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5화
* * *
시간이야 넘친다.
강한윤에게 넘치는 것은 시간이었다.
바쁜 시기를 제외하고, 강한윤은 항상 시간이 넘쳤다.
따로 근무에 편성된 것도 아니고 가끔 당직을 서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는 부대에서 가장 널널하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혹시.. 따로... 어딘가로 가실 생각은 없나요?!"
"..."
강한윤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외출이야 평상시에도 하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외출이라면 문제될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상태가 이상했다
.
차가운 밤공기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달아올라 있고, 묘하게 시선을 피한다.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100%다. 100%로 호감을 가진 여성의 모습이었다.
"저기.. 그..."
"네! 편하게 대답하세요!"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니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대체 뭐부터 말을 해야 하나.
"일단 시간은 있습니다만 어디로 가는 지는 알고 가고 싶습니다."
"아... 그건.. 경치 좋은 곳이 있거든요. 그쪽으로 갈까 했는데... 안되나요?"
숨기려는 듯이 말을 하지만,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그녀다.
강한윤은 고민했다.
베아트리스와 관계가 진전되는 건 좋다.
천족과 연결다리가 있으면 좋기도 하고, 무엇보다 베아트리스는 예뻤으니까.
하얀색 속옷 같이 생긴 옷이나, 가슴이 부각되는 원피스를 입는 그녀는 마치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로서 끌리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지.
하지만 강한윤이 고민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무단 외출인데 괜찮으려나.'
최소한 말은 해놓고 가야할 것 같은데.
에우제니아 빽만 믿고 그냥 나갔다 올까.
곰곰이 고민하던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베아트리스님이 추천하는 곳이라면 정말로 경치가 좋은 곳이겠죠."
"네...! 그렇죠! 엄청 좋은 곳이에요! 지금 바로 갈까요?"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등에 평소처럼 올라탔다.
포근한 날개가 닿아서 부드러웠다.
"그럼 날아갈게요."
그녀가 날갯짓하자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안다이얄 거점이 점점 작아지고, 높이 솟아오른 채로 움직인다.
'내일 일과 전에 돌아오면 뭐라 안하겠지.'
강한윤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한 고민은 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기로 말이다.
안다이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보아선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조금 멀리 가네요."
여기에는 안다이얄로 돌아가는 샛길과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 밖에 없는데.
강한윤은 그녀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 지 알고 싶었다.
"아.. 그.. 바닷가 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바다요?"
"네! 바다는 밤에 보면 엄청 예쁘거든요!"
"그런가요? 저는 베아트리스님이 배신해서 저를 팔아넘기는 상상 중이었어요."
"네?!"
"장난이에요."
베아트리스가 당황하는 모습에 작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말 한마디에 따스함과 신뢰가 가득 담겨있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런 걸까.
강한윤의 의문은 길어지지 않았다.
"다 왔어요."
베아트리스가 착지하기 위해 높이를 낮추고 있었으니까.
도착한 곳은 북서쪽의 외딴 곳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없다기 보단 바다뿐이었다.
"섬...이네요."
"네! 제 전용 별장이 있는 섬이에요!"
"별장이요?"
그녀가 움직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확실히 별장이 있었다.
오두막으로 지어져있는 튼튼해 보이는 별장이다.
비나 눈에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자그마한 동굴 내부에 지어져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게임에서는 올 수 없는 지역이라서 생각해본 적 없었다.
바다 경치를 즐긴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말이다.
강한윤은 베아트리스를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지 바닥의 나무에선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걸을 때 마다 튼튼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베아트리스님 저를 여기에 데려온 이유가 뭐죠?"
강한윤은 알지만 물어봤다.
여기에서 혹시나. 만에 하나지만.
그녀가 '그냥 같이 놀러 오고 싶었거든요.' 같은 말을 해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으니 말이다.
"어.. 저기.. 그게.."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허둥지둥 대며 눈을 피하고 팔을 휘젓다가 찬장을 열었다.
"일단.. 술부터 한 잔... 어떠세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버무린 뒤, 바다 경치를 보며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도수가 강한 술은 아니라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고, 안주는 그녀가 과일과 건빵 비스 무리한 과자를 꺼내 와서 이것으로 충분했다.
"저기.. 강한윤님.."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제는 그런 사이지 않습니까."
"아.. 예! 그런 사이니까요!"
그런 사이가 아니라도, 그녀의 계급이 중장이다.
계급이 훨씬 위에 있는 그녀라서 편하게 말해도 됐다.
하지만 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강한윤은 적당히 친분도 생긴 지금 더 편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어차피.. 그런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배경 삼아 얘기를 나누고 술을 마신다.
그것도 남녀 단 둘이서.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 수밖에 없다.
'애초에 베아트리스가 유도했지.'
그녀의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당연하다.
강한윤은 의자를 베아트리스 쪽으로 움직였다.
"저기... 그.. 강한윤..?"
"네."
"너무 가깝지 않나요?"
"그런가요? 딱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한 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술을 마신다.
베아트리스는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건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얼굴이 붉었다.
휘이이잉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바람이 분다.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 걸까.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몸이 조금 차가워졌다.
"날이 조금 춥네요."
낮에는 덥고 저녁에는 추운 말도 안 되는 날씨다.
곧 있으면 제대로 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이렇다니.
산맥 쪽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강한윤이 자그맣게 몸을 떨자, 베아트리스는 의자를 더욱 가까이 붙였다.
"그.. 추우면... 이러면 될까요?"
그녀가 날개를 움직여서 강한윤을 덮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데다가 날개가 포근해서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좋은 향도 난다.
"괜찮네요. 베아트리스님."
"그러..게요,"
더욱 밀착해서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강한윤과 눈이 마주친 베아트리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베아트리스님."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깍지를 끼진 않았지만, 그녀의 오른손 위로 왼손을 겹쳤다.
"아. 혹시 불편하셨나요?"
"아뇨.. 그.. 갑작스러워서요."
"그런가요?"
강한윤은 깍지를 끼듯이 손을 겹쳤다.
"지금은요?"
"너무... 과감한 거 아닌가요?"
"베아트리스님이 저를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지만요..."
"저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뭘까요? 베아트리스님. 저는 정말로 모르겠는데요."
강한윤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베아트리스의 손을 주물렀다.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자극을 줄 때마다 작은 신음을 읏. 읏. 하고 내뱉는다.
완전히 숙맥인 것처럼 보였다.
이러니 여기까지 데려와서도 진도가 나아갈 생각이 없지.
강한윤은 잔에 남아있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이 떨어졌는데 한 병 더 마실까요?"
"...네"
아마도 그녀에게 용기가 생기려면, 알코올의 힘이 더 필요하겠지.
강한윤은 다른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녀의 잔에 먼저 술을 따랐다.
"확실히 야경이 예쁘네요."
강한윤은 지금의 장소에 만족하고 있었다.
바다의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밤하늘은 별과 달로 환하게 빛나고, 바다에 비쳐보여서 아름다웠다.
"그렇죠? 여기 만들었을 때도 그랬어요. 엄청 예쁘다고. 다음에 오게 되면..."
"오게 되면..?"
"그..."
그녀는 한참을 뜸들인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남자랑.. 오고 싶다고요..."
"푸흣"
"아니 왜 웃어요! 전 엄청 진지하거든요!"
"솔직히 웃기잖아요. 뜸들이고 폼잡아놓고서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게."
"그...그건 맞지만...!"
"그리고 그것뿐이에요?"
"네? 뭐가요?"
"그냥 '남자' 랑만 오고 싶은 거냐고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믿을만한 남자인데..."
베아트리스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며 강한윤은 웃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해야지.
강한윤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허릿춤에 손을 올렸다.
베아트리스가 몸을 움찔했다.
"베아트리스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 저를 부른 건 그런 뜻이죠?"
강한윤은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매만졌다.
허리의 곡선을 타고 올라가는 손은 그녀의 날개 뼈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고, 부드러운 날개로 향했다.
날개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듯이 살살 긁었다.
"흐읏... 그렇게 만지지 마요."
"왜요?"
싫은 반응은 아니다. 그저 날개가 민감한 부분이라 그러는 것 같았다.
베아트리스의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날개를 만지는 것은 질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강한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베아트리스의 몸을 당겨왔다.
그녀는 순순히 다가온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베아트리스님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강한윤은 손으로 베아트리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키스하겠다고 알려주듯이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읏.."
베아트리스의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강한윤은 리드하면서, 키스를 했다.
쪽 쪼옥 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입술을 부딪치고, 베아트리스의 팔을 잡아서 목덜미로 옮겨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팔을 감아오며,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몸의 떨림도 잦아들고, 파도소리와 키스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와 입을 맞추면서 혀를 살살 넣었다.
그녀는 수줍게 입을 벌렸고 혀끝만 닿을 정도로 미세한 틈이 생겼다.
츄읍 츄웃 츕
그녀의 입을 비집고 혀를 섞는다.
격렬한 혀 움직임에 그녀는 더욱 세게 껴안아왔다.
3분은 족히 넘을 시간동안 키스를 하고 입을 떼자.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너무 잘해서 놀랐다.
그가 하자는 대로 몸이 알아서 움직이고, 혀를 범해졌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강한윤은 남아있는 술을 입으로 털어 넣은 뒤,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 술을 흘려 넣었다.
꿀꺽 꿀꺽
전부 삼킨 그녀는 입가에 흘러내린 술을 팔로 닦았다.
"이렇게 마시니까 더 맛있죠?"
"모르겠어요.. 그냥... 네. 뭐가 뭔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요?"
"...네"
이제는 바깥의 날씨가 더 쌀쌀해지기도 해했고, 술을 다 마셔버려서 볼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일어나서 별장으로 향했다.
1층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침대가 있고, 보기 좋게 이불이 셋팅이 되어있었다.
그녀가 미리 와서 해놓은 걸까.
강한윤은 침대에 누워서 팔을 뻗었다.
"이리와요."
베아트리스는 수줍게 강한윤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바깥에서 하던 것처럼 입을 맞추고, 또 다시 키스를 한다.
쪽 쪼옥 쪽
이번에는 서로를 완전히 껴안은 채로 키스했고, 베아트리스는 다리에 무언가가 닿는 걸 느꼈다.
다리는 아닌 것 같고 뭉툭한 게 있다.
키스가 끝난 뒤에야 베아트리스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이렇게 큰가요..?"
그녀는 바지 너머로 드러날 정도로 커진 강한윤의 물건을 가리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