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6화
* * *
푸니아의 상태는 좋다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건물이나 성벽의 상황 같은 것은 좋은 편에 속했지만.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몰골만 봐도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피골이 상접하고 눈빛은 굶주린 짐승의 것이었다.
"확실히 식량 사정이 좋지 않나봐."
노아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자 껍질이 벗겨진 나무들이 보였다.
"먹을 게 없어서 나무껍질을 달여 먹은 거야.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알거든."
그만큼 굶주렸다는 이야기다. 이러면 얘기가 더 쉽게 풀리지.
스스로를 경비대장이라고 칭한 이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강한윤은 그를 보고 들으라는 듯이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일단 가지고 온 식량을 이쪽에 옮겨놓고. 흐음."
일부러 뜸을 들인 뒤에 말을 이었다.
"경비대장... 마일스라고 했나?"
"예...!"
"푸니아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 군. 그래서 배급을 하려는 데."
"배급 말입니까..?!"
여태까지 어둡기만 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앞에서 기적이라도 목격한 듯이 밝은 표정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조건이 붙는다면 좋지 않은 방향일 테니까.
"우리도 공짜로 식량을 뿌릴 순 없지."
강한윤은 배낭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종이를 읽어내려 가던 그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이게 대체...?"
"뭐긴 뭐야. 거기에 적힌 내용대로지."
오드웰 연합군의 소속이 되기로 결정하겠습니다.
오드웰 연합군의 작전 및 작업에 동원되기를 희망합니다.
달마다 배급을 주는 대신에 노동력을 착취한다.
오드웰식 월 정액제였다.
남는 식량을 뿌려서 노동력을 얻는 정액제.
"이건... 무슨 뜻입니까?"
"뭐긴 뭐야. 거기에 적힌 말 그대로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가 손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아직 이해를 못했나보네. 친절하게 가르쳐줄 생각이 있었다.
"오드웰 연합군 소속이 되겠다고 손도장을 찍은 뒤 식량을 받아가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없이 가만히 있거나."
오드웰 연합군에 유리한 행동을 강제하도록 낙인을 찍을 생각이었다.
"이건..."
경비대장 마일스는 종이를 잡고 부르르 떨었다.
식량을 준다는 대가로 연합군의 소속이 되라고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푸니아에 남아있는 이들은 빈민이나 돈이 없는 평민들이었다.
기사들은 후퇴를 하면서 모든 식량을 가져가버렸다.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전부 가져가면서 도망갔다.
남은 돈이 없으니 상인들이 오더라도 거래할 수가 없었다.
거래를 하더라도 상인들은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했다.
살림살이를 다 팔아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하루치에 불과한 식량이다.
식량도 없어서 나무껍질이나 나무뿌리를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식량을 주겠다고 하는 이 사내.
오드웰 연합군 측의 인간.
그것만으로도 이목이 쏠리지만, 그가 말하는 것의 내용은 마일스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푸니아를 아예 연합군의 소속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저 점령지가 아니라.
여기의 인원 전부에게 소속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여기가 왕국에 다시 점령당한다면..?'
그때는 연합군 소속이 된 영지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포로가 되거나 노예가 되고 처형당하겠지.
마일스는 이 요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걸 알아차렸다.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식량을 준다고 했다.
생명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식량은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마일스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목숨을 담보로 얼마 어치의 식량을 받을 수 있는 지라도 알고 싶었다.
강한윤은 뒤에 놓친 밀과 보리 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 여기 있는 전부. 아니 다음에 올 보급도 나눠줄 수 있지. 연합군 소속의 일원이라면 말이야."
일부러 연합군 소속에 힘을 줘서 말했다.
연합군 소속이 아니라면 절대 먹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정은 내렸나? 마일스? 결정을 내렸다면 주민들에게도 설명해주고 종이를 나눠주도록."
강한윤은 종이 뭉치를 건넸다.
마일스는 조용히 종이를 받아들고 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걸었다.
"강한윤. 정말 악마같군."
"동의하시지 않았습니까.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이 작전을 수락한 것은 에우제니아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최종결정권자는 그녀였다.
"나도 동의했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데. 저기 봐. 우리를 엄청 나쁜 놈처럼 보고 있잖아,"
"뭐 그래봐야. 하루 이틀 가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배가 부르고 만족하다보면, 이런 분위기는 자동으로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에우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병들은 어떻게 모집할 거지?"
"예?"
"여기 안에서 또 신병들을 모집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간단하죠."
강한윤은 마일스가 연합군 가입 동의서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주민들이 일일이 작성하고 손도장을 찍는 것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었다.
마침내 작성시간이 끝나고, 마일스는 동의서 뭉치를 가져왔다.
"거의 다 동의를 했나보군."
그가 건네준 종이의 두께가 두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절하는 인원들이 있기 마련.
"마일스. 거절한 인원들은 어떻게 된 거지?"
다들 굶어죽기 직전의 모습인데. 식량을 마다한다니?
강한윤이 의문을 담아서 묻자, 마일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거절한 대부분의 인원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다니. 식량을 준다는 것 말인가?"
마일스의 침묵은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믿을 수 없다니. 그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식량을 뿌리고 나면 해결 될 문제네.'
식량을 한 번 뿌린다면 믿게 되겠지.
강한윤은 걱정하지 않고 마일스에게 말했다.
"연합군 소속이 되는 것을 찬성한 인원들에게 전하고 싶군. 연합군의 병사가 되는 건 어떻냐고.
입대에 관한 설명을 들기만 해도 고기와 돈을 지급하도록 하지."
"...또 전하고 오겠습니다."
마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경악하고 있었다.
푸니아에서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원을 연합군 소속으로 만들고.
이번에는 병사로 만들기 위해 또 다시 꼬드기고 있었다.
그렇게 광장에 모인 것은 백 단위의 청년들.
'생각보다 많이 모였네.'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서 광장에 앉아있었다.
남자가 5. 여자가 2 정도의 비율.
생각보다 여자의 비율이 높았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은 강한윤의 앞에 모여서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먹을 걸 준다기에 나왔을 뿐인 배고픈 이들.
그들의 앞에 강한윤이 당당하게 나섰다.
뭐야 사람?
오드웰 연합군인데?
이종족이 대부분이기에 강한윤의 등장은 작은 소란을 만들었다.
같은 인간으로 보이는데, 지위가 낮은 것 같지 않다.
주변에서 그를 극진히 대하고 있는 게 태도에서 드러나 있었으니까.
모두의 이목이 쏠렸을 때, 강한윤은 크게 손짓을 했다.
광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간단한 빵과 소세지가 주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굶었던 이들에게는 천상의 음식과 다를 바 없겠지.
"다들 편하게 먹으면서 듣도록."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느낌이다.
주위의 반응을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군인을 모집하고 있다. 특별한 임무를 맡길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일개 병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그저 평상시에 하던 것처럼 푸니아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면 된다.
임무나 근무라고 해봐야 푸니아 근처에서만 활동하게 되겠지."
반응이 미묘하지만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병사로 들어온다면 그에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겠다. "
영웅 급으로 뛰어난 병사가 아니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연합군은 물자가 널널하다.
세계수로 인한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으니까! 굶을 일은 절대 없게 하겠다!
푸니아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절대 없을 거다!"
굶어죽는 사람이 없다.
그 한마디에 이들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우리는 협렵과 상생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대다수가 그게 싫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된다면 푸니아를 버리고 안다이얄로 돌아갈 뿐이다."
강한윤은 쌓여있는 식량과 보급 물자를 발로 툭툭 두들겼다.
"이것들과 함께 말이야."
반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하지만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들에게 확실한 어필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거 말고 더 어필할 게 있나.'
오드웰 연합군의 또 다른 장점?
뭔가 하나는 더 보여줘야 확실할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던 강한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크엘프였다.
"노아."
"응 왜?"
그녀를 부르자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무슨 일이냐고 묻듯이 다가온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후우. 잠시 한숨을 쉬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연합군의 여자들은 예쁘지."
"...강한윤?"
술렁술렁.
광장에 앉아있는 이들은 상황 파악이 안돼서 술렁였고.
신병 모집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연합군의 병사들은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 한 가운데에서 대놓고 노아에게 키스를 했다.
평소보다 가벼운 키스.
"무..무슨.."
노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귀를 파닥파닥 거렸다.
부끄러운 것 같다.
"이렇게 예쁜 여인들이 가득한데. 굳이 칙칙한 인간 세력 쪽에 붙을 이유가 없지. 안 그래?"
남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좋아졌다.
엘프가 확실히 예쁘긴 하네.
저기에 있는 오크도 엄청 예쁜데?
근데 어차피 할 게 없으니 들어가는 게 맞지 않나?
남자들이 있는 쪽에서 술렁이고 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
하지만 이렇게 얘기를 하고나니, 여자 쪽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노아. 정보장교 불러와."
그럴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놓은 카드도 있었다..
남성 엘프 중에서 그나마 가까운 사이인 정보장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강한윤 소령님."
그가 다가오자 여자 쪽도 술렁거렸다.
와 얼굴 봐...
얼굴에서 빛이 나는데..?
"반응이 좋습니다. 정보장교님. 잘생겼다고 하네요."
"그렇습니까? 전 마을에서 못생긴 쪽에 속했습니다만.."
그는 이런 칭찬을 받는 게 어색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게 못생겼다고...?
말도 안 돼..
다들 연합군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하게 오른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준수하네.
"아무튼. 입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얘기를 하도록."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을 어필했더니 반응이 좋네.
이것만으로도 신병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이 눈에 띈다.
신병 교육은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딱 한 달이면 참 군인이 될 거다.
피가 나고 알배기고 이갈리는 훈련을 받다보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정말... 돌아버린 거냐."
물론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에우제니아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보니까 어필할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물자가 넘친다는 거랑, 미모의 평균을 높여주는 엘프가 많다는 것.
그것 말고 연합군의 또렷한 장점이 없었다.
다른 종족끼리 다툼이 일어나고, 전력이 개판이라 아슬아슬하다. 같은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들의 교육은 누가 담당합니까?"
"남는 인원 아무나 번갈아가며 시켜도 충분하겠지. 어차피 무기를 사용할 줄만 알면 되니까."
푸니아만 지키고 근무를 설 인원을 구하는 거니까.
적당히 교육만 시키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윤은 나무 그늘에 누워서 신병들이 훈련받는 걸 구경했다.
당일부터 시작된 신병들의 교육.
신병 한 명과 선임 한 명으로 나눠서 각자 생활을 하고, 나머지 시간엔 모여서 훈련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만으로도 푸니아의 치안과 분위기는 좋아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사티라 쪽에 뭔가를 해야 하는데.'
사티라는 중부와 이어지는 도시다.
염연히 말하자면 북부와 중부 어디에도 걸쳐지지 않은 애매한 위치지만.
반대로 북부와 중부 어느 쪽으로도 통할 수 있는 길목이다.
'다만 문제점이 있다면.'
사티라는 귀족이나 왕국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
사제와 성기사들의 집단. 신성교단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라이라 혹시 있어?"
이대로 느긋하게 저녁 시간까지 눈이나 붙일까. 했는데.
라이라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다.
강한윤의 위로 누군가가 다가온 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자 가장 먼저 빨간 드레스와 검은색 끈 팬티가 보였다.
라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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