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99화
* * *
'아니.. 정말로...'
정말로 북부의 사령관인가?
안데르센은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두색 머리와 까칠해 보이는 인상의 여인.
입술 사이로 인간보다 큰 크기의 아래송곳니가 보인다.
거기에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마나는 그녀가 북부의 사령관이라는 걸 알려주듯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누가 봐도 북부의 사령관이었다.
그렇다면 옆의 다크엘프는 누구지?
안데르센은 시선을 돌렸다.
하얀색 머리칼을 가진 다크엘프. 그녀가 가진 마나는 약한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에 같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은 신기했다.
이스타르님이 내려준 신성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면 신성력을 가지게 된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렇다면 그녀는 세계수의 축복을 받을 정도의 인재라는 뜻이었다.
비슷하면서 다른 성질의 신성력에 집중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서도 똑같은 기운을 느꼈다.
'한스..?'
이 자에게서도 똑같은 신성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안데르센의 의문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에우제니아였다.
"거래를 원한다고 하더군. 품목은 식량과 목재라고?"
"네. 알고 계신 내용 그대로 입니다."
에우제니아는 한숨을 쉬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주도권을 가져와달라는 강한윤의 부탁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거래를 하면 우리 쪽에서 리스크를 져야한다는 것 아닌가? 혹시 모르는 일이지. 이렇게 얘기를 하고 뒤통수를 치는 일도 있을 법 하니까."
거래를 하자고 해놓고서 뒤통수를 친다. 이미 몇 번의 사례가 있었던 내용이다.
확실히 꺼내면 불리한 이야기인만큼 안데르센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한윤이 믿을 만한 사내라고는 했지만.'
그게 정말인 지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에우제니아는 북부의 사령관이었으니까. 자신의 책무를 다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솔직히 말해서 믿어달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믿어 달라?"
종교인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진 에우제니아는 코웃음을 쳤다.
"대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처벌하고 그런 일이 없도록 지시와 감독을 할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이게 잘 되고 있는 지는 저희만 알지 않습니까?"
신성교단에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굴러가는 지 알 수가 없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에우제니아도 수긍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믿어달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흐음."
교황이라 칭한 사내가 말하는 내용은 에우제니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믿기 싫다면?"
"교황님!"
에우제니아가 마나와 살기를 끌어올리자, 주변의 성기사들이 칼을 꺼내들었다.
"칼을 집어넣으세요! 지금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안데르센의 외침에 모두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고, 결국엔 칼을 집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희는 믿음을 주려고 노력하는 게 최선이겠죠. 단지 그것뿐입니다."
에우제니아는 안데르센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고민한다는 것도 느껴진다.
일관된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두 눈은 강인하다.
'생각보단 마음에 드네.'
인간 치고는 기개가 있는 편이었다.
저 눈동자는 특히 강한윤의 것과 비슷해보인다.
자신만의 고집이 있는 눈동자.
저런 눈을 한 인간들은 대부분 믿을만한 족속이었다.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거래하지. 세금, 수수료, 일정에 관한 내용은 받은 그대로인가?"
"예. 그대로 진행하려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에우제니아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휘갈기듯이 사인을 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마나를 부여하고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믿음을 준다고 했지. 그 믿음에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도 좋은 품질의 물건을 거래하겠다."
"예. 감사합니다. 이스타르님의 축복이 있기를."
에우제니아가 건넨 악수를 안데르센이 받았다.
환하게 웃은 그는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아무 문제없이 마족 척결에 한걸음 다가가서 마음이 편하다.
2장의 계약서를 서로 확인하고 나눠가진 뒤, 안데르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을 텐데.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떻습니까? 만찬을 준비해놨습니다."
"그런가. 그럼 사양하지 않겠다."
이미 예정되어있는 이야기였다.
식사를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내자는 것까지 말이다.
신성교단의 식사는 어떨지 기대하며 에우제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구이, 튀김, 훈제 등등 종류 별로 맛있는 음식이 나오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맛있다. 식사를 하는 도중 분위기는 좋다. 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에우제니아와 안데르센만 입을 열었다면.
식사를 하는 도중에는 세리스와 안데르센 그리고 노아가 주를 이뤘다.
"노아씨는 신성력을 어떻게 가지게 된 건가요?"
"그건... 세계수에게 인정받으면 축복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세계수의 인정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저희와 비슷하네요. 이스타르님의 인정을 받아야하니까요."
세리스가 노아에게 이야기를 계속해서 걸고있다.
특히 신성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긴 건지,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던 도중, 세리스의 시선이 이쪽으로 닿았다.
"그러고 보니 신성력이 비슷하네요. 세계수님의 받은 신성력과 엄청나게... 아니 같다고 느껴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듯이 쳐다본다.
세계수에서 같이 축복을 받았는데? 나는 사실 연합군 소속이니까. 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결국 선택한 것은 시치미 떼기였다.
"모른다고?"
"예. 여행을 다니던 도중 어느 날부터 이랬거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세리스가 도끼눈을 한 채로 이쪽을 쳐다본다. 명백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고기를 자르는 게 힘들어서 인상을 굳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는 채로 축복을 받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안데르센은 자신이 책으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무너진 건물로 들어가서 벽에 기대고 잠든 여행자가 축복을 받았죠.
벽으로 알고 있었던 건 사실 반쯤 무너진 조각상이었다거나. 그런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요."
"... 그런가요."
모르는 내용이 나오자, 세리스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접하다보면 세계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세상은 넓고 아는 것은 적다. 세리스는 자신의 식견이 부족한 거라 생각하고 고기를 썰었다.
"선배는 식사하고 곧바로 돌아갈 건가요?"
"그래야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오드웰 연합군과 교류를 하게 됐으니, 신성교단은 다시 바빠질 게 분명했다.
신성교단과 연결이 되어있는 영주들에게 전서구를 보내야하고 동부의 정화성전교단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앞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설득을 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일이었다.
"바쁘게 보내야겠네요."
"그래야지. 그게 내 일이니까."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해서 열심히 길을 닦는 것.
그게 자신의 할 일이라고 굳게 믿는 안데르센이었다.
다음 교황으로 점쳐지는 사람이 소중한 후배 세리스인 만큼 열심히 힘내는 수밖에 없었다.
드륵
식사를 전부 끝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떠나야하는 안데르센은 에우제니아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악한 마족들을 잡기 위해서라면 모두의 협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래. 솔직히 인간보다는 마족들이 더 골치 아프지."
마족과 계약한 칼레보른. 그 망할 새끼.
에우제니아는 마족을 떠올리고서 이를 갈았다.
인간과 전쟁을 하는 건 싸워서 이기면 된다지만, 마족은 슥 나왔다가 슥 사라지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유리할 때만 나타나고 불리하면 사라져버린다.
'얍삽한 새끼들.'
그 녀석들을 전부 잡으려면 협력해서 세상 전부를 뒤져야하겠지.
에우제니아는 안데르센의 손을 잡았다.
"그래. 마족을 처리하는 건 나도 좋다고 생각해. 그 새끼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예. 그 목표를 향해서 서로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을 줘서 악수를 한 뒤. 안데르센은 바깥으로 나갔다.
사티라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제는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안데르센이 마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본, 에우제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괜찮게했겠지.
"강한윤. 이 정도면 만족해?"
일을 끝낸 에우제니아는 뒤를 돌아보았고 강한윤의 표정에 경악이 서려있었다.
"왜?"
"강한윤...?"
그 이름을 들은 세리스의 시선이 강한윤에게 향했다.
"이름이 한스가 아니었나요..? 그리고 왜 서로 아는 것처럼 부르는 거죠?"
"..."
좆됐네.
강한윤은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사티라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지. 뤼네아.
그곳에는 교류회가 열리고 있었다.
"모두 부어! 마셔! 이봐! 여기로 와서 술을 줘야지!"
남성이 손짓을 하자 여성 하나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걸어온다.
그의 위로 여성이 올라타고 가슴을 얼굴에 비볐다.
"흐흐."
이게 천국이지. 천국이 따로 있나.
뤼네아의 영주 기르닐은 웃으며, 여성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아앙.. 너무 세게 잡지 말아요 영주님.."
여성은 아양을 떨면서 자그맣게 웃었다.
엉덩이를 만져지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듯이 색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게냐!"
"당연히 알고 있죠오.."
여성은 자신의 가슴을 모아서 최대한 굴곡을 만들고 그 사이로 술을 따랐다.
술이 흐르지 않도록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영주 기르닐의 얼굴에 가져다대었다.
"아주 장관이군."
"꺄흥.. 간지러워요."
술을 꿀꺽 꿀꺽 마시면서 가슴에 남아있는 술을 핥는다.
술의 독한 향기가 여성의 체취와 섞이면서 오히려 달달하게 느껴진다.
"크흐흐."
그는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처럼 여성을 한두 명씩 붙들고 즐기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주변의 영주들과 상단을 운영하는 길드장들. 그 외로 한 끗발 있는 인물들이었다.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던 길드장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모인 이유는 뭡니까? 영주님이 그냥 부를 인물은 아니잖습니까."
그는 궁금했다. 이번에 부른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영주 기르닐은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신성교단과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전서구가 왔습니다."
영주 기르닐은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신성교단과 연합군은 손을 잡기로 결정했고, 마족을 처단하기 위해 힘쓴다.
앞으로 연합군과 적대하는 행위는 금지하며, 연합군을 공격하는 세력은 적으로 간주한다.
"이게.. 말이 되는 내용입니까!"
상인 길드장이 소리치며 여성의 엉덩이를 꽉 주물렀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이득을 보고 있었다.
병장기를 판매하고 지역의 시세 차익을 이용해서 일확천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을 멈추려고 한다?
그건 밥줄을 빼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분노하고 목소리르 높였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어떻게든 계속되어야 한다.
다들 한 목소리로 외치는 도중, 영주 기르닐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받을 사람을 구해왔습니다."
기르닐의 옆에 선 여성은 작게 웃으며,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네. 제가 전부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모두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 대신에 저에게 복종하면 되는 일이에요. 쉽죠? 후후."
매혹의 악마. 그레모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등 뒤로 까마귀처럼 검은색의 날개가 펼쳐졌다.
"자 그럼."
나만의 세력을 만들어볼까?
그녀는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