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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51화 (51/163)

〈 51화 〉 49화

* * *

"안 된다고?"

강한윤이 의문을 담아서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진짜로?

이렇게 사람을 애태워놓고 안된다고?

에리엘이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문 때문이다."

"가문?"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게임에서 적혀있지 않았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자 강한윤은 입을 다물었다.

"강한윤 너도 모르는 이야기인가?"

"나도 모든 정보를 알진 못하거든."

정말 편리한 변명거리네. 라고 생각한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에리엘과 눈을 마주했다

"그래.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주지."

에리엘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지식한 가문에서 태어나서 검을 단련하고 성인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성년식을 하고 난 뒤에 약혼이 잡혔지.

내가 좋아하는 사내가 아니라 그저 가문의 덩치를 키우기 위한 약혼이었다.

그걸 미루고 미루다보니 어느새 대령이 되어있더군.

더 이상 혼사를 미루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

남부의 전선은 진전이 되지 않고 맘에 드는 남성도 없었으니까.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었지."

"그러다가 나랑 만나게 된 거야?"

"그렇게 된 거다."

"나랑 이런 사이라는 사실을 들킨다면 양쪽에서 난리가 나겠네."

에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윤. 네가 뛰어난 사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일개 개인에 불과하다.

가문의 힘에 대적하다보면 죽을 수도 있다.

그게... 가문의 힘이니까."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 에리엘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소드마스터의 힘은 가문과 비교한다면 별거 아니다.

그들에게도 소드마스터는 존재하니까.

대항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강한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 미래가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

에리엘이 강한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아."

강한윤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엘프 중에도 씹 새끼가 있네.'

누구인진 몰라도 완벽하게 방해할 만한 놈들이 같은 소속에 있었다.

칼레보른을 뛰어넘는 놈들이 존재했다.

'확실히 게임하고는 달라. 그냥 현실이라 생각하는 게 편하겠다.'

게임에서는 설정의 비중이 낮다.

복수를 원하는 캐릭터가 있다고 한들, 굳이 들어줘야할 필요가 없다.

사이가 안 좋은 영웅끼리 붙여놓는다 한들 실제로 파탄 나는 경우는 적다.

'이쯤 오니까 확실하게 알겠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놈이 있다면 무조건 위험한 녀석이라고.

칼레보른 같은 영웅을 전부 처형하고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 죽일까?

생각을 가볍게 끝마친 강한윤은 에리엘의 얼굴을 손으로 보듬어주었다.

"고작 그걸로 걱정한 거야?"

"... 고작이 아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에리엘이 말을 이었다.

"너랑 이렇게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위험한 일이지.

나에겐 나름대로의 반항이다.

멋대로 정해진 혼사에 따르지 않고 싶다는 반항.

하지만 네가 다칠까봐 너무 걱정이 된다."

"뭘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해."

에리엘이 강한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강한윤. 네가 강해져라.

가문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길러라. 세력을 만들던지.

그 만큼의 지위를 쟁취하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겠어 알겠어. 알겠으니까."

강한윤은 그만 말하라는 듯이 에리엘을 껴안았다.

'중증이네.'

가문이라는 울타리에서 나오긴 힘들어보였다.

하긴 에리엘의 설정 상 나이가 100살이 넘는 엘프인데.

그만큼이나 시달렸으면 이렇게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에리엘의 아버지가 대체 누구인데 그렇지?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영웅인 에리엘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다니.

그녀가 보여준 것은 오랫동안 누적된 무기력함이었다.

'일단 하던 대로 하면서 에리엘을 멋대로 부려먹으려는 나쁜 놈들을 죽여야겠네.'

어차피 세력을 만드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앞당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에리엘. 가문의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길래 그래?"

떠오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물었다.

"너도 알고 있을 거다."

"나도 알고 있다고?"

"그래. 내 아버지는 남부의 사령관이니까."

아. 남부의 사령관 에키르.

그제야 남부에서 에리엘을 빨리 보내준 이유를 이해했다.

북부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북부까지 장악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겠지.

너무나도 뻔한 행동이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남부의 사령관이 결재를 빨리 한 이유가 있지.'

자연스럽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남부의 사령관 에키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설득을 하는 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문제는 다른 세력이다.

사령관이나 되는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가문이라면 당연히 힘이 셀 테니까.

'인간 세력 무너뜨리는 것도 힘든데 내부의 적까지. 진짜 쓰레기 세력이다.'

강한윤은 오드웰 연합군을 또 다시 환멸 했다.

이렇게까지 장점이 없다니.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자 에리엘이 자지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것 같군."

"아니야. 그래도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다행이지."

이런 정보를 늦게 얻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뒤통수를 맞을 뻔 했다.

에리엘이 자지를 상냥하게 흔들었다.

"섹스를 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큰 행동이다.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말이야.

일이 정리될 때까지만 참아줄 수 있겠나?

"그래 그 정도야 뭐."

에리엘의 마음이 먼저다.

내부의 쓰레기들이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쯤이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에리엘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하던 건 계속 해야겠지."

에리엘의 따스한 입이 자지를 감쌌다.

***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니 에리엘이 보였다.

자고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이 느낌이 좋다.

다른 사람의 온기와 체향.

안심이 되는 요소가 두개나 있으니 심적으로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잡티 하나 없고 연예인보다 예쁘게 생긴 에리엘의 얼굴을 구경했다.

'이런 미인이 나를 좋아해준다니.'

원래대로라면 꿈도 못 꾸는 일이다.

아니 에리엘을 제외하고도 노아, 라이라, 에우제니아 3명도 그렇다.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여자들.

그렇기에 더 잘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에리엘이 섹스를 거부하는 데 무작정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가문의 속박을 풀어버릴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데.

조금 어렵다.

상대 가문의 정체를 확실하게 유추하지도 못한 지금 상황에서 뭔가 하기도 그렇다.

'일단 인간 쪽이나 쭉쭉 밀고 나가자.'

남부의 영역을 넓혀준 건 배가 아프지만 북부는 에우제니아라는 든든한 팀이 있다.

여기에서 일단 땅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

­부스럭 부스럭.

"으응.."

에리엘이 몸을 뒤척였다.

곧 있으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이 살며시 떠지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지?"

"얼마 안됐어."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조금 부담스럽군."

"내 얼굴이 잘생겨서?"

"아니 그건 아니다."

에리엘이 칼같이 대답을 했다.

장난삼아서 말을 던졌다가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내 반응을 지켜보던 에리엘이 피식 웃었다.

"비록 엘프들에 비해서 모자란 면이 있지만 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쪽.

에리엘이 가볍게 입맞춤을 해왔다.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데.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가."

"아니. 그렇진 않지."

에리엘이 예쁘니까 다 해결이 되는 문제다.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에리엘을 닮은 아이로 낳아야지.

침대에서 알몸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는 옷을 입었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하자."

오늘은 에리엘이 북동부로 떠나는 날이기도 하고.

칼레보른의 사형이 있는 날이니까.

*

"결국 사형으로 결정이 났군."

"예. 죄질이 너무 안 좋았죠."

에우제니아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칼레보른과 연이 있는 장로들이 있는 지 제발 처형을 피해달라는 요구가 들어왔었다.

순수혈통인 하이엘프인 점을 고려해서 살려야 한다는 둥.

죄질이 나쁘지만 세계수님 아래에서 죄를 뉘우친 다음 타락한 마나를 정화한다면 되돌릴 수 있다는 둥.

개소리를 내뱉는 것을 봐와야 했다.

'응 그래도 칼레보른은 안 바뀌지.'

썩은 물에 새로운 물을 붓는다고 해서 물이 깨끗해지는 건 아니다.

한 번 마인드가 글러먹은 사람은 대부분 개과천선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에우제니아도 같은 의견이라서 칼레보른을 사형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엘프란 족속들은 미친 새끼들이라니까. 어?

저런 놈을 살리자고 하는 게 무슨 말이야."

"..동감입니다."

"아. 에리엘 준장을 겨냥해서 말한 건 아니고."

"알고 있습니다."

옆에서 에리엘이 듣고 있다는 걸 깜빡했는지 에우제니아가 급하게 사과했다.

"오히려 저 타락한 엘프와는 다르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처형해야 합니다."

"그게 맞지."

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처형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나는 좋다.

"힘에 미쳤다고 하더라도 악마와의 계약은 선을 넘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야."

에리엘와 에우제니아가 얘기를 나눴다.

전부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네.

마음이 통하는 것을 확인하자 답답했던 속이 풀렸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사형장을 향해서 칼레보른이 천천히 걸어왔다.

며칠 동안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했는지 앙상하다.

계약의 대가로 수명을 전부 바쳐버린 칼레보른은 늙고 추레한 노인 같은 모습이었다.

저번에 감옥에서 봤던 때보다 몇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저게 타락한 자의 최후지. 병신 같은 녀석."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에우제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옆의 간수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도구를 점검했다.

칼레보른은 조금 있으면 단두대에 목이 잘리게 될 운명이다.

"크흐흐.. 크큭... 크하하하하!!!"

곧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미쳐버렸는지 칼레보른이 크게 웃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

망할 놈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는 여기서 죽을 위인이 아니다!"

진짜 미쳐버렸구나.

"그래. 누군가 나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군.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인 걸 보니 6서클 마법사쯤 되는 모양이야."

"6서클 마법사... 인간 세력의 그 녀석이다...!

마법사 헬리안! 그 녀석이 나에게 마법을 건 거야!'

"안쓰러워서 못 봐주겠군."

미친 듯 떠드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에리엘이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조금 그러네. 아니 많이 그렇다. 이제는 불쌍할 지경이다.

단두대에 목이 잘리기 직전 칼레보른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친 듯 나불대던 입이 멈췄다.

"인가아아아아아아안!!!!!!!!!!"

그리고 광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너만 아니었다면!!!!!!!!!!!

너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 저 놈이 원흉이다!!!!!

순순한 오드웰 연합군을 더럽히는 저 인간놈!!!!!

저 놈을 조심해야한다!!"

칼레보른의 말에 시선이 나에게 잠시 몰렸다.

"저 인간이 꾸민 음모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저 놈이 문제라고!!"

"사형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형 집행인의 말이 광장에 울렸다.

목이 쉬어라 소리를 내지르는 칼레보른과 대비되었다.

"복수할 거다!! 저주할 거다!!!!!

난 죽지 않는다!!! 너를 평생 괴롭힐 거다!!"

이제는 칼레보른이 처형될 시간이다.

사형집행인이 단두대의 줄을 잡았다.

그가 줄을 가볍게 당기자 무시무시한 칼날이 중력에 의해서 움직였다.

"망할..."

칼레보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목과 머리가 분리되고 검은 색의 피가 흘러나왔다.

­저주받을 놈.

­타락한 녀석이 뭐라고 하는 거야.

­끝까지 엘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먼.

­저런 녀석이 하이엘프라니.

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확실히 하이엘프의 끝 모습 치고는 너무 추하다.

"타락의 증거로 저렇게 검은 피가 나오니 빼도 박도 못하지."

에우제니아의 말대로 거뭇한 피가 아니라 아예 먹물처럼 까맣다.

모두가 칼레보른의 처형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후우."

"어때. 강한윤. 저 녀석이 사라지니까 마음에 들어?"

"예. 좋습니다."

개운하다. 칼레보른 같은 트롤이 남아있으면 안 되지.

때에 맞게 잘 처리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이제 가봐야 하는군. 하아.."

에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북동부에 있는 하이벤 산맥으로 가야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겠지.

"시간나면 놀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강한윤 대위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에리엘의 시선에 고마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에리엘 준장. 앞으로 잘할 거라고 믿을 게."

"예. 감사합니다."

에우제니아의 인사도 끝나고.

"에리엘 준장님. 가까우니까 금방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노아 중위도 같이 놀러오도록."

노아의 인사도 끝났다.

에리엘은 마차를 타고 하이벤 산맥으로 떠났다.

북동쪽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도 가자."

에우제니아의 말대로 우리도 마차에 탑승했다.

슬로반에서 더 있어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우리가 탑승한 마차도 카브란 산맥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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