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5화
* * *
"헨리크 공작님. 왜 여기 계십니까?"
아니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지?
이 곳의 입구는 찾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헨리크 공작이 호쾌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들어오게 됐더군! 크하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다보니 여기를 들어왔다고?
헨리크 공작이 웃고 있을 때, 그의 뒤로 다른 인원들이 따라붙었다.
피곤한 표정을 한 3명.
활을 든 궁수와 지팡이를 든 마법사. 그리고 방패를 사용하는 전사계열의 용병이었다.
"...헨리크 씨를 따라서 주변 탐사를 하다가 다른 용병들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상대방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후퇴하기로 했죠.
그리고 도망갈 곳을 찾다보니 헨리크 씨가 이 곳을 발견했습니다.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숨어있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다가온 궁수가 지금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도대체 입구를 어떻게 찾은 거야.
"오드웰 연합군 소속의 용병인가 보네요."
"예. 그렇죠."
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아무튼 즐거우니까 된 거 아니겠나!"
헨리크 공작이 호쾌하게 웃고.
"하아.. 저희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 헨리크 공작은 소드마스터 중급의 경지에 있으니까.
저 만큼 강한 사람의 템포를 따라가려면 벅찬 게 당연하다.
헨리크 공작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이러면 플랜을 조금 여유롭게 잡아도 되려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녀석이 있는 지 확인해야 하니까.
돈을 쫓아서 온 수많은 용병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괜히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다.
소문을 퍼트린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노아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의 방향을 따라가자 그 곳엔 알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노아의 원수. 용병왕 볼트.
까득.
노아가 이를 가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려왔다.
그래. 저 녀석이 여기에 와야 정상이지.
돈에 미친 용병.
용병질 하나 만으로 유명해지고 강해진 사내.
이름 대신 용병왕이라고 불리는 자다.
돈을 벌 기회가 왔는데. 당연히 참여를 해야지.
용병왕이 없다면 없는 대로 좋고 있다면 있는 대로 좋다.
없다면 던전 하나를 공짜로 먹을 수 있고.
있다면 인간 세력의 힘을 갉아먹을 기회니까.
'다른 영웅은 없나 보네.'
설정 상 주로 같이 활동하는 영웅이 있다.
타락한 사제 클라이드.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딱 까다로운 수준으로 일이 진행됐을 텐데.
생각한 것보다 더 쉬워졌다.
헨리크 공작이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쉬워졌다.
"노아."
",.. 쟤는 내가 죽일 거야."
"그래. 그러면 됐어."
아슬아슬하지만 노아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있다.
아직은 소드마스터로 각성은 하지 못했지만.
이번 던전을 마지막으로 소드마스터가 되겠지.
노아의 성장을 위한 재물로 용병왕이 필요하다.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저 용병왕이 말이다.
"노아. 용병왕 무리의 총 전력은 어느 정도야?"
"소드마스터 두 명에.. 소드익스퍼트 상급 열 명 정도."
정예로 알차게 데려왔네.
그래봐야 일의 지장은 없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 중에 주의해야 할 대상이 있나 확인 해줘."
"알았어."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시 던전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자격을 증명해라.
목소리가 들린 뒤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야 씨발! 아무거나 누르지 말라고!"
"26팀..? 이게 뭘 뜻하는 거야?"
주변에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 창이 떠올라 있으니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같은 경우엔 익숙해서 괜찮은데 말이다.
11팀 1번째 자격 증명
서바이벌
몬스터 토벌
수수께끼
간단하기 짝이 없는 창이다.
여기선 뭘 고를지 이미 선택을 끝낸 상태다.
나는 옆에 있는 헨리크 공작에게 물었다.
"헨리크 공작님. 뭘 선택하실 겁니까?"
"음! 몬스터 토벌이 재밌어 보이는 군!
크흐흐!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가 끓는다고!"
그래. 저쪽은 싸우러 갈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물론 헨리크 공작 뒤에 있는 용병들의 표정은 좋지 않지만.
알아서 잘 하겠지.
"저희는 수수께끼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 그럼 만나진 못하겠구먼...! 이렇게 아쉬울 수가."
"아하하... 예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도 아쉽지 않지만. 일부러 그런 척 대답을 했다.
우리는 최대한 헨리크 공작과 겹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니까.
"다들 수수께끼를 눌러주세요."
내가 말한 대로 노아, 에리엘, 라이라 순으로 수수께끼를 눌렀다.
수수께끼 '3'
떠올라 있는 창을 가볍게 건드리자 숫자가 바뀌었다.
수수께끼 '4'
10초 남았다. 결정해라.
던전의 목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되네.
던전 속에서 울려 퍼지니 두개골이 울리는 느낌이다.
10초가 지나자 우리의 몸은 서서히 투명해졌다.
사방이 돌로 막힌 공간이 아니라 사방이 깜깜해서 우주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있는 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아공간 같은 곳입니다."
엄연히 따지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맵이다.
이벤트 스테이지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진 곳.
하지만 설명하자면 어려우니 아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런가. 이런 느낌이군. 주변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순간에도 라이라는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있었던 긴장이 풀린다.
그럼 첫 번째 수수께끼를 시작하겠다. 증명해라.
던전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리고.
땅에서부터 연두색으로 빛나는 동그란 발판이 올라왔다.
크기는 16x16
하나를 밟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다른 발판의 색이 바뀌는 구조다.
"뭘 하라는 거지?"
"기다리면 알 거에요."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그림이 떠올랐다.
□□△○
○△○△
○□□○
△△○□
연두는 동그라미.
빨간색은 세모.
파란색은 네모.
네 가지 색으로 배열을 해야 한다.
"...이걸 따라 만들라는 것인가?"
에리엘이 침음 성을 흘렸다.
"말도 안 되게 어렵군."
그녀의 말대로 어려운 퍼즐이다.
하지만.
"1, 2, 5, 8, 11, 11, 15"
"왼쪽 아래부터 1번부터 4번입니다. 16번까지 순서대로 올라가면 됩니다."
나에게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격을 증명했다.
***
퍼즐을 맞추고 나자 바로 처음에 있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끝인 건가?"
"아뇨 몇 번 더 해야 합니다."
대략 한 30팀 정도로 보였으니까.
3번은 더 싸워야 마지막 2팀 정도가 남는다.
"뭔가.. 싱겁게 끝나버렸군."
"예.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강한윤이 있어서 그런 거겠죠."
에리엘과 노아의 말대로 내가 없었다면 수십 분은 걸렸을 퍼즐이다.
각 버튼의 패턴을 확인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다 외우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의문이 담긴 한마디를 에리엘이 읊조렸다.
미안하지만 답해주고 싶지 않다.
패배했을 때의 리스크는 적은 게 아니니까.
나는 일부러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승리해서 얻은 아이템을 언급했다.
"마나의 정수는 누가 받는 게 좋을까요?"
[마나의 정수]
흡수할 시 마나가 5000 증가한다.
마나를 올려주는 아이템이다.
그렇게 특별한 능력치는 없지만, 마나를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준수한 성능이다.
"강한윤 네가 혼자 이겼으니 알아서 결정하도록."
"그런가요."
에리엘이 그렇게 말하자 나머지 인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줘야하지.
그러고 보니 라이라의 능력치는 본 적이 없다.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는 능력치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라이라 : 레벨 44]
마나 : 1,173,998 / 1,173,998
힘 : 30
체력 : 33
지능 : 13
재치 : 10
'와 뭐야.'
암살자 치고는 말도 안 되게 준수한 능력치다.
거기에 마나는 이미 소드마스터에 들어간 수준.
아니 그녀는 정말 소드마스터 급의 암살자였다.
[노아 : 레벨 42]
마나 : 1,001,235 / 1,001,235
힘 : 32
체력 : 35
지능 : 10
재치 : 13
마사지의 효과 적용 중
'그에 비해..'
노아는 능력치가 조금 더 좋지만.
마나가 라이라에 비해 낮다.
거기에 레벨도 더 낮아서 동 스펙이라고 하더라도 약하다.
마사지로 도핑이 된 상태라서.
라이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애매하긴 하다.
"자. 노아 네가 사용하는 게 낫겠다."
"..뭔가 나만 편애하는 것 같네."
그야 줄만한 사람이 노아밖에 없어서 그렇다.
노아가 마나의 정수를 잡자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나가 늘어난 것도 확인했고.
"그럼 쉴까요?"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할 때까지 여유롭게 보내도 된다.
*
"후우."
에리엘이 칼에 묻은 피와 점액을 털어내었다.
노아도 몬스터의 사체에 박혀있는 화살을 회수했고.
라이라는 여전히 담배나 태우고 있다.
방금 전까지 상대한 거미 몬스터.
셀로브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거미를 싫어하진 않는데.
이렇게 거대한 거미 몬스터를 보니 자연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거미의 팔에 돋아나있는 잔털의 굵기를 보니.
어우.
자격을 증명했다.
이것으로 3번째 자격 증명을 끝냈다.
"그렇다면."
"예. 4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헨리크 공작과 피해서 만나도록 일부러 다른 스테이지를 골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8팀 정도에서 싸웠으니.
남는 것은 분명 4팀이다.
받은 마나의 정수는 이번에도 노아가 흡수했다.
이번에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부분의 인원이 솎아지니까 던전의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11팀 4번째 자격 증명
투기장
격전
'투기장과 격전이라.'
투기장은 1:1로 싸우는 스테이지이다.
격전은 다수 : 다수로 싸우기 때문에 차이점이 크다.
음.. 뭘 골라도 나쁘지 않은데.
어차피 헨리크 공작을 제외하고는 다 해볼만한 상대뿐이다.
지금까지 싸움을 거쳐오면서 상처가 유난히 적은 곳은 둘 뿐이다.
헨리크 공작 파티와 내 파티.
헨리크 공작은 다른 세명이 탈진한 것처럼 누워있다.
헨리크 공작 혼자서 하드캐리를 하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는 항상 무난하게.
가장 빠른 루트로 손실이 적은 방향으로 클리어했다.
소드마스터급 세 명이라는 전력도 문제없다.
"이번엔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음.. 격전이 하고 싶은데 크흐흐!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헨리크 공작이 자신의 파티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따봉을 하는 궁수와 전사. 그리고 마법사.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걸까.
그렇다면 이번엔 투기장을 가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으니 노아가 나를 톡톡 건드렸다.
"마지막 기회야."
"무슨 기회?"
"복수를 할 기회."
..그렇네.
따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렇다.
지금 남은 팀은 딱 4팀.
여기에서 하나를 골랐다가 용병왕이 아닐 확률은 1/2.
그렇다는 말은 헨리크 공작은 1/2 확률로 용병왕과 싸우게 된다는 얘기다.
용병왕이 강하다 한들.
헨리크 공작에게는 절대 안 된다.
"내게 방법이 있어."
노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방법? 있다고 하니 알아서 잘 하겠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노아가 용병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야. 투기장으로 따라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