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90화
* * *
다음날.
세리스는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거울을 보자 평상시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머릿결도 푸석푸석하고 눈은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짙다.
졸리고 피곤해서 그런지 컨디션도 별로인 것 같았다.
온 몸에 신성력을 퍼트리자, 그제야 몸에 활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하아."
한숨을 내쉰 세리스.
자고 일어났지만 어제의 일들은 아직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신성교단은 타락했다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신성교단은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부감찰도 하고 물갈이를 하지 않았던가.
타락한 고위 사제들의 숫자는 많아도 한 자리 수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최소 두 자릿수입니다.
암시장에서 들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티라의 고위 사제급 이상은 50명 정도.
그 중에서 두 자릿수라면 최소 1/5이상은 타락했다는 것 아닌가.
세리스는 까만색 바탕의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다른 이들은 하얀색의 복장이지만 성녀가 입는 복장은 달랐다.
대부분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목 부근과 소매는 하얀색으로 되어있었다.
성녀 전용의 사제복장을 입은 세리스는 바깥으로 나왔다.
"아. 성녀님. 이스타르님의 축복을."
"네. 축복을."
나와서 마주친 2급 사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숙소를 나와서 본당으로 향했다.
성녀 전용 예배실로 향하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운데에 검과 책을 양손으로 쥐고 있는 이스타르 조각상이 보였다.
그녀는 조각상 앞으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이스타르님."
세리스는 깍지 낀 두 손을 가슴에 닿을 정도로 당겨오면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마음속에서 의심이 피어올랐다.
괜히 교단의 사람들을 의심하는 게 아닐까.
아무런 잘못 없는 이들을 탄압하는 게 아닐까.
세리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스타르님이 성녀로 임명해줬을 때처럼.
따스한 빛이 내려와서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이스타르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스타르님과 함께하고 있어.'
이 마음속에 각인된 믿음대로. 이스타르님의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그 곳이 분명 옳은 길일 테니까.
그녀는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세리스는 미사 준비를 하기 위해서 본 예배당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점심은 미사로 보내고 저녁에는 성기사들과 회의가 있으니까.
하루를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래. 미사를 드리면서 이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렇게 생각하며 본 예배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
"..."
어제 지하에서 봤던 사내가 예배당을 청소 중이었다.
"세리스 성녀님! 드디어 오셨네요! 찾고 있었어요!"
"네. 방금까지 이스타르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아! 그러셨나요! 저는 또 어디 가셨나 했어요...! 이 분은... 이번에 미사를 드리고 싶다면서 준비를 도와주신다고 하더라고요!"
3급 사제 미르의 얘기를 들은 세리스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이 사내가 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에 마침 미사를 드린다기에 돕는 중이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기엔 너무..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그가 웃자 3급 사제 미르도 작게 웃었다.
"아무튼.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 가볼게요! 청소를 하는 것 말고도 준비할 게 만거든요!"
미르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세리스는 주변의 다른 사제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속셈이죠?"
"무슨 속셈이라뇨."
그는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아닌가요?"
암시장에 대해서 발설한다면 해코지를 하겠다거나. 협박하기 위해서.
아무튼 그런 나쁜 생각으로 접근 했을 것이다.
세리스는 사내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웃었다.
"착각이 대단하시네요. 성녀님."
"...착각이라뇨. 당신이 악인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저 저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악인이라고 하시는 건 기분이 상하네요."
그는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악인이 아니라 청소부라고 해줬으면 좋겠네요. 세상의 쓰레기들을 격리시켜주는 청소부."
"하. 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계시네요."
세리스는 대놓고 그의 행동을 비아냥거렸다.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해놓고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닌가'
세리스는 생각을 바꿨다.
이것마저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악인은 거짓말 정도는 밥 먹듯이 하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건 그가 암시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은 잘되셨나요?"
그의 물음에 세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하는 일이라는 건. 분명 어제의 일이었을 테니까.
주교에게 말을 걸었다가 퇴짜를 맞았던 것이 떠올랐다.
"제 도움 없이 쓰레기들을 소탕하겠다고 하셨죠.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봅니다."
그의 말에 세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이쪽의 정보를 전부 아는 듯이 말을 하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뭐 그런 얘기를 들었나요?"
"... 그걸 당신이 어떻게"
"높은 사람들의 말이야 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확인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저런 핑계를 대고 은근슬쩍 압박도 하는 것이죠."
세리스는 그가 하는 말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부 겪은 일이었으니까.
"그래요. 그런데요. 어차피 그 곳은 소탕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그걸 말해줄 것 같나요?"
세리스의 대답에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잘 해봐요. 하지만 게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증거 확보.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작게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아무튼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암시장을 쓸어버린다는 데 걱정하지도 않나보네요."
"그야.."
그는 잠시 뜸들인 뒤 말했다.
"저도 이스타르님의 신도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신성교단을 더럽히는 그들이 처벌받기를 원합니다. 이스타르님의 신도를 자처하는 쓰레기들 말이죠."
"그 더러운 입으로 이스타르님에 대해서 말하지 마요."
"제가 더럽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세리스를 비웃고 말을 이었다.
"능력 없는 이들이 고위 사제에 오르는 건 더러운 게 아닙니까?"
"그 분들은 전부 그만한 믿음이 있어서 그 자리에 계신 거예요."
"그리고 신성교단이 돈을 이상한 곳에 사용하는 건 깨끗한가요? 돈은 다 어디로 가고 있죠?"
"전부 빈민 구제를 위해서 힘쓰고 있어요."
"예. 그랬으면 좋겠네요."
진심이라고 믿는 건지 그는 쓰디 쓴 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렇게 믿던 때가 있었죠."
"당신은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어요. 범죄자 주제에."
"그런가요. 비록 제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지만, 제 마음 속에는 이스타르님이 항상 계십니다."
세리스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청소도 대충 끝났으니 미사 준비를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성당 의자를 닦던 걸레를 앞의 사내에게 던져버렸다.
"이제 저희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차갑게 말하고 걸어가는 세리스의 뒤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세리스도 잘 알고 있는 구절이었다.
'내 안의 주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안의 주께서 사시는 것이라."
어째서 저 악인이... 같은 구절을 좋아한단 말인가.
세리스는 이를 악 물었다.
"저의 마음속엔 항상 이스타르님이 함께 계십니다. 부끄러움 없이 믿음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쓰레기들보다는 제가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성녀님이 도움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등 뒤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
*
"이스타르님의 축복을."
미사를 끝낸 세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내가 있었다. 하지만 미사가 끝나자마자 볼 일이 없다는 듯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정말일까.'
이스타르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
그게 정말 사실인 걸까. 궁금했다.
한 편으로는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지루하기로 유명한 미사를 지내고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마치, 여러 번 해본 일을 다시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도 했고.
그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구절은 세리스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스타르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는 구절이었으니까.
'...모르겠어'
이제는 뭐가 진실인 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내와 만날 때마다 세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미사의 뒷정리를 끝낸 세리스는 본당의 회의실로 향했다.
3층으로 올라가서 왼쪽 문으로 들어가자, 성기사들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를 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그럴 수 있죠. 그러면 이제 회의를 시작할까요?"
고개를 숙인 세리스는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세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시에 그녀가 회의를 주도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언가 얘기를 하는 것을 기다렸다.
세리스는 어떤 얘기를 시작할까 고민했다.
아직도 사티라엔 여러 가지 문제가 혼재해있다.
빈민 구제도 심각한 문제로 치닫고 그로 인해 계층끼리 갈등도 심해진다.
마족을 숭배하는 이교도들도 심각하지만.
세리스는 그런 것들보다 신성교단에 대해 생각했다.
'이들은... 어떨까.'
신성교단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실이라면 신성교단에 문제가 되고, 거짓이라면 성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고?
'그딴 게 말이 돼?'
세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성녀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리스를 모두 의아하게 쳐다봤다.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모두가 걱정하는 가운데, 세리스는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암시장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고치겠다고.
"고위사제들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실제로 신성력을 가진 이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이스타르님의 가르침대로 행하겠다고.
"저는 그들을 놔둘 생각이 없습니다. 무조건 처단할 생각입니다."
모든 것은 이스타르님의 뜻대로.
***
"당신. 신성교단의 신도였나요?"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이스타르를 믿는 척 하는 정도는 껌이었다.
종교의 교리는 지구의 종교와 닮아있고, 교단 영웅들의 설정을 알고 있으면 연기야 쉬웠다.
"성녀를 움직이게 하려고 연기하는 거야."
"흐음... 성녀를 이용한다니 벌 받을 행동이네요."
종교와는 제일 어울리지 않는 라이라가 그렇게 말하다니 이상하다.
침대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던 라이라는 궁금하다는 듯이 성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내가 부탁한 것들을 이용하려고."
"명단을 달라고 했죠."
지하 경매장을 이용하던 고위 사제들.
그들의 명단과 함께 증거가 될 법한 것들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성녀가 먼저 다가오려나.'
정보를 달라고 하면 좋고.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해도 정보를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신성교단의 내부가 분열할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