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1화
* * *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성녀의 얘기를 들은 이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암시장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었다.
범죄조직을 소탕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던 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고위사제들이 있다고? 그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정말입니까..?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성녀님이 잘못 아셨다 거나.."
당황하면서 말을 잇는 1급 사제 프릭스.
"소문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는 자신의 동의를 구하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성기사나 사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녀인 제가 전부 확인한 일입니다. 무조건 고위사제 급의 인물이 엮여있습니다."
성녀는 쐐기를 박아버렸다.
"크흐음.."
그녀의 반응을 본 이들은 침음을 흘렸다.
깐깐하고 빈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성녀다.
성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한 편으로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디까지 타락했다는 것인가?
고위사제 이상의 인물들 중에서 어디까지 엮여있다는 것인가?
성녀가 꺼낸 얘기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신성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
가만히 있던 제3 성기사단의 단장인 에단이 손을 들어올렸다.
"성녀님. 이걸 저희에게 굳이 얘기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성기사, 사제, 수녀 들이 20명가량 모여 있는 자리다.
여기에서 얘기를 한다는 건 성녀에게 의도가 있으리라.
에단의 물음에 성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자신의 힘으로는 신성교단을 뒤엎는 건 불가능하다.
혼자서 행동해서 성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신성교단 전체에 맞서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성교단의 크기는 거대하니까.
성녀의 얘기에 동조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세리스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린 건 1급 사제 프릭스였다.
".. 신성교단과 척을 지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신성교단의 성녀가 신성교단을 공격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와 똑같이 생각하는 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교단과 척을 지라는 건 저도 동의는 못하겠습니다. 성녀님."
제1 성기사단의 단장 베일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굳이 저희가 해야 하는 일입니까?"
"신성교단의 내부감찰관이나 이단 심문관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술렁거리는 분위기.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교단 내에서도 그런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부서가 존재했다.
타락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제도적인 방법은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멋대로 행동한다는 것 아닙니까?"
"아뇨. 멋대로가 아니라 저 혼자서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얘기에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제3 성기사단의 단장 에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로 뭉쳐서 이교도와 연합군과 싸워도 모자랄 판에 신성교단끼리 싸우게 생겼다니.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못 듣겠습니다. 성녀님.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건 별로네요. 돌아가겠습니다."
"에릭님."
"하아..."
한숨을 쉬고서 에릭이 떠나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얘기가 듣기 거북하다면.. 나가셔도 됩니다."
세리스의 얘기에 절반 정도가 자리에서 떠났다.
남은 이들은 제1,2 성기사단의 단장과 성녀 직속 부서의 사제와 수녀뿐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따르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떠나버린 회의실.
세리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원들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베일님은 의외로 남으셨네요."
제1 성기사단의 단장 베일은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텐데?
세리스는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척을 지는 건 좋지 않지만.. 저도 요새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저도 빈민가에서 자주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그는 세리스와 함께 빈민구제를 하기 위해서, 빈민가에 자주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흰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고 갈 때도 있고, 평상복을 입고 돌아다닐 때도 있다.
"이번에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은 소문이요."
봉사활동 시간이 아닐 때 빈민가에서 성직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소문이지만, 그는 성녀의 얘기를 듣고서 호기심이 생겼다.
신성교단 내부에서 싸움을 하는 건 좋지 않지만.
'배교한 자들이 있다면 여기에서 직접 처단해야겠지.'
베일이 굳은 표정으로 세리스를 바라보았고.
"이번에 제가 직접 암시장으로 다녀왔습니다."
세리스는 자신이 봐왔던 것을 얘기했다.
"암시장이라면... 소문의 그곳이군요."
"예. 맞아요. 소문이지만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신성력의 흔적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얘기에 모두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예.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신성력을 다루는 것에 가장 뛰어나고 민감한 성녀다.
세리스의 보증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경매장에서요."
"경매장입니까?"
"예. 경매장은 최소 보유 골드 10만 이상부터 입장할 수 있어요."
경매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돈.
세리스는 우연히 칩을 입수할 수 있어서 들어갔을 뿐.
"10만..."
다른 이들도 10만이라는 금액에 허탈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10만 골드라는 금액은 쉽게 만져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으니까.
일반 사람이라면 평생을 모아도 만들 수 없는 돈이었다.
"그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군."
"성녀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증거를 모으려고요."
증거를 모아서 때가 되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
다음날 오전.
세리스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평상복을 입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금발 머리를 포니테일로 가볍게 묶었다.
번화가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평상복을 입는다고 성녀의 미모가 빛바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모두의 이목을 받는 와중,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검은색 머리의 청년. 평범한 옷에 평범한 얼굴이다.
누가 보더라도 동부의 사람처럼 보이는 그는 가볍게 웃었다.
"성당에 갔더니 저에게 쪽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필요하나 보네요."
그가 쪽지를 들고 흔들었다.
번화가의 카페테리아로 오세요. 라고 간단한 문장이 적힌 종이.
세리스 그녀가 적은 글씨가 맞았다.
"저를 드디어 신뢰하게 됐나요?"
"아뇨. 전혀요."
지금은 그가 유일하게 정보를 제공해줄 사람이었다.
세리스 혼자서 정보를 수집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한들.
그가 제공하는 정보를 뛰어넘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진짜라면 말이지.'
거짓말을 내뱉을 수도 있지만, 얘기를 한 번 쯤은 듣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세리스는 커피를 마신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증거는요?"
"맡겨놓은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세리스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암시장을 운영하는 범죄자와 말을 섞고 싶진 않고, 증거는 받고 싶어서 말투가 이상했으니까.
실제로 그가 증거를 주는 것도 제공하는 것 일뿐.
정당한 권리 행사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암시장 관리자라고 잡아간다고 한들.
암시장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성녀인 세리스의 이름만 먹칠될 뿐이었다.
"그래도 성녀님을 좋아하니까 그 정도는 해드리죠."
그는 종이 여러 장을 건넸다.
"경매장을 이용한 인원들과 그들의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적어놨어요."
세리스는 종이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에서 열어서 보기엔 눈이 많기도 하고, 인원을 확인한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까.
"...아무튼 고마워요.. 그."
"한스라고 불러요."
"한스 씨? 정보를 확인하고 나중에 또 다시 얘기를 할 게요."
"감사의 인사로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 싫어요. 아뇨 생각은 해볼게요."
세리스는 말을 바꿨다.
이게 정말로 그 정도로 중요한 정보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시네요. 벌써 가시고. 아직 커피도 남았는데."
그가 잔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세리스는 커피를 마시기엔 이 정보가 너무 궁금했다.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바쁜 성녀님에게 이스타르님의 축복이 있기를."
"...이스타르님의 축복이 있기를."
세리스는 카페에서 빠져나와 성당으로 향했다.
"하아."
성녀라서 좋은 점이 하나있다면, 사생활을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성녀 전용 예배당이 있다는 것.
크기가 큰 곳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세리스는 예배당의 한 가운데에 앉아서, 주머니 속의 종이를 꺼냈다.
재질이 그렇게까지 좋은 종이는 아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세리스는 가슴에 손을 대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더라도 놀라지 말자.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니까.
사실 확인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그녀는 천천히 종이를 열었다.
***
사티라의 공동묘지.
그곳에는 여럿이 묻혀있었다.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
사티라의 발전에 기여한 귀족들.
사티라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희생한 이름 모를 이들.
그들을 지나치면 신성교단의 인원들이 안치되어있었다.
교단의 이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해가 지고 달도 희미해서 빛이 보이지 않는 공동묘지.
그 곳에 다가온 이는 잠시 기도를 드리고 묘비를 손으로 만졌다.
성녀 아네사 하이렌 여기에 잠들다.
이제는 대부분에게 잊혀진 1대 성녀.
그녀의 묘비를 손으로 묘비를 어루만지자, 묘비가 가볍게 떨렸다.
그르르릉
바닥의 돌에서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 계단이 드러났다.
어둠으로 가득한 계단.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굳게 닫힌 돌무덤을 지나쳤다.
벽에 손을 대자 또 다른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황금과 보물로 가득한 방.
"쥐새끼가 있나보군."
그가 손을 튕기자 벽에 붙어있는 횃불이 전부 켜지면서 방 안이 밝아졌다.
스륵
인기척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주교님."
굳은 표정을 한 세리스가 서있었다.
"세리스 요한.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가장 신실하고 소박한 줄 알았던 사람인데.
방의 문이 열리자 황금과 보물이 가득했다.
"...정말이었네요."
낮에 한스라는 사내에게 받았던 정보대로 주교는 변절한 자였다.
얼굴과 눈은 선량한 사람처럼 연기하고 있을 뿐.
속내는 욕망에 미친 사내였다.
"주교님...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어째서냐니. 이상한 걸 묻는 군 세리스 요한."
세리스의 눈물 섞인 목소리.
그걸 무시하듯이 주교는 비웃음을 섞어서 답했다.
"육식 동물이 어떻게 풀만 먹고 살 수 있겠나.
인간이라는 건 욕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어떻게 욕망을 버리고 살 수 있나."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자네도 성녀라면 알 텐데. 돈을 벌 기회가 주어지고, 욕망을 채울 기회는 언제든지 주어지지 않은가."
주교의 말대로 세리스에게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수많은 나라에서 돈을 보내왔다.
수많은 남성들이 구애를 해왔다.
하지만 교리대로 절제를 해온 세리스에게는 궤변이었다.
"그건 변명이에요."
"세리스 요한. 한 번이 어렵다네. 한 번을 넘으면 두 번은 쉽지."
주교는 스스로를 대변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한 평생을 참았다네. 참고 삭이고 숨겼다네.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행복은 엄청나더군."
주교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세리스도 따라서 이동하자, 그 안에는 입마개를 한 여성들이 여럿 묶여있었다.
엘프, 다크엘프, 인간, 오크
그들은 약에 취했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참아 왔는지 몰라."
주교는 작게 큭큭 웃었다.
"...완전히 타락하셨군요."
"타락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온 걸세. 인간의 근본으로 말이야."
"그건 핑계일 뿐입니다."
세리스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주교를 여기에서 쓰러뜨리고 썩어버린 신성교단을 정화할 생각이었다.
이스타르의 축복
이스타르의 활력
이스타르의 가호
온 몸에 따스한 신성력이 퍼져나가며 몸이 강인해졌다.
세리스는 주먹을 굳게 쥐고서 주교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잘못을 빈다면...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만."
주교가 손짓을 하자, 후드를 쓴 암살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나왔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세리스 요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