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1화
* * *
우의를 뒤집어 쓴 라이라가 주변을 살폈다.
"어디로 가야 해요?"
"북쪽 건물로. 이쪽엔 아무 것도 없어."
푸니아 거점에 몰래 숨어든 강한윤은 중요한 건물의 위치를 떠올렸다.
동쪽엔 식량 저장고. 서쪽엔 무기 저장고.
현재 이곳에 위치한 남쪽에는 숙소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인원들이 전투를 하러 나갔는데. 숙소는 의미가 없지.'
강한윤은 숙소를 건너뛰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중앙으로 대놓고 건너가기에는 엄폐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과 광장이 있어서 이목이 쏠리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최대한 으슥하고 어두운 곳을 경유해서 북쪽으로 지나갔다.
식량 저장고를 지키고 있는 삼엄한 경계를 뚫으면서 할 일도 진행했다.
강한윤은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아이템을 꺼냈다.
[끈적거리는 접착폭탄]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할 순 없었다.
강한윤은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폭탄을 던졌다.
폭탄에 붙어있는 마법 스크롤이 손상되지 않도록 말이다.
착!
건물의 벽면에 달라붙는다.
하나로는 모자랄 수 있으니, 건물의 다른 면에 두 개를 연달아서 던졌다.
착! 착! 소리와 함께 폭탄이 달라붙는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임스. 무슨 소리 안 났어?"
"무슨 소리? 빗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스읍. 내가 잘못 들었나?"
"외출 다녀와서 힘을 너무 쓴 거 아냐? 너 저번에 사창가에 있는 엘리스가 그렇게 좋다면서."
"어허. 그런 민감한 얘기는 꺼내지마."
'음. 문제없어 보이네.'
빗소리에 가려져서 들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강한윤은 안심한 채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비가 내려서 접착폭탄이 흘러내릴 수도 있지만, 터지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10분 뒤에 터질 거야 라이라."
"충분하네요."
식량 저장고에서 볼일을 끝낸 뒤, 북쪽으로 이동한다.
북쪽의 경계는 더욱 삼엄했다. 이안 베르첼이 여기에서 묵고 있으니까.
강한윤의 목표도 이 안에 있었다.
'천천히.'
아무리 마법적으로 자취가 감춰졌다 한들, 걸을 때 자그마한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이라는 걸을 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강한윤은 그러지 못했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그의 최선이었다.
"당신. 일부러 웃기려고 그러는 건가요? 유머 감각이 있네요."
"비웃지마. 안 그러면 소리를 낼 것 같아서 그래."
우의의 후드 아래로 라이라의 표정이 살짝 보인다.
강한윤에겐 그녀의 입고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후우..."
직접 와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기지 안에서 느긋하게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 강한윤은 앞장을 섰다.
발소리를 죽인 채 건물의 안으로 들어간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 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은 없다. 라이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 강한윤은 지하로 내려갔다.
그나마 불이 켜져 있던 1층과는 달리 지하는 어두컴컴하다.
세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그 중에서 강한윤은 망설임 없이 오른쪽을 선택했다.
또 다시 두 갈래로 이어지는 길에선 왼쪽. 모퉁이를 지나자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 넷이 보였다.
라이라에게 눈치를 주자 그녀가 움직였다.
드레스 바깥으로 튀어나온 허벅지의 가터벨트가 보였다. 침처럼 날카로운 일자 단검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나가면서 손을 휘두르며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순식간에 병사들의 머리에 꽂히면서 네 명이 힘없이 쓰러졌다.
"오. 나이스."
강한윤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던 벽으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벽.
하지만 손을 대자 미묘하게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챈 라이라는 단검을 꺼내 벽을 찔렀다.
마나의 흐름이 엉키면서 원래의 벽이 드러났다.
얇고 깊게 구멍이 둟려있는 것 말고는 특징이 없는 벽이었다.
강한윤이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어딘가에 쓰이는 열쇠]
어딘가에 쓸 수 있다.
강한윤에게 귀속됨
사용횟수 5/5
이 아이템을 쓸 기회가 왔다.
귀속만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보냈을 텐데.
직접 푸니아 거점까지 잠입해야 하다니.
강한윤은 투덜거리며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었다.
구멍에 열쇠가 들어가긴 하지만 비좁다. 맞지 않는 구멍이라서 뻑뻑하다.
스르륵
강한윤이 힘을 더 주자 열쇠의 크기와 모양이 바뀌면서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 아이템이 못 여는 자물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3번 만 열 수 있어도 무조건 이걸 골랐을 텐데. 5번이나 기회를 준다니 미쳤지.
열쇠의 성능에 감탄하며 강한윤은 열쇠를 돌렸다.
끼리릭 끼리리릭 하며 안에서 톱니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면서 그 안의 모습이 드러난다.
'좋은게 많네 역시.'
이안 베르첼이 부자라서 그런 걸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돈이었다. 순금과 비싸 보이는 아이템과 아티팩트가 진열되어있다.
하지만 강한윤은 그것들을 지나쳤다.
이런 아이템들은 허울만 좋을 뿐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다. 무게에 비해서 말이다.
그는 중간에 모여 있는 종이쪼가리를 하나 집었다.
안스티프 백작 : 100만 골드
"역시 이거지."
가볍고 가장 값어치가 높은 아이템. 약속 어음.
백작의 마나가 깃들어있어서 진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총 500만 골드 정도의 어음 뭉치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배낭을 제외한 인벤토리는 4칸이 남아있다.
'보너스까지. 여유롭네.'
여기에 뭐를 집어넣어야 효율이 좋을 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우리 들켰어요. 도망쳐야 해요."
라이라의 한마디에 말이다.
*
이안 베르첼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 일이 있어도 여기에서 처리하고, 일이 없어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게 편했으니까.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안 베르첼은 중얼거렸다.
"이리스."
부인을 만났던 날도 이런 날이었다.
우중충하게 비가 오던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반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없다. 불치병으로 죽었으니까.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가 떠올랐다.
비가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에게 기시감이 느껴졌다.
방 안의 적막함이 묘하게 다르다.
그는 침대 밑의 수정구를 꺼내서 어루만졌다.
마나가 수정구에 깃들자 푸른색으로 빛났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금고의 문에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마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는 뜻. 침입자가 있었다.
"게이브. 금고에 침입자다.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들었군."
"예. 주인님."
고개를 끄덕인 게이브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단숨에 지하까지 도달한 그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살려 보내진 않겠습니다."
그의 검이 후드를 뒤집어 쓴 침입자에게 향했다.
'정말 과감하군.'
누군지는 몰라도 이 건물에 숨어들다니. 이안 베르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삼엄한 경비와 여기에 존재하는 소드마스터들의 숫자를 안다면 들어오지 않을 텐데.
상대는 그만큼 준비가 됐거나 아니면 멍청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금고의 문을 열었으니까.
억지로 문을 열려는 시도를 한다면 문이 완전히 닫혀서 열 수 없다
힘으로 열기에는 방어막이 보호하고 있고 내구도도 뛰어나다.
열쇠는 마법처리가 되어있어서 모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이안 베르첼은 지하를 향해서 걸어 내려갔다.
지금쯤이라면 침입자는 묵사발이 됐을 터다.
그의 집사 게이브는 소드마스터 중급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니까.
시체가 된 상대를 상상하고 금고로 향했지만.
파슷! 챙!
게이브는 침입자와 합을 겨루고 있었다.
이안은 검에 조예가 없지만, 누가 유리한 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이브가 압도하고 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침입자는 겨우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저 들고 있는 단검이 좋아서, 버틸 뿐이다.
"흡!"
게이브는 상대의 붉은 단검을 최대한 피했다. 저 검에 부딪힌다면 장비가 부식될 테니까.
거기에 침입자는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무기가 없다면 고전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빈틈이 없는 건 아니다.
게이브가 단검을 빠르게 두 번 휘둘렀다.
"큿!"
복부의 방어를 유도하는 모션을 취하고,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얕다.
검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게이브는 또 다시 몰아쳤다.
그는 단검을 휘두르면서, 소매에서 비수를 날렸다. 침입자의 후드를 약하게 베고 지나간다.
허점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목덜미를 스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침입자의 후드가 벗겨졌다.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게이브는 거리를 벌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리스... 아니. 레이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베르첼이다.
그는 침입자의 얼굴을 보고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레이나.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딸이니까.
그녀의 머리색은 그가 알던 밝은 브라운은 아니다.
붉은 색의 머리칼이지만 자신의 딸. 레이나라는 사실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의 부인. 이리스와 꼭 닮아있었으니까.
사아아
그녀의 주변으로 짙은 안개가 생겨났다.
도망치려는 것을 눈치 챈 게이브가 재빠르게 단검을 날렸다.
카앙!
하지만 애꿎은 벽에 단검이 부딪혔을 뿐이다.
안개가 사라지고 금고 안이 드러났다. 텅 비어있었다.
"게이브. 추격할 수 없나?"
"힘들 겁니다. 주인님."
"그러면... 돌아가도록 하지."
이안 베르첼은 방금 전 보았던, 여인이 딸인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방법이 없겠지.
그는 단념하고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콰아아아앙!
그때 바깥에서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
'위험했는데 겨우 살았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라이라가 들고 있는 게르모스의 팔찌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다.
팔찌를 이곳에 던져두고, 안에서 마나를 주입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강한윤은 게이브가 그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들킬 만한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레이나라고 했었지.'
라이라의 원래 이름이 그런 걸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물어보도록 하자.
강한윤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라이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생각보다 마나가 많이 드네요."
순간이동한 거리가 길어서 그런지, 라이라는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푸니아 거점이 작게 보일 정도로 먼 거리까지 날아왔다.
거리만큼 마나를 더 많이 사용한데다가, 방금 전까지 전투를 했으니 당연하다.
강한윤은 마나 고갈로 현기증을 느끼는 라이라를 부축했다.
"일단은 여기서 멀어지자."
추격조가 쫓아올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안전한 지역까지는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저기.. 저 쪽의 동굴까지만 가요."
푸니아 거점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걸었다.
라이라는 구석에 보이는 동굴을 가리켰다.
"그래. 일단은 쉬자."
강한윤과 라이라는 자리를 잡고서,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라이라는 지친 한숨을 내쉬고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라이라."
"..."
그녀는 대답할 힘도 없는 지 가만히 있었다.
마나 고갈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린 강한휸이 입을 열었다.
"펠라 해줘."
"...여기서요? 당신 진짜로 미친 건가요?"
"아니. 내 정액을 먹으면 마나를 회복할 수 있거든."
"... 하아."
라이라는 고민하지도 않고, 강한윤의 바지를 벗겼다.
여기에서 마나가 회복하기를 기다리며 지체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니까.
"땀 흘렸는데 괜찮아?"
"상관없어요."
강한윤은 라이라의 마나 고갈이 해결될 때까지 동굴에서 시간을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