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80화
* * *
"연인 관계?"
"예. 연인 관계입니다."
혹시 에키르가 알아먹지 못할까봐. 사족을 덧붙였다.
"그것도 추후에 결혼할 전제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라고 했나?"
"예."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에키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하아.
숨을 가볍게 내쉰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전부 밖으로 나가도록. 에리엘은 여기에 앉거라."
그의 명령대로 호위하고 있던 엘프 기사 셋이 바깥으로 나갔다.
회의실에 세 명만 남게 되자,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에키르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침을 삼켰고.
에리엘은 의자를 끌어와서 강한윤의 옆에 앉았다.
"...자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에키르가 느끼기엔 타이밍이 교묘했다.
약혼과 혼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다니.
이건 명백히 의도가 담겨 있었다.
에리엘의 혼담을 망치려는 의도가.
대답은 의외였다.
"에리엘의 부탁이었습니다."
"에리엘이?"
그가 놀라서 에리엘을 바라보았다.
에리엘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강한윤의 얘기를 긍정하듯이 말이다.
"에리엘."
"예. 제가 부탁했습니다."
여지껏 혼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에리엘의 생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혼기를 벗어났기에 짝을 맺어줄 생각이었다.
에리엘은 능력이 있었다. 미모도 뛰어난 편에 속했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고 있었건만.
일종의 시위를 하는 것처럼,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에리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 저도 이제 어린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아비가 될 사람은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
지아비라니.
에키르의 시선이 강한윤에게 향했다.
남부에 있었을 때부터 시선에 두고 있었던 작전장교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에 어울리는 상대인가?
가문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인간과 배경이 튼튼한 에리엘과의 혼인.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에키르의 결론이었다.
"에리엘. 이건 가문을 위해서다."
"...아버님은 항상 그러셨지요."
에리엘이 울분을 토해내듯이 말을 이었다.
"가문. 가문. 그놈의 가문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가문에 관해서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가문. 그딴 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속을 답답하게 만들고 우리 사이를 막으려고 하는 건가.
에리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문을 위해서 행동해왔다.
가문을 위해서 검을 잡고.
적을 쓰러뜨리고 작전을 수행했다.
더 이상은 싫다.
가문에 속박 당하는 건 싫다.
가문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싫다.
가문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교제를 두려워하는 것도 더는 싫었다.
"아버님. 제가 가문을 위해서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수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에리엘은 기대와는 달리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에리엘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둘째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남자아이를 원했던 에키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자아이처럼 자랐다.
검을 잡고 가문을 위해서 군인까지 되었다.
에키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가문을 위해서 행동했다.
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이와 교제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제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불행해지길 바라십니까?"
에리엘의 격한 반항.
에키르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에리엘이었으니까.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던 에리엘의 첫 반항이었다.
"에리엘 너를 위해서다."
"아뇨. 가문을 위해서겠지요."
에리엘은 결심을 내린 것처럼 말을 이었다.
"어뇨. 굳이 동의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아버님이 저희 사이를 축복해주지 않으신다 해도 저희는 계속 교제할 테니까요."
"에리엘. 정녕 내 뜻을 모르겠느냐."
"아버님은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먹먹한 목소리.
에리엘은 지금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목이 메였다.
"가문의 힘이 두렵지 않느냐."
에키르의 한마디.
가문. 가문의 힘을 사용한다면, 강한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에리엘의 시선이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었다.
동요를 알아챈 강한윤이 슬며시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의 따스함을 느꼈다.
"가문의 힘으로 억압하더라도 제가 그를 지켜낼 겁니다."
"척을 지겠다는 거냐?"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되겠죠."
이렇게 말대꾸를 하고 반항을 하다니.
무언가에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에키르의 시선이 강한윤에게 쏘아졌다.
"강한윤 대위. 자네가 바람을 불어넣었군."
"그럴 리가요. 저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억압에서 풀려난 것은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무덤덤한 대답에 에키르가 크게 당황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반이 없는 인간은 아니지 않느냐..!"
"기반이 없다면 그의 기반이 되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명백한 거절의 대답.
에키르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었다.
어차피 거절을 당할 게 뻔했으니까.
그는 마른 세수를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부의 클로버 가문과의 혼담은 없는 걸로 되겠군.'
딸인 에리엘이 이렇게 싫어하는 데 억지로 진행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소드마스터 하급. 아니 어쩌면 중급까지 올랐을 에리엘이다.
고집을 꺾으려고 병력을 동원한다면, 제압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은 부러지기 마련.
에키르는 그렇게까지 시도하고 싶진 않았다.
'강한윤 대위.'
머리색이 특이하게 까맣다는 걸 제외한다면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이력은 평범하지 않았다.
작전은 항상 성공적이고, 전투는 대부분 승리한다.
단숨에 대위. 아니 이젠 소령까지 올라갈 법한 인재였다.
기반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 가장 큰 흠이었지만, 재주 없는 놈팽이가 아닌 건 다행이었다.
하아. 에키르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에키르에게는 단 두개의 선택지만 존재했다.
강한윤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거나.
단 하나뿐인 혈육 에리엘과 연을 끊거나.
선택지가 없었다.
"... 혼담은 없던 걸로 하겠다."
에리엘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 대신에 강한윤 대위. 자네는 시간을 내서 헤티미아로 내려오도록. 대화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군."
헤티미아.
엘프 수만 명을 포용할 수 있는 규모인 남부의 대도시다.
에키르의 세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강한윤은 헤티미아 남부에 있는 정령의 숲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정령의 숲을 게임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느꼈으니까.
에리엘과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에리엘과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 자네만 오도록. 단 둘이 얘기나 하지."
헤티미아로 가면 남들 모르게 슥삭 해버리고 묻어버리려는 거 아닌가.
강한윤은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할 것 같나?"
"...아닙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서 내려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죽이진 않고 죽도록 패놓겠다는 건가?
꺼림칙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에리엘."
"예. 아버님."
"알아서 하거라. 하아. 고집이 누구를 닮은 건지.. 하지만 혼기가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 아버님?"
"최소한 3년. 3년 이내로 후사를 봐야하지 않겠느냐. 이제는 나이가 곧"
"나이 얘기를 왜 꺼내십니까!"
에리엘이 당황하며 손사래 친다.
강한윤의 눈치를 보면서 에키르의 입을 막으려는 듯이 달려들었다.
"강한윤 대위도 말은 안하지만 나이 차이를 신경 쓸 지도 모르지.
올리비아도 그랬거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나이 차이가 20살이 넘게 나니 세대 차이가 난다고 말하더군."
"아무튼 그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아닌 건가? 인간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
에리엘의 나이를 떠올리고서 쓰게 웃었다.
"주위의 엘프 놈들의 자식은 다 결혼한 것을 알고 있느냐.
결혼이 느리다고 소문난 에르페르 경의 아들도 아이를 낳았는데. 나는 아직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 하셔도 됩니다! 결혼 늦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에리엘의 확답을 듣고서야 에키르는 만족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는 천천히 회의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래. 일단 혼담은 없던 게 됐다고 전해야겠군.
가문을 성장시키는 건 혼담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니까 말이야."
"... 아버님"
에키르의 진심이 묻어나온 한마디였다.
지금까지 에리엘을 과도하게 압박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진심으로 위하고 있었다.
에리엘도 그 마음을 느꼈다.
"3년이다. 에리엘."
한 마디를 더 하고서 에키르는 회의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에키르도 은근히 에리엘의 나이를 신경 썼구나.
"에리엘 3년이라는 데? 나이가"
"강한윤. 굳이 그 얘기를 해야겠나?"
에리엘이 그만 하라는 듯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아프다.
"아무튼 허락을 받긴 했네."
"하아. 그렇지. 안될 줄 알았다만.. 결국엔 어떻게든 됐군."
에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허락을 받았으니까 이제 해도 되는 건가?
강한윤은 넌지시 말했다.
"그렇다면 해도 되겠네."
"무엇을... 아. 그렇군..."
에리엘이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뒤로 할 필요가 없었다.
"에리엘 일단은 바깥으로 나가자."
강한윤과 에리엘은 회의실에서 나왔다.
*
바깥은 노을이 지며,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지 배도 고프다.
여기 근처에 먹을 만한 음식점이 있으려나.
아르엔틸은 처음 와보는 거라서 음식점은 모르는데.
강한윤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에리엘은 살며시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강한윤의 팔에 은색의 플레이트 메일이 닿았다.
"딱딱하고 차가워."
"어쩔 수 없지. 갑옷을 벗어둘 곳이 없으니 말이야. 일단.. 이동하는 게 어떤가. 강한윤."
"그럴까."
주변에 맛있는 집이 있는 진 모른다.
그나마 비싸 보이는 곳에 들어가면 최소한 먹을 만하겠지.
강한윤은 제일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다.
특별한 부분은 없지만, 모난 곳은 없는 달달한 소스와 어우러진 레어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온 에리엘은 다시 달라붙어서 강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이제 숙소로 가도록 하지."
이번에도 가장 비싸 보이는 고급 여관으로 향했다.
1박에 3골드라는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했지만, 그만큼 시설이 좋고 방음이 되겠지.
열쇠를 받아들고 2층으로 이동했다.
2층으로 올라가서 바로 오른쪽의 방이다.
"오."
생각보다 훨씬 넓다.
성인 남성 세 명은 잘 법한 사이즈의 침대와 유리로 비쳐 보이는 욕실까지.
대놓고 커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방이었다.
철컹
갑옷과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에리엘이 옷을 한 꺼풀씩 벗었다.
플레이트 메일을 벗자, 안에 가볍게 받쳐 입은 탱크탑이 보였다.
하얀색 가슴이 모아져서 자연스럽게 꼴림을 유도했다.
스읍 하 스읍
강한윤은 에리엘의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땀을 흘려서 그런지, 달콤한 장미향이 진하게 난다.
"이...이게 무슨 짓인가!"
"에리엘 성분 섭취 중인데?"
낮의 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더더욱 에리엘의 향기가 그립다.
스읍 하
또 다시 흡입하고 진정이 되는 기분이 느껴졌다.
"땀을 흘렸으니 맡지 마라..!"
"오히려 좋아."
"오히려 안 좋다!"
에리엘의 가슴에 쪽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엉덩이를 움켜쥐며 딱 달라붙자, 에리엘은 처음처럼 격한 거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앗, 하으... 강한윤..."
이제는 부드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오히려 만져달라는 듯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든다.
가슴. 쇄골. 목덜미.
천천히 올라가고 이번에는 키스타임이다.
에리엘과 입을 맞추고 혀를 휘감았다.
미끌거리면서도 끈적한 혀를 비비고 입술로 쪽 빨아 당기자. 에리엘은 암컷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달라붙어왔다.
"하아.. 너무 키스를 잘하지 않은가."
"그럴 수밖에 없지."
허구한 날 키스만 하는데 못하는 게 이상하다.
에리엘은 이번에 바지를 벗었다.
"일단 옷부터 정리를 하는 게 어떤가."
"이래도 할 수 있잖아."
"하읏... 방해 된다앗..."
에리엘의 가슴을 만지고, 뒤치기를 하듯이 자지를 비볐다.
팬티 위로 자지를 꾹 꾹 눌러주자,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또렷한 얼룩이 생긴다.
"기대하고 있으면서."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몇 달 동안 기다려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랑을 자각하고,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싶었다.
에리엘은 음란하게 혀를 내밀고 키스를 하며 옷장의 문을 열었다.
최소한 바지는 구김 없이 정리를 해야 하니 말이다.
"이건..."
옷장 안에는 여러 가지 옷들이 들어있었다.
마치 일회용으로 쓰라는 듯이 야한 복장들.
그 중에서 하얀색 란제리 속옷이 보였다
허벅지까지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 가릴 정도의 크기와 프릴이 달려있어서 마치 신부가 입는 짧은 드레스처럼 보였다.
에리엘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얼굴을 붉혔다.
"강한윤... 내 처음을 가져가다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