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58화
* * *
주변의 병사들이 픽픽 쓰러진다.
50명은 됐던 병사과 기사들이 이제는 반도 남지 않았다.
단 10초.
10초 만에 배리어안에 남겨진 5명 남짓을 제외하고 간단하게 쓸려버렸다.
'젠장... 소드마스터 급이 있다는 거잖아.'
기사 중에는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오른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황이 빨리 종료되는 건 단 한가지다.
상대에 괴물이 있다는 것.
그것도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가 나는 괴물이.
세베라는 배리어에 더 많은 마나를 쏟아부었다.
이 배리어가 부서진다면 죽는 목숨일테니까.
그때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베라. 순순히 나오시면 안 될까요?"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사람이 있다.
'사람?'
그래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전장에서 싸우게 되는 건 사람 혹은 이종족이니까.
하지만 의아한 것은 바깥의 사람은 오드웰 연합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인간... 오드웰 연합군... 대위의 계급.'
세베라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탑주 쯤 되면 주변에서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가 동했던 소문.
오드웰 연합군의 인간 장교 강한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소문의 그가 맞았다.
저 남자가 어떻게 오드웰 연합군에 합류하게 됐는지.
어떻게 높은 계급에 올랐는지 궁금했다.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만나길 원한 건 아니었다.
특히 죽기 일보직전인 이런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세베라씨? 대답 안하시나요?"
바깥에서 세베라에게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세베라씨?"
대답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적군과 대화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혹시나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3초 내로 대답하지 않으면 전부 죽일 겁니다."
"뭘 원하는 거죠?"
목숨의 위협을 느낀 세베라는 곧바로 대답했다.
소드마스터 급의 괴물이 있는 상대다.
배리어를 작정하고 찢는다면 방법이 없다.
전투를 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전투를 하기 위해 적합한 몸이 아니다.
대부분 마법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몸이다.
매일 앉은 채 마법만 연구하니 팔다리는 얇고, 비정상적으로 마나만 단련된다.
싸운다면 무조건 죽는다.
그것도 처참하게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 사실을 인지한 세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베라. 대화를 할 생각이 있나요?"
"...네"
세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배리어를 부술 것 같았으니까.
"지금 상황이 인지가 되십니까?
밖의 병사는 정리됐고 남은 건 이 배리어 하나입니다."
그가 배리어를 노크하듯이 툭툭 두들겼다.
배리어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살며시 웃으며 흰 연기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저희가 이 배리어 하나 못 부숴서 놔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죠?"
세베라는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도 배리어를 완벽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항복하세요. 순순히 나온다면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포로가 되라는 건가요..?"
"당연하죠. 만약 지금 당장 죽기를 원한다면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가 작게 덧붙였다.
"세베라님. 적의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싸워야 합니다!"
"맞습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저들에게 항복하면 안 됩니다!"
세베라의 옆에 있는 기사 둘이 소리쳤다.
죽는 한이 있어도 싸우자고? 저 밖의 괴물들이랑?
"밖에 있는 자는 강해봐야 소드익스퍼트 최상급 수준입니다.
저희 둘이서 발을 묶어두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쇼. 세베라님."
"저희는 지금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정말로?
세베라는 동요했다.
정말로 이길 가능성이 있는 건가?
내가 생각했던 게 틀린 건가? 싶었다.
여기에 있는 기사 둘은 한명은 소드마스터 초입.
다른 한명은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이라 말에 신빙성이 있다.
"저들이 배리어를 부술 수 있다면 왜 안하겠습니까?
못 부수니까 꼬드기는 겁니다. 포로가 되라고!
그만한 실력이 있었다면 바로 배리어를 부수고 무릎을 꿇렸을 겁니다!'
듣다보니 그럴싸하다.
바깥엔 연기가 자욱해서 상황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나를 퍼트려서 확인하려고 해도 저 연기가 방해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방해를 하는 이유가 뭘까.
이쪽을 말로 속이려고?
꽤나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하나만 물을게요.
왜 배리어를 부수지 않는 거죠?
적당히 제압하면 충분하잖아요."
"하아. 귀찮게. 대답은 해드릴게요 세베라.
제가 당신에게 약간의 호의를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귀찮음 이라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검을 뽑고 뛰쳐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호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네 네. 말하시죠."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질문과 동시에 세베라는 배리어를 해제했다.
이쪽의 이름도 알고 있고 배리어를 부수지 않는다.
'정말 치졸한 수야.'
아마도 이쪽을 끌어들이기 위해 작전을 짰겠지.
거짓 정보 투성이로 판단력을 흐린 다음 포로로 잡는다.
속이 뻔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걸.'
배리어를 해제한 세베라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며 마나가 방출된다.
[연쇄번개]
손에 마나가 모여들면서 번개가 생성된다.
'버텨줘.'
이것만 완성이 된다면 여럿을 금방 제압할 수 있으니까.
캐스팅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들어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들고.
마나를 끌어올린 그들은.
"어."
단숨에 두동강이 난다.
검기를 두른 검과 함께.
같이 있던 병사 2명은 어느새 바닥에 쓰러졌다.
세베라는 다리의 힘이 풀렸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검이 닿고 있었으니까.
"아...아..."
그녀는 마법 캐스팅을 잇지 못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쉬이이이.
그리고 오줌을 지렸다.
"세베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세베라에게 강한윤이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색 안개 속에서 실루엣만 보였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죽고 싶은 건 아니죠?
저도 사실 죽이고 싶진 않거든요."
"네... 죽기 싫..어요.. 흐윽.."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괴물들하고 어떻게 싸운다는 거야.
움직임을 보아선 최소 소드마스터다.
세베라의 반항의식은 단숨에 사라졌다.
"일어서요. 일단은 걸어서 움직이죠."
"흐윽...네에..."
세베라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줌에 젖은 치마와 망토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
"어휴. 그냥 포로가 된다 했으면 오죽 좋아.
병사랑 기사는.. 아마 죽였으려나.
뭐 그쪽은 비슷했곘지만 옷은 더러워지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마나를 끌어올린다.
마나를 느낀 세베라가 몸을 움찔했다.
혹시 공격이라도 하는 건가..?
직접 죽이기 위해서 잠시 살려둔 건가? 했지만.
"정화. 흐음. 역시 얼룩은 잘 안 지워지네.
노아나 라이라는 여벌 옷 없어?"
"당연히 부대에 두고 나왔지."
"없어요."
"에리엘님은요?"
"당연히 없다."
옷에 묻은 오줌 얼룩을 신경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베라는 눈치를 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군복을 입은 이는 셋.
엘프, 다크엘프, 인간.
그 중에서도 엘프의 견장은 말이 안 된다.
옷 소매에 붙어있는 견장이 별이었다.
강하거나 그만큼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오드웰 연합군의 계급 체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세베라는 더욱 놀랐다.
'그래서...'
기사들도 속수무책으로 죽었던 거다.
저런 계급의 강자가 여기에 있으니까.
"흐음.. 부대에서 여벌옷을 주는 것 말곤 없겠네."
여전히 옷의 얼룩을 바라보는 강한윤.
조금 전까지 살벌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렇게 보니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한 청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 특이한 검은색 머리칼만 빼고.
"강한윤. 저 포로를 데려가서 어디에 쓸 생각이지?"
히끅.
엘프의 말을 들은 세베라가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다.
"으음.. 여기서 필요한 건 아니고 따로 생각이 있긴 합니다."
"그런가. 그러면 됐다."
생각보다 빠르게 대화가 끝났다.
정말로 이걸로 끝?
뭐 죽일지 살릴 지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세베라가 눈치를 보다가 강한윤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강한윤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세베라. 죽일까봐 겁나요? 뭐 고문하거나 그럴까봐?"
고문.
고문당하는 상상을 하자 또 다시 공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 거 안 해요. 귀찮게 죽였으면 죽였지 이렇게 살릴 이유도 없죠."
"...정말요?"
세베라는 용기를 내서 물어봤다.
"네."
강한윤이 간단하게 답했다.
무성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짧은 대답에 오히려 세베라는 안심했다.
그의 말에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아니, 처음부터 그는 진심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아무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니까요."
"좋은 관계... 저를 연합군으로 꼬드길 생각인가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뭐 아니어도 상관없죠? 포로인데."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궁금한 점이나 그런 거 있으면 말해요.
포로라고 입 막아두거나 그럴 생각도 없고.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아서 심심하거든요."
질문을 하라고?
세베라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수색 명령을 받아서 수색하러 왔다가 붙잡히고 여러모로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러고 보니...'
이 사내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지?
세베라는 북부의 마탑주다.
마법사는 대부분 바깥에 거의 나오지 않는 은둔형 폐인이고.
그녀는 마탑주가 될 만큼 외출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정보가 오드웰 연합군에 알려지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가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정보가 새어나갔을 리가 없었다.
세베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있죠?"
"음... 그건..."
강한윤이 말 끝을 흐렸다.
"연합군으로 들어오면 확실하게 대답해 드리죠."
"..."
이럴 거면 왜 물어보라 한 거야?
세베라는 입을 다물었다.
***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네.'
상대측에서 수색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는 것까지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세베라를 보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북부의 마탑주인 그녀가 수색 임무같이 귀찮고 위험한 일을 한다니.
원래라면 깔끔하게 전부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법사라는 존재는 귀중하니까.
특히 북부의 마탑주인 세베라를 여기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마탑주라는 자리는 평범한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재능이 있는 이들 중 가장 마법에 미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온갖 마법을 연구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
그게 마탑주다.
포로로 잡아온 세베라에게 품질 좋은 옷을 입혔다.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서 음식들 대접도 한다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요.음식도 맛있고 옷도 엄청 부드럽고."
세베라는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음식을 넣었다.
엄청 잘 먹네. 포로라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하이벤 산맥까지 걸어오느라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포로지만 극진한 대우를 해주고 싶습니다.
따로 호위를 붙여주고 부대 내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드리죠.
댠, 이걸 착용하셔야 합니다."
내가 목걸이를 하나 내밀자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거요?"
"네. 포로니까요."
세베라가 슬픈 표정을 지은 뒤, 목걸이를 착용했다.
마나 구속구가 철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목을 감쌌다.
이제 그녀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몸이다.
"편의를 봐주는 거니 협력해주셔야 합니다."
"넹."
음식을 야무지게 먹으면서 대답하는 그녀.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앞으로는 엄청 부려먹을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