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57화
* * *
"기권을 해달라고 했나?"
"예."
"크하하! 항복해서 마르벨스를 넘겨주었더니, 이번에는 기권을 해달라고 하는 군!"
다시 웃음을 터트린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네. 강자랑 싸울 기회를 빼앗기는 건 참을 수 없으니 말이야."
역시 그냥은 안 되는 건가?
지금 이대로 싸운다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겠지.
이쪽은 전력이 대부분 보존 되어 있다.
노아는 싸운 뒤에 회복해서 멀쩡하고.
에리엘, 라이라는 격하게 싸운 것도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서 헨리크 공작은 지친 것으로 보인다.
뒤에 있는 팀원들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전투 불능 상태다.
헨리크 공작 한 명만이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
누가 봐도 이쪽이 유리하지만.
"그렇겐 안 됩니다."
싸워주기 싫었다.
"어째 서지?"
"그야 여기서 싸우면 헨리크 공작님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요."
확실히 죽는다.
진심으로 싸운다면 헨리크 공작이 셋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대로 헨리크 공작을 살려준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패배한 인원은 그만큼의 리스크를 짊어지니까.
지금 단계에서 패배한 인원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숨겨진 장소로 이동하고 이 던전에만 존재하는 몬스터. 포식자가 쏟아져 나온다.
그걸 막는 데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패배한 인원은 대부분 크게 다치거나 지쳐서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막는 데 성공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특히 헨리크 공작이 지친 상태라면 그저 비참한 죽음만을 맞이할 뿐이다.
"헨리크 공작님은 여기서 무의미한 개죽음을 당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싸워서 죽더라도 그만한 퍼포먼스가 있는 영웅과 싸워서 죽어야 한다.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 사양이다.
던전에게 먹히는 건 절대 안 된다.
"헨리크 공작님.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죽는 건 아쉽지 않습니까?"
"대규모 전투라고?"
"예. 다음 작전은 그렇게 될 겁니다."
안 될 수도 있지만 일단은 던져본다.
헨리크 공작이 대규모 전투라는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무조건 활약할 무대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헨리크 공작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하지.
노아 중위는 예전보다 굉장히 강해졌고.
나머지 둘도 생각보다 강해.
크흐흐..!! 이런 만찬이 차려져있는데 참으라니 가혹하구만!!
모두와 대련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기권은 절대 없다네!"
이 아저씨는 여기까지 와서도 이러네. 정말로 전투광이다.
헨리크 공작의 대답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헨리크 공작이 웃으면서 악수를 건네 왔다.
다행히 헨리크 공작은 기권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기권은 어떻게 하지?"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누르지 않고요."
화면에는 간단하게 점령전 하나만 떠있다.
기권이나 포기라고 적혀있는 버튼이라고는 없다.
선택지가 없어서 누르고 강제로 싸우게 만들려는 것처럼 해 놨다.
버튼이 있으면 누르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함정이다.
누르지 않고 있으면 그게 기권이니 말이다.
10초 남았다. 결정해라.
던전 내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점령전 '4'
우리는 점령전을 누르고 기다렸다.
그러자 헨리크 공작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졌다.
"바깥으로 나가질 겁니다. 하이벤 산맥으로 가시면 됩니다."
"크흐흐!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대련을 할 수 있는 건가!"
"예."
어차피 내가 대련을 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대답했다.
헨리크 공작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대기실에 남아 있다.
자격을 가진 자들만 남았군.
던전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자 중앙의 바닥이 갈라지며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들어가라. 자격을 지닌 자여.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평범한 돌이었다.
걸어 내려갈 때 마다 우리의 움직임에 맞추듯이 벽에 걸려있는 횃불이 켜진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황금으로 만들어진 문이 나타났다.
"이건... 정말로 황금이군."
"예. 안을 보면 더 놀랄 겁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른데.
에리엘이 황금의 문을 손으로 건드리려 하자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내부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좌우로 전시되어있는 아이템들이 나타났다.
여기에 있는 아이템의 개수는 8개다.
그 중에서도 쓸모 있는 아이템도 있고 없는 아이템도 있다.
신중하게 잘 골라야한다.
"손을 대시면 안 돼요. 물건에 손을 대면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집니다."
아이템을 얻음과 동시에 바깥으로 나가진다.
만약 혼자서 물건을 만졌다가 고립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눈으로 구경만 해야 하는 건가?"
"이러면 무슨 물건인 지도 모르잖아."
에리엘과 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내가 하나하나 설명해줄 테니. 전부 듣고 골라."
왼쪽에 걸려있는 아이템으로 다가가자 창이 하나 떠오른다.
[승리의 깃발]
주변의 영웅들에게 버프 적용
공격력 10%, 마나 회복속도 10% 증가
부대의 사기가 일정 이상 떨어지지 않음
부대의 행군속도 5% 증가
[폭군의 방패]
힘 5 상승, 지능 5 감소
근접 피해 20% 반사
마법 피해 20% 감소
[모험가의 배낭]
24칸의 수납공간
아이템의 신선도 유지
무게 50% 감소
[칠흑이 담긴 장검]
파괴내성
공격력 10% 증가
마나 10% 증폭
[피를 마시는 창]
적 처치 시 스택 증가
100스택 : 공격력 증가 10%
200스택 : 공격력 증가 20%
300스택 : 공격력 증가 30%
[추적자의 활]
적을 추격 시 이동속도 20%, 공격력 20% 증가
은신 시 공격력 20% 증가
[요정의 지팡이]
전 속성 공격력 10% 증가
전 속성 저항력 10% 증가
마법 범위 10% 증폭
[거인의 망치]
수리 속도 15% 감소
아이템 제조 시 마법 부여 확률 10% 증가
[타오르는 열정]
재치 +5
화속성 저항 20%
[게르모스의 팔찌]
바람속성 저항 20%
순간이동 부여 (3분)
[단단히 밀봉된 항아리]
뭐가 들어있을 지 모른다.
[어딘가에 쓰이는 열쇠]
어딘가에 쓸 수 있다.
"흐음.. 뭘 고를지 모르겠군."
아이템 설명을 쭉 들은 에리엘이 고민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아이템을 둘러보고 있고.
라이라는 게르모스의 팔찌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팔찌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요?"
"팔찌를 보면 이게 두개가 이어져 있지?
하나를 당기면 빠져나오는데 그걸 던지고 마나를 부여하면 그 장소로 순간이동 돼.
3분에 한 번씩만 사용 가능하니까 유의하고."
"그럼 저는 이걸로 고를게요."
라이라는 망설임 없이 팔찌의 앞에 섰다.
저런 이동기가 달린 아이템을 무조건 끌리겠지.
암살자인 만큼 빠른 움직임이 중요하니 말이다.
에리엘과 노아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강한윤. 뭘 고를 지 끝냈나?"
"저는 다 보고 골라도 돼요."
어차피 뭘 골라도 비슷하다.
좋은 무기를 골라서 남에게 줘도 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도 된다.
내 스펙이 안 좋다는 점이 여기에서는 큰 장점이다.
"그렇다면 이걸로 해야겠군."
에리엘이 고른 것은 폭군의 방패다.
그녀가 사용하는 검은 나쁘지 않다.
그러니 좋은 성능의 방패를 고른 것으로 보인다.
에리엘의 지능은 10.
그렇게 낮은 편도 아니라서 지능 패널티에 큰 영향을 받진 않을 거다.
"나쁘지 않네요. 잘 어울릴 거예요."
사자의 얼굴이 박혀있는 방패에서 용맹함이 느껴진다.
용맹한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다.
"음..."
노아는 여전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골라도 돼.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가.."
노아는 그러다가 반지의 앞에서 멈췄다.
타오르는 열정.
재치를 올려주고 화속성 저항 20%라는 굉장히 쓰레기 같은 능력치만 골라놓은 반지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거 고르게?"
솔직히 추천하진 않는다.
속성 저항이라는 개념도 사실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니까.
"이번에 내가 이걸 받았잖아. 강한윤 너한테도 하나 해주고 싶어서."
"아."
노아가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어루만졌다.
받았으니까 나한테 해주고 싶다는 건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응. 결정했어. 반지로 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의 앞에 섰다.
그녀를 지켜보던 에리엘과 라이라가 조용히 말했다.
".. 완전히 당했군."
"만만치 않은 여자네요. 노아."
"예..? 왜요? 왜 그러세요? 다들?"
미묘해진 분위기에 노아가 눈치를 봤다.
"우리가 앞에 있는 데도 꽁냥대다니... 흐음.."
"그러게요."
그녀들이 한숨을 내쉰다.
이제 바깥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물건을 다 골랐으니 다들 손을 대세요."
"그럼 내가 먼저 나가있겠다."
여기서 제일 강한 에리엘이 바깥의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물건을 집었다.
그녀의 몸이 사라진다.
라이라는 무심하게 팔찌를 집고.
"밖에서 봐."
노아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온다.
나도 여기서 물건을 골라야겠지.
나는 느긋하게 걸어서 [단단히 밀봉된 항아리]를 지나쳤다.
여기서 이게 제일 쓰레기다.
최대 전설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최악으로는 재앙이 찾아올 수도 있는 아이템이니까.
내 기억으로는 고대 악마나 봉인된 몬스터까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시에서 열었다가 쑥대밭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딴 쓰레기 아이템은 절대 안 고르지.
확률에 기대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니까.
창과 활도 그냥 지나친 뒤 열쇠 앞에 멈췄다.
눈앞에 창이 떠오른다.
[어딘가에 쓰이는 열쇠]
어딘가에 쓸 수 있다.
그래. 이걸 골라야지.
쓸 아이템이 없다면 이걸 얻는 게 맞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집었다.
"아무도 없군."
"그러게요."
혹시나 적이 있을까봐 긴장했지만 우리를 반긴 건 시체뿐이었다.
시체에 파리가 꼬인 걸 보아하니 처음 들어올 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거의 정리됐겠네.'
던전에서 살아남은 팀은 단 둘이다.
헨리크 공작의 팀과 우리 팀.
헨리크 공작은 하이벤 산맥으로 간다고 했으니 여기에 남은 건 우리뿐이다.
그때 노아가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거리는?"
"조금 멀어."
"강해? 어때?"
"음... 이 멤버라면 상대할만한 것 같아."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있지.
***
"하아... 무슨 수색이야."
북부 마탑주 세베라는 자신이 수색에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시시껄렁한 용병왕이 잠깐 보이지 않는다고 수색을 시키다니.
'어디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
여자 사이에 껴서 방탕하게 노는 게 그놈의 특기니까.
"정말로 여기로 왔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세베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에 오는 것도 귀찮은데.
거추장스럽게 병사와 기사까지 대동하다니.
이럴 이유가 있나 싶었다.
'하아. 망할 돈만 아니었어도 이딴 작전 따위는 안했을 텐데.'
마탑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얻으려면 이렇게 작전을 뛰어야 한다.
안 그러면 마탑의 지원이 끊기니까.
자금줄로 협박을 당하는 도중이라 세베라는 어쩔 수 없었다.
'뭐?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금 지원을 끊어?'
억울하다.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마법 연구를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이다.
세베라는 볼이 빵빵한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임무를 하려고 했더니.
그나마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임무가 이런 귀찮은 수색 임무라니.
던전의 입구에 도착한 세베라는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미 늦었어. 다 뒤져있네."
머리가 깨지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살아남을 리가 없지.
그녀는 빨리 수색을 끝내기 위해 던전 내부로 들어갔다.
"응?"
입구는 시체로 가득하지만 던전 내부는 말끔했다.
전투의 흔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들어온 흔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뭔가 싸해.'
적막이 가득한 내부에 세베라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나의 파동]
그녀는 팔을 뻗었다.
마나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는 지 확인했다.
'..뭔가 있는 데.'
방향이 이상했다.
던전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지나온 방향 쪽이었으니까.
[배리어]
그녀가 다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콰직
배리어에 들어오지 못한 병사와 기사들의 머리통이 단번에 박살났다.
"기습..! 기습이"
소리를 지르는 병사의 목소리도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생겨난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며 목이 떨어졌다.
배리어 바깥으로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간다.
무자비한 학살.
병사들이 쓰러지는 소리와 비명만이 가득했다.
그 소리도 오래가질 못했다.
마지막 병사가 칼에 찔리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찾아온다.
그리고 누군가가 세베라를 향해 걸어왔다.
"와 순식간에 쓸려버리네.
세베라. 순순히 나오시면 안 될까요?"
인간이었다.
그것도 오드웰 연합군의 군복을 입은 인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