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2화
* * *
세리스는 빠져나갈 길을 물색했다.
앞은 주교가 우월한 표정을 드러내며 웃고 있고 옆과 뒤는 암살자들에게 막힌 상태였다.
주교의 표정을 보아선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진 않았다.
싸워서 이기는 것 뿐.
세리스는 허리춤의 검을 빼어들고 자세를 잡았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곱게 즐기고 보내줄 생각이 있다네. 세리스 요한."
"제가 응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그렇겐 안 되겠지. 하지만 날뛰는 여자를 굴복시키는 것도 남성의 재미라네."
"...완전히 미쳐버렸네요."
저것은 이미 주교의 껍데기를 한 악마에 불과했다.
세리스 본인이 알고 있던 주교가 아니었다.
그녀는 검을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검을 세게 쥐었다.
"자네는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기대가 되는군."
그의 말에 암살자가 거리를 좁혀온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가 덮쳐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세리스의 뺨에 식은땀 한줄기가 흘렀다.
"큿..."
주교의 뒤로 고깃덩어리처럼 걸려있는 여성들에게 시선이 간다.
여기에서 붙잡힌다면 저 인간에게 범해지고 저렇게 되겠지.
세리스는 그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패배한다면 차라리 자결하리라.
약에 절여져서 여태까지의 모습은 전부 잃어버리고 자아도 없이 쾌락만을 탐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탓! 세리스의 등 뒤에 있던 암살자가 땅을 박찼다. 소매에 가려져 있던 단검을 휘두른다. 캉! 세리스의 검에 막혔다.
그녀에게 다른 암살자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는 안 돼. 세리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가 암살자의 배를 걷어차자 콰직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그대로 길을 만들어서 포위를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정말... 끈질기네요...!"
암살자들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세리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정면의 암살자에게 검을 휘두른다.
왼쪽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배리어로 막아낸다.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암살자의 다리를 발로 내려찍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자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
암살자가 쓰러지는 만큼 어디에선가 또 다시 나타난다.
"하아... 하아.."
벽에 몰린 세리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하며 신성력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퍼트려도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
몸은 물에 젖은 것처럼 무겁고, 신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크읏...!"
좌우로 달려드는 암살자들의 공격을 배리어로 막아내지만.
파스스! 배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으로 스크롤로 시전한 마법과 공격이 쏟아진다.
신성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몸에 남은 신성력은 하급 사제 수준 정도에 불과하다.
콰직! 배리어가 조각나고 세리스의 눈앞으로 단검 하나가 날아왔다. 칼을 휘두르지만 이미 늦었다.
막아낼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오른쪽 눈에 단검이 박히겠지.
'...우습네'
세리스는 자신의 마지막을 비웃었다.
신성교단을 위해서 움직인다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어린애처럼 정의를 위해서 움직인다니.
어리석었다, 더 준비를 해서 덮칠 걸.
가만히 있거나 모른 척만 했더라도 여기에서 이런 최후를 맞이하진 않을 텐데.
오른쪽 눈을 잃고 강간을 당하고 어딘가에 버려지지 않을까.
체념한 세리스는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그때였다.
"성녀님. 정보를 알려줬다고 혼자서 찾아가다니 대담하네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날아오던 단검이 튕겨져 나간 뒤 잠시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모든 암살자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세리스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전황은 뒤집혀 있었다. 세리스를 압박하던 암살자들은 바닥에 널브러져있고, 살며시 웃는 남성이 보였다.
"한스.. 여기는 어떻게."
"그야 뒤를 밟았으니까요? 하지만 지원군을 부르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그는 바닥의 시체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세리스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무사하시네요."
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있었다. 걱정하던 그는 세리스가 무사하자 미소를 띠었다.
'왜?'
이 사내는 처음 본 자신을 걱정해주는 거지? 세리스는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안도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긴장이 풀리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다리가 풀려버린 세리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과도한 신성력 사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주교의 머리를 붙잡고 끌고 온 라이라가 물었다.
"죽일까요?"
주교는 공포에 질렸다.
단숨에 암살자들을 쓸어버리는 괴물.
그녀를 보며 두 손을 싹싹 빌며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할까요?"
라이라는 대답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죠? 성녀님?"
강한윤도 세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둘의 시선이 세리스에게 향하고 결국에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죽..."
그녀의 말에 주교가 크게 움찔했다.
"이고 싶지만.. 일단은 죄를 심판해야겠어요. 그리고 이 자와 관련된 모두를 처벌하겠습니다."
세리스가 결정을 내리자,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강한윤은 라이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크아아악...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라이라는 주교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버리고 세리스의 앞에 던져버렸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움직이는 게 마치 구더기 같았다.
"쉽게 죽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리스는 주교였던 자의 상처를 치유했다.
"큿.."
신성력을 또 다시 사용하니 머리가 어지럽지만, 그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됐다.
최대한 세심하게 신성력을 운용했다.
그의 벌어진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았지만, 여전히 바닥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오. 힘줄만 내버려두고 전부 치유하셨네요."
신성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경지에 오른 성녀를 보고 강한윤은 감탄했다.
"하아.. 이 자는 제가 처리할 게요."
세리스는 주교의 목덜미를 잡아서 끌고 나갔다.
바닥에 긁히면서 상처가 나지만, 이 정도는 그저 가벼운 상처일 뿐이다.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눈물을 흘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성녀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얘기해주세요. 언제다 당신의 편일 테니까요."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건가요. 라고 물으려고 했지만, 세리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무튼 가볼게요."
이 악당을 처리하러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
신성교단은 난리가 났다. 아니, 사티라까지 난리였다.
주교가 타락하다!
소문은 발보다 빨라서, 어느새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다.
성녀가 신성교단에 칼을 빼들었다!
썩어빠진 신성교단을 뒤엎어라!
그런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다가.
주교는 마족과 계약했는가!
주교를 죽여라! 화형해라!
이런 와전된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사티라의 모든 관심이 신성교단으로 쏠린 그때.
쾅! 쾅! 쾅!
신성교단의 닫힌 문은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배리어로 보호받고 있지만, 점차 배리어의 색이 옅어진다.
"저항하지 말고 나와라!"
바깥에서 배리어를 두들기는 자들은 성녀파였고.
"성녀가 타락했다! 주교님이 그럴 리가 없다!"
안에서 농성하는 이들은 반 성녀파였다.
숫자는 미묘하게 성녀파 쪽이 우세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성녀파 쪽으로 기울었다.
계속해서 주교가 타락했다는 증거가 나왔으니까.
어느 쪽이 맞는 건지 고민하던 이들은 검을 내리고 성녀파에 합세했다.
그렇게 서서히 반 성녀파는 무너져 내렸다.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으니까.
성녀는 주교가 타락했다는 증거를 내세웠지만, 그들은 그저 주교에 대한 믿음을 내세울 뿐이었다.
그렇게 반 성녀파가 무너져 내리는 동안.
"..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급 사제 프릭스님."
정말로 주교가 떨어뜨리는 콩고물을 받아먹던 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진정하십시오... 일단..."
"무슨 일단 입니까! 지금 성녀가 모든 죄를 알고서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프릭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최소한 일주일의 여유는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루? 하루 만에 어떻게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저희를 압박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건 오히려 1급 사제 프릭스가 궁금했다.
성녀가 대체 어떤 수를 썼길래, 모든 이들의 죄명을 속속히 말하고 있는 것일까.
본당 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온다면 정상 참작의 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2급 사제 레닌 탈세 및 인신 매매, 1급 사제 라이카르 탈세, 횡령, 암살 사주 및 인신 매매"
이후로도 계속해서 고위 사제들의 죄명들을 속속히 말하고 있었다.
"망할..."
위층의 창문에서 지켜보던 고위 성직자.
2급 이상의 사제나 성기사단에서 한 자리 꿰차고 있는 이들은 침음을 흘렸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떡고물을 얻어먹은 3급, 4급사제와 성기사 단원들은 소리를 내질렀다.
"싸운다고?"
저기에 있는 성녀랑?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 새끼들이.
성녀의 힘을 보지도 못한 녀석들이 뭘 떠든단 말인가.
1급 사제 프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깥에서 여전히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1급 사제 프릭스. 정말 많네요. 협박, 공갈, 횡령, 탈세, 인신매매, 기밀 거래... 마지막으로 마족과의 거래 및 계약."
"그런...!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발끈한 1급 사제 프릭스는 창문 밖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마족과의 거래? 계약? 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프릭스님! 정말로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넘기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내부는 또 다시 술렁였다.
성녀는 곧 있으면 치고 들어올 판인데, 반 성녀파는 벌써부터 분열하고 있었다.
콰르릉! 본당의 문이 부서지고 내부로 성기사들이 치고 들어왔다.
"젠장...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면.
붙잡혀서 처형을 당하거나, 이단심문관에게 고문을 당하겠지.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기 싫은 이들은 검을 들었고.
선두에 서있는 성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이스타르의 발키리
신성력이 모두를 덮으면서 그 위로 천사의 형상이 떠오른다.
모두를 지켜보던 천사가 웃음을 짓자, 모든 이에게 신성력이 깃들었다.
"...저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반 성녀파는 침을 삼켰다.
성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발키리가 드러났으니까.
"모두 항복하세요,"
세리스의 검이 노란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
"위에서 싸우고 있나보네."
지하수로의 위가 소란스러웠다.
강한윤은 고개를 들어서 흔들리는 천장을 잠시 바라본 뒤에 다시 움직였다.
지하수로의 구석에 굳게 닫힌 자물쇠를 손으로 만졌다.
관리가 전혀 안됐는지 녹이 슬고 더러웠지만.
[굳게 닫힌 자물쇠]
내구도 [9996 / 9999]
정보 창으로 떠오른 내용처럼 칼로 두들겨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여기네.'
강한윤은 자물쇠의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촤르륵 속에서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딸깍. 하고 자물쇠가 열린다.
사용횟수가 3/5로 줄어버린 열쇠를 인벤토리로 집어넣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퀴퀴한 냄새가 난다.
10년 묵은 창고 냄새보다 심해서 옷소매로 코를 막았다.
주변에 세워져있는 비석을 둘러보았다. 이름만 적혀있는 간단한 비석이었다.
하이다렌
일란
제이아
프라에
파르파게스
에날
그 중에서 강한윤은 하이다렌이라고 적힌 비석의 앞에 섰다.
돌로 덮여있는 무덤을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라이라에게 말했다.
"이걸 부숴줘."
이 무덤을 부순다면 봉인되어 있던 마족이 깨어난다. 그것도 사티라의 예배당에서 말이다.
강한윤의 부탁에 라이라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단검이 붉게 빛나면서 무덤을 반으로 갈랐다.
사아아! 부서진 무덤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라이라는 마기를 느끼고 전투 자세를 취했지만, 마기는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뭐죠?"
"위에 도움이 될 만한 선물.'
반 성녀파에게 중요한 선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