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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76화 (76/163)

〈 76화 〉 73화

* * *

"강한윤!"

노아가 강한윤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두 팔로 껴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강한윤은 그녀의 행동에 긴장이 풀렸다.

한편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정찰대의 인원들은 그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둘이 애인관계라는 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훈련과 작전을 빡세게 하는 노아가 애교를 부리는 것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크흠.."

이렇게 주목받는 건 원하지 않는데. 강한윤이 눈치를 주자, 노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렇지?"

노아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강한윤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이겼어?"

"당연히 이겼지."

"피해 규모는?"

"병력차이가 나니까 쉽게 이기진 못했어."

"그건 좀 안타깝네."

강한윤은 아쉬움을 표했다. 대승을 거뒀다면 이대로 밀고가도 괜찮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럼 조금만 더 휴식하고 바로 복귀하자."

대승을 거두지 못했다면, 뒤처리를 많이 해야 할 테니 말이다.

3분정도 달라붙은 채로 휴식을 취한 뒤, 노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여기에 있어봐야 더 할 것도 없으니까.

안다이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한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수치에 불가하다고 했었나.'

강한윤은 어디선가 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가까이서 보면 슬프지만, 멀리서 보면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끔찍한 전쟁의 참상.

그는 시체를 피해서 진흙과 피로 섞인 땅을 밟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주변에 온통 시체들이 가득했다.

인간, 수인, 엘프, 오크.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종족이 뒤섞여있었다.

'보고서로 볼 땐 아무 생각도 안 들지만... 이럴 땐 아무래도 감상적이 되네.'

보고서를 읽고 작전을 짤 때는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도 게임 인터페이스를 이용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체 수백구가 쌓여있는 현장을 보니 자연스럽게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몇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글보다는 쌓여있는 시체 수백구가 충격적이니까.

강한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뒤처리를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시체를 수레에 담아서 옮기고, 두 사람씩 잡고 옮겼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에우제니아도 있었다.

"에우제니아님."

"어. 강한윤 왔네."

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서 너저분했고, 몸 곳곳엔 진흙이 묻어있었다.

"예. 작전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여기 뒤처리 좀 하자."

그녀는 턱짓으로 시체가 쌓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연합군의 시체는 어떻게 합니까?"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뭘 어떻게 해. 장례 풍습은 종족마다 다르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아..."

에우제니아는 주위를 둘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 없이 많은 시체를 보며 언제 다 치워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군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그게 문제야. 일단은 비슷하게 수습해야지. 계급이 있는 녀석들은 거래를 해도 되고. 뭐,,, 나머지 대부분은 화장하게 될 거야.

신원확인이 된다 한들 전주 직접 전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연합군 소속이었다면, 어떻게든 됐을 텐데.

적군의 병사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구덩이 하나를 판 뒤에 그곳으로 모으고, 기름으로 불을 지르는 수밖에 없다.

해충들이 꼬이기 전에 처리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에우제니아는 연합군의 시체를 하나 더 들어 올려서 수레에 담았다.

강한윤도 그 옆에서 시체를 힘겹게 옮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들리질 않는다.

"더럽게.. 무겁네..."

"크훗. 그래 당연히 무겁지."

그녀가 작게 웃으면서 도와주었다.

"체력도 안 좋으면서 뒷정리를 하려고 하네. 그냥 저기 가서 쉬기나 하지? 뭐 물 같은 거라도 나르던가."

"하아..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시체 몇 구를 치우지도 않았는데, 금세 퍼져버렸다.

푸니아 거점까지 왕복한 것도 피곤하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정말 많이도 죽었네요."

"그게 전쟁이니까."

강한윤은 고개를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병사들도 열심히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노아는 정찰대원들과 함께.

에리엘, 헨리크 공작은 매복조와 함께.

시체를 처리하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병장기를 치웠다.

'이기는 건 좋은데. 누군가가 죽는 건 역시 찝찝하네.'

이기는 전투도 지는 전투도 결국에는 누군가는 죽는다.

승리만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한들, 죽음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검과 창, 방패를 주워서 나르던 강한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게임의 인터페이스 그대로다. 강한윤은 눈을 찌푸렸다.

이 창 때문에 감성에 젖은 분위기가 싹 날아 가버렸다.

'여기가 현실이던 리얼리티한 게임이던 상관없긴 하지.'

어쨌든 이겨나가야 하는 게 강한윤의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타이밍에 메시지를 띄웠어야 했냐고.'

정말 악취미가 가득한 게임이라는 생각을 한 강한윤은 전투의 흔적들을 하나씩 치워나갔다.

***

어두운 새벽이 끝나고, 밝은 아침이 찾아온다.

그제야 뒷정리가 일단락되고 강한윤은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아."

피곤하다.

강한윤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누웠다.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뻐근하다.

이대로 다음날까지 푹 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전투는 전투고 일과는 일과니까.

전투를 한 병사들도 경계근무는 들어가야 한다.

강한윤은 정찰을 끝낸 천족이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 작전을 짜야했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 하냐가 중요한 순간이니까.

'망할.'

강한윤은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천족이 가는 데 1시간. 오는 데 1시간.

총 2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었다.

'제발 강풍이라도 만나던가 해서 늦어져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잘 수 있을 테니까.

강한윤은 눈을 감았고.

"강한윤 대위님. 근무 나가실 시간입니다."

"하.. 진짜 시발."

병사의 호출에 눈을 떴다.

2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하아아아암."

하품을 늘어지게 한 강한윤은 막사로 향했다.

그곳엔 에우제니아가 앉아있었다.

방금 전에 샤워를 했는지 말끔해진 모습이었지만, 눈은 퀭한 상태였다.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피곤하지 않습니까? 언제 주무십니까."

"몰라 시팔놈아. 나도 자고 싶다고. 너는 2시간이라도 자고 나왔잖아."

"차라리 안 자는 게 나을 겁니다."

눈은 따갑고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해서 굴러가질 않는다.

강한윤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비몽사몽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어우. 그래서 천족의 정찰 결과는 어떻습니까?"

"중요한 물자를 후방으로 옮기고 배리어가 꺼졌다고 하는 걸 보니 후퇴할 조짐이야. 푸니아 거점을 버릴 생각인가 본데."

'훨씬 빠르다.'

빠른 결정을 내릴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강한윤은 혀를 내둘렀다.

하루 정도는 지체할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푸니아 거점이 아쉬울 법도 한데, 그런 망설임조차 없는 판단이었다.

'하긴. 나였어도 빼긴 했을 거야.'

푸니아 거점을 유지하려면,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럴 바엔 후퇴한 뒤에 재정비를 하는 게 낫다.

'역시 이안 베르첼인가.'

상인 길드를 운영하는 자라 그런지, 이득과 손해에 민감하다.

푸니아 거점을 유지한다는 게 손해라는 판단이 바로 나온 것으로 보였다.

"푸니아는 어떻게 할 거야? 바로 점령할 거야?"

에우제니아의 물음에 강한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 두고 볼 겁니다."

지금 바로 점령하는 것보다는 이쪽도 재정비를 한 뒤에 가는 편이 낫다.

전투로 다친 병력들을 회복시켜야 한다.

신병들을 받아서 인원을 채우기도 해야하고 말이다.

'거기에 푸니아는 탐나는 거점은 아냐.'

푸니아 거점은 공격도 수비도 애매하고 답답한 곳이다.

공격을 하기엔 어느 쪽도 불리한 지형이다.

안다이얄은 협곡. 레오리스는 길이 한 군데 밖에 없는 산맥이니까.

그렇다고 수비를 하면 사방이 뚫려있어서 주도권만 잃는 마법의 거점이다.

정 맘에 안 들면 계속 비워둬도 괜찮다.

이 곳보다는 안다이얄이 훨씬 중요 하다는 강한윤의 판단이었다.

"안다이얄 거점의 내실을 다지고 푸니아까지 밀어도 상관없습니다."

안다이얄에도 최소한의 병력을 주둔시켜야한다.

그 병력만큼 전투력이 깎인 채로 푸니아를 점령해야 한다.

불리한 지형에 불리한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지켜보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래도 결국엔 점령할 거 아냐?"

"그래야겠죠? 레오리스까지 먹고 북부를 넓히려면 필수니까요."

"레오리스는 어떻게 하게?"

"글쎄요."

강한윤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저 거점은 게임에서도 골치 아픈 거점이었다.

매복으로 습격당할 장소도 많고, 저격당할 위치도 널려있다.

공격당할 건 다 당해야하고 길은 좁아터졌다.

"굳이 뚫어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공격하는 쪽이 손해라면 공격하지 않으면 된다.

강한윤은 레오리스의 동남쪽에 있는 거점을 떠올렸다.

'사티라 거점.'

이쪽은 공격해볼 법한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이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거네."

에우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한윤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거렸다.

"자러가자. 졸린데."

"정말 자기만 할 겁니다."

"너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지?"

에우제니아는 강한윤의 위로 걸터앉았다.

"들켰습니까?"

"안 들킬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강한윤은 살며시 웃은 뒤,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당연히 아니죠. 사령관님."

둘은 눈을 감으면서 입술을 부딪쳤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쪽 쪽, 하는 야한 소리가 울렸다.

자러간다고 했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팔을 휘감으면서 바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자지가 이렇게 부풀어 올랐는데 잠만 잔다니 그런 개소리나 하고. 여기에서 빨아줄까? 흥분되지 않아?"

"확실히 그렇긴 한데."

겅한윤은 대답을 망설였다.

집무실에서 한 번 하고 나면, 일을 하면서 계속 떠오를 것 같았다.

뒤처리를 한다 해도 미묘하게 남아있는 야한 냄새도 걱정이었다.

강한윤이 고민을 하고 있자,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중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들어와."

에우제니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운 정찰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노아의 말이 멈춘다. 그리고 시선도 이쪽으로 고정된 상태였다.

에우제니아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강한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고서야? 그냥 여기 책상에 놔둬."

"예. 알겠습니다."

노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에우제니아가 그런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노아가 책상 위로 서류를 놓고, 강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원하듯이 말이다.

에우제니아는 노아에게 다가가서 귓가에 속삭였다.

"노아 중위."

"예."

"지금 바로 섹스 할 생각인데 같이 갈래?"

"당연히 가겠습니다."

노아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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