또 있는 건 아니죠?"
"..."
"또 있어요?"
"...어"
"몇 명이요?"
"...음"
강한윤은 머릿속으로 여자들을 떠올렸다.
노아, 라이라, 에우제니아, 에리엘, 베아트리스.
만났던 순서대로 수를 세고 있으니, 세리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정말.. 바람둥이네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세리스가 시선으로 노아와 에우제니아를 가리켰다.
그녀는 궁금했다. 이렇게 여자가 많으면 불화가 생길 텐데.
심지어 서로 사이를 알고 있다면 불화를 피하긴 힘들지 않을까.
남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다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다들 만족 시켜주고 있으니까?"
"만족이라뇨..? 무슨... 아."
만족. 그 안에 함축된 표현을 세리스는 알아차렸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둘 다 만족시켜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세리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세리스의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아?"
조각상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는 에우제니아였다.
"어쩔 수 없다고요..?"
"그래. 여자가 능력 있는 사내에게 이끌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에우제니아는 슬며시 다가와서 강한윤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정말.. 이걸로 좋아요?"
"그렇다고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 다들 얘가 좋은 것도 맞고. 그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세리스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기 싫었다.
이런 형태의 관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보면 싫은 사람이 떠나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더 싫어.'
다른 건 몰라도 세리스는 강한윤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남성을 만났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인정할 게요."
그가 흠이 있는 건 맞다. 그렇다고 치명적인 흠집이냐 따지면 아닌 축에 속했다.
여성편력을 가진 귀족들도 세상에 넘치고 넘친다.
그것도 자신의 그릇에 넘칠 정도로 여성을 밝히는 귀족들 말이다.
'그것에 비하면.. 조금 나은 편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여성의 숫자보다 그의 그릇이 더 커보였다.
딱 자신이 가진 욕망만큼 행동하는 건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세리스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성력을 가진 이상.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제가 제지할 거예요."
"그래. 마음대로 해."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안 할 자신이 있었다.
"하나만 얘기해줘요. 제가 몇 번째에요?"
"여섯 번째야."
'여섯..'
많네. 세리스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방탕한 귀족들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서 한 편으로는 안심했다.
그 정도로 맛이 간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는 누구일까.
세리스는 에우제니아와 노아를 번갈아보았다.
이 중에서 첫 번째인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노아 쪽에서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
"세리스 씨라고 했죠? 반가워요. 저도 강한윤의 애인이고 잘 부탁해요."
"아. 네."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다크엘프가 성격이 안 좋다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을까.
세리스는 안심한 채로 노아와 악수를 했다.
"제가 첫 번째에요. 서로 티격태격 하는 일 없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노아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네 노아씨"
바로 서열정리에 들어오는 노아를 보고 세리는 생각을 바꿨다.
역시 다크엘프는 성격이 안 좋은 게 맞을 지도 모른다. 고 말이다.
***
"신성교단은 물러나라!"
"신성교단은 마족에게 점령당했다!!!!"
광장에서 팻말을 들고 소리 지르는 아저씨가 보인다.
팻말에는 '신성교단은 마족의 앞잡이다.' 라고 적혀있었다.
"뭐냐 도대체?"
그 모습을 보던 에우제니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동네에서 유명한 분이던데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걸로."
저번에는 세상은 멸망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소리치던 아저씨는 아내로 보이는 사람에게 붙잡혀서 집으로 끌려갔다.
저 사람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뿐이었고 다시 서류를 읽고 작성했다.
동맹관계에 들어갔으니 협의해야할 내용들이 많은 탓이었다.
물자 거래, 상호 파견, 근무 조정, 임무 협조 등등.
일처리를 연합군과 신성교단이 분담해서 진행한다.
그저 말 뿐인 동맹이 되지 않도록 신성교단의 일정 인원은 푸니아로 파견을 갔고.
푸니아의 일정 인원은 사티라로 파견을 왔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즉시 이동할 수 있는 인원만 상주하고 있다.
정찰, 수색 소대 급의 인원과 에우제니아, 노아, 라이라.
딱 이 정도만 사티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스륵 스윽
방 안엔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가득하다.
서류를 확인하고 사인을 하고, 관련된 서류를 정리한다.
에우제니아, 세리스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이서 서류의 산에서 작업을 하는 중이다.
"하아.."
아무리 서류 작업을 해도 책상위의 난잡한 서류 더미는 정리가 되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더 처리를 해야 하는 거지?
날짜를 보니 저번 달의 서류도 이 틈에 섞여있었다.
"저번달. 아니 저저번달의 서류도 섞여있는데?"
"주교였던 그 사람이 싸놓고 간 똥이에요. 당연히 일은 뒷전으로 두고 놀았겠죠."
세리스의 단호한 대답에 머리가 아파온다.
오드웰 연합군에서 내정작업을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답답한 와중에 세리스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이것도 처리해줘요."
"어디보자."
지하수로의 경매장에 관한 처리현황
내용을 읽어보니 폐쇄하거나 불법적인 부분은 최대한 축소해달라고 적혀있었다.
그냥 사업을 축소하거나 접어달라는 부탁이다.
이걸 이쪽에서 처리를 해도 될까. 이런 건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르다.
주변을 둘러본 뒤 강한윤은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벽에 떠올라있는 라이라의 상태창이었다.
"라이라."
그녀를 호출하자 벽에서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다.
세리스는 라이라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저번에 라이라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하수로의 경매장을 처리할 수 있어?"
"축소하는 방향으로 할 게요. 어차피 그럴 예정이었어요."
"그래? 그럼 됐어."
서류에 사인을 스르륵 휘갈겼다. 세리스에게 다시 서류를 건네니, 라이라는 이미 벽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저 분이 경매장을 관리한다고 했었죠."
"그래. 앞으로 알아서 정리할 거야."
"그러면 믿을게요."
세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원래 작업으로 돌아갔다.
흐음.
오래된 서류를 둘러보던 강한윤은 뭔가 알아차렸다.
여기에 있는 서류들은 전부 중요도가 낮은 것들이었다.
기한이 조금 넘어도 괜찮은 서류들뿐이다.
이미 기한이 넘긴 서류와 오래된 서류는 전부 구석에 박아놓고 새로운 것들부터 처리를 시작했다.
"이건..."
가장 눈에 띄는 재질의 종이를 집으니, 북부에서 온 편지였다.
북부의 왕실에서 보내온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신성교단이 연합군과 손을 잡은 사실은 마족을 상대하겠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해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북부의 칼은 신성교단에게 향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적혀있었다.
"그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그 건에 대해선 교황님이 가기로 했거든요."
"그래?"
안데르센이 찾아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마족이 등장했다며 온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면서 설득하려고 몇날 며칠을 찾아가겠지.
'어느 쪽이든 좋아.'
설득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에는 시간이 끌리니까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신성교단을 무시하고 움직이기엔 세력이 크니까.
중부 지역을 꽉 붙잡고 있는 신성교단이다.
지금은 사티라만 이런 분위기지만, 결국에는 중부 지역을 전부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보급만 기다리면 완벽하다.'
이제는 신병과 보급이 올 차례다.
그것만 받고 정비를 끝낸다면 중부를 기점으로 북부를 압박할 수 있을 터. 완벽한 상황이다.
강한윤이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천족이 여기를 왜..?"
의문이 담긴 세리스의 말대로 남성 천족이었다.
땀을 흘리면서 들어온 그는 에우제니아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종이를 건넸다.
에우제니아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굳어 있다가, 종이를 빼앗듯이 집어왔다. 그리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데 그럽니까?"
"우리 보급 못 받게 됐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서부에서 문제가 생겼다는데?"
이게 뭔 개소리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