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4화
* * *
세리스는 처음 성녀가 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려와서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자와 성녀들이 그래왔듯이.
그녀에게도 예언 한마디가 들려왔다.
'또 다른 성자를 대비하라 빛나는 나비와 함께 평화를 가져올지니.'
4년 전. 세리스가 처음으로 성녀가 됐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예언이라는 건 완벽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면 예언이 빗겨나가는 경우도 있고.
성자와 성녀의 행동으로 인해서 예언이 틀리기도 한다.
그래서 세리스는 예언에 대해서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여태까지 잊고 지낼 정도로 말이다.
"대체.. 어떻게..."
세리스는 축복을 목격한 뒤 입을 벙긋거렸다.
축복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가 진짜로 받을 줄은 몰랐다.
노란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나비들.
신성력을 품고 있는 나비들이 수십 마리가 날아다니고 예배당을 밝히는 광경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여태까지 이런 형태의 축복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비 비슷한 무언가의 형상을 띈 축복은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나비'
세리스는 방금 봤던 게 나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다니는 것과 형태는 자신이 알고 있던 나비였다.
'사실 일리가...'
세리스는 약간의 고집을 부렸다.
이런 사내가 이스타르님의 축복을 받았을 리가 없다고.
방금 전의 그것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를 닮은 무언가와 비슷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스타르 조각상에서 손을 뗀 그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강한윤은 손 위로 신성력을 움직였다.
축복으로 얻은 신성력은 생각보다 움직이기 쉬웠다.
마나를 운용하는 느낌과 똑같이 의지를 담아서 끌어 모은다.
어쩌면 신성력이 마나보다 더 움직이기 쉬운 것 같았다.
"정말로..."
세리스는 지금의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이스타르님이 말한 사내가... 이 사람이라고?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내가 예언의 그 사내라고?
'성자라고...?'
세리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목구비는 또렷하지만 그것 외에는 특별한 특징은 보이질 않는다.
동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이다.
지금까지의 성자들에 비하면 너무 평범한 모습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너무 빤히 쳐다본 걸까. 그가 세리스를 쳐다보았다.
세리스는 눈을 피하면서 넌지시 말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정말 예언의 그 사람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화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파요."
세리스는 저번에 그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는 건 어떠냐고.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엔 쑥스러웠다.
세리스는 괜히 바닥을 발로 긁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긴 저녁 시간이네요. 저녁을 먹긴 해야 하는데... 같이 저녁 먹는 건 어떨까요?"
그의 권유에 세리스는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지금 당장 대답을 한다면, 뭔가 이상해보이겠지.
이번에도 세리스는 망설이는 척을 했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요?"
"맛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음..."
승낙할 여지를 주겠다는 듯이 세리스는 말을 흐렸다.
저녁 식사 권유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적당히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성녀님 괜찮나요?"
"뭐가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쉬는 게 낫지 않겠어요?"
"... 전혀요."
세리스는 신성력을 사용했다.
피로가 줄어들고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무튼... 여기서 기다려요."
갑옷은 피와 더러운 것들이 늘러 붙어서 엉망인 상태였다.
지금의 복장으로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엔 조금 그렇다.
세리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러운 갑옷을 벗고, 땀으로 흠뻑 젖은 속옷까지 전부 벗었다.
샤워를 할 시간이 없으니 정화로 몸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냈다.
그리고 세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
언젠간 쓰려고 구입 해놓은 승부용 검은색 속옷과 무난한 실크 속옷.
그 둘 중에서 뭘 입을지 골라야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세리스는 속옷을 하나 골라서 입기 시작했고.
바깥의 강한윤은 세리스의 정보를 읽고 있었다.
[호감도 : 78 / 100]
'생각보다 높네?'
세리스의 호감도를 자극할 만한 발언은 계속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갔다.
이대로라면 오늘 섹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한윤은 기대하며 세리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
끼익
문이 열리고 나온 세리스의 복장은 평범했다.
프릴이 달린 민소매와 짧은 바지.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예뻤다.
"그럼 이동할까요?"
"네."
세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둘은 밥을 먹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어떤 걸 좋아하세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래요?"
강한윤은 세리스를 이끌고 사람이 북적북적한 사티라의 번화가로 향했다.
먹어본 곳 중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었던 음식점으로 걸었다.
2층에 있는 레스토랑. 고기와 해산물을 위주로 코스요리가 나오고 분위기도 괜찮은 곳이었다.
주황색 등잔에 빛나는 내부엔 바이올린과 첼로 비스 무리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강한윤과 세리스는 방 안으로 이동했다.
단 둘이서만 먹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사티라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런 곳은 처음이신가요?"
"... 아뇨? 와본 적 있어요."
당당하게 대답한 세리스. 사실은 이런 곳에 와본 적은 없었다.
검소하게 생활하기도 하고, 음식은 대충 해결하는 게 기본인 그녀였으니까.
최대한 경험이 있는 척 말했지만.
"읏..."
세리스는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게 어려웠다.
힘을 준다면 접시까지 썰어버릴 것 같고, 힘을 적게 주면 고기가 썰리지 않았다.
"크훗.."
세리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한윤은 웃으면서 그녀의 접시를 가지고 왔다.
그 대신에 자신의 접시를 건넸다.
"고기 써는 게 조금 어렵긴 하죠."
"... 놀리지 말아요."
"원래 강한 사람일수록 고기 써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강한윤은 라이라가 헀던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딱히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성녀님을 보고 있으니 웃겨서요."
"... 됐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세리스는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입 안으로 고기를 넣으니 사르르 녹아내렸다.
달달한 소스와 고기의 감칠맛이 중독적이다.
세리스의 포크가 또 다시 고기로 움직였다.
"맛있죠?"
"...적당히요."
앞에서 웃고 있는 사내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리스는 자존심을 담아서 대답했지만, 그녀의 포크는 솔직했다.
고기를 오물오물 먹으면서 와인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 와인마저도 맛있다니. 세리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인이 맛있네요."
"그렇죠?"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와인 잔이 비어있는 데요?"
술잔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세리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술잔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술에 약하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아주 조금만 따랐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교리를 어기는 거니까요."
강한윤은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조금 마시는 건 괜찮지만, 일정 이상 마신다면 취기가 확 올라오겠지.
주량이 낮은 이상 많이 마시는 건 금물이었다.
"흐음... 그래요."
세리스는 도끼눈을 한 채로 잔에 남은 와인을 전부 마셨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려나.
세리스의 의심이 조금이지만 누그러들었다.
욕망에 취하지 말라.
나에게 빵이 하나가 있다면, 옆 사람에게 절반을 나눠주어라.
이스타르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니 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예언 속의 성자라면..'
정말로 평화를 위해서 움직일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아니, 그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까?
한 가지 의문이 풀리면,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입이 바싹바싹 탄다. 가진 의문이 전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세리스는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전쟁.."
"예?"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이 사람이?
세리스는 의문을 담아서 질문했다.
"전쟁이요."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그가 식기를 내려놓고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런 건 진절머리 납니다."
강한윤의 본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전쟁을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기 싫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움직일 뿐.
많은 사람들이 죽는 전쟁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을 멈추고 싶습니다."
".. 그런가요."
세리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
식사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온 강한윤과 세리스는 길거리를 걸었다.
"성녀님 바래다 드릴게요. 이번에 여러 가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 네 알아서 하세요."
세리스는 이런 배려가 나쁘지 않았다.
암시장을 처리하겠다고 들쑤셨고 타락한 사제들을 처단한다고 움직였으니 그의 말대로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앙심을 가질 자들은 많았으니까.
'... 혹시 내 숙소를 알아내려는 걸까.'
세리스는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가득한 숙소를 덮친다?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라 하더라도 목숨은 보장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냥.. 환심 때문이라고..?'
그는 처음부터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성녀인 자신을 응원하겠다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뒷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정보를 넘겨주고 신성교단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말로...?'
세리스는 어느새 도착한 숙소의 앞에 서있었다.
배웅을 끝낸 그는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세리스가 들어가지 않자 의아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성녀님?"
"그..."
세리스의 입이 열렸다.
"안에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요."
"네. 그러죠."
강한윤은 즉답했다.
*
매력적인 금발 미녀. 세리스의 제안을 거부하는 멍청이가 있을까.
당연히 없겠지. 강한윤은 그녀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그녀의 등 뒤로 샴푸처럼 향긋한 냄새가 난다.
평범한 숙소의 문을 지나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그나마 관리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의 철문이 있었다.
새하얀 철문을 세리스가 열자 그녀에게서 나는 항기보다 강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코가 먹먹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
세리스에게 안겨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강한윤은 그런 상상을 하며 세리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구조는 평범했다.
문이 3개다. 창고, 침실, 화장실 이런 구조인 걸까.
"...일단 여기에서 기다려요."
세리스가 그렇게 말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강한윤은 거실의 쇼파에 앉아서 세리스를 기다렸다.
끼익
문이 열리고 등장한 세리스는 편한 옷이었다.
돌핀팬츠와 비슷한 디자인의 바지와 가벼운 민소매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고 나오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이쪽으로 들어와요."
그녀가 손짓하며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그녀의 향이 더 짙었다. 여기가 침실이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여성스러운 분홍색 이불로 덮여있는 침대가 보인다.
성녀라도 여자는 여자라는 건가. 확실히 여성스럽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
그런데 여기로 오라고 한 이유가 뭘까.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원하지 않는데.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뒤에서 세리스가 침대 위로 강한윤을 밀쳤다.
침대 위에 엎어진 강한윤의 위로 세리스가 올라탔다.
"...성녀님?"
"가만히 있어요."
세리스의 손이 강한윤의 등에 닿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