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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46화 (46/163)

〈 46화 〉 46화

* * *

내 기억이 맞다면 소리 지르는 저 녀석은 세이판 소령이다.

저 녀석도 어지간히 인맥 빨이겠지.

영웅 스탯으로 따지면 능력이 하나도 없는데 계급만 높다.

에우제니아에게 이름을 알려줄까 했지만 분위기가 영 아니다.

"하아."

에우제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투표나 하자. 아무나 뽑아. 맘에 안 들면 내가 하나하나 다 찾아갈 테니까."

그녀의 한마디와 함께 침묵 속에서 투표가 시작 되었다.

대놓고 짜증났다는 티를 내는 에우제니아와 다른 이들은 눈치를 보았다.

흥미진진하네. 과연 어떻게 될까.

조용히 진행된 익명투표의 결과는 이러했다.

"투표 결과입니다."

에리엘 대령 14표.

기권 1표.

압도적인 투표 결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제니아한테 죽기 싫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현명한 선택이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면 모두 머리와 몸이 분리됐겠지.

"에리엘 대령을 준장으로 승급시키고 북부의 엘프 대표로 선출합니다.

이 사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

회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특히 엘프들이 이를 악문 채로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의를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북부의 엘프 대표는 에리엘 준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에리엘은 북부 엘프의 대표가 되었다.

투표가 끝나고 또 다른 파란이 일지 않을 까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각 종족의 투표자들은 도망치듯이 회의실을 떠났고, 그 모습을 에우제니아가 지켜보았다.

"하아... 별 개수작을 다 부리네."

에우제니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능력 없는 놈을 밀어주면 고스란히 피해를 받는 사람은 그녀니까.

"그 새끼들이 원하는 대로 뽑았으면 어땠을까?"

"좋지 않았겠죠."

각 종족의 대표라는 것은 권력을 가진다.

수인을 작전에 투입시키려면 대표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불편하고 까다로운 절차지만 오드웰 연합군의 취지가 그렇다.

각 종족들의 화합.

그렇기 때문에 항상 대화를 해야 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에우제니아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작전이 조금 답답해졌으리라.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잘하셨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판단을 내린 것치고는 좋았다.

역시 전략 빼고는 전부 잘하는 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령관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하가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우리 둘 뿐인데 어때. 에우제니아."

회의실에는 아무도 없다.

이런다고 누가 볼 그것도 아니고.

심지어 누가 본다고 한들 에우제니아에 대한 소문을 흘릴 수 있을까?

척추를 반으로 접히고 싶어서 안달난 게 아니라면 안 하겠지.

그리고 그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갑자기 돈다고 믿어줄 이도 많지 않을 게 확실하다.

사령관과 일개 장교의 사랑?

소설의 소재로는 좋지만 소문으로는 좋지 않거든.

강함을 숭상하는 오크가 약해빠진 인간이랑 사랑에 빠졌다는 내용은 특히나 개연성에 맞지 않다.

나는 에우제니아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럼 기지로 복귀합니까? 사령관님?"

"그래야지. 여기 있어봐야 더 할 일은 없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여기서 있어봐야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나가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도를 했지만 허무하게 실패했다.

몸을 끌어안고 있는 에우제니아 때문이었다.

"오늘 데이트는 좋긴 했지만 뭔가 부족하던 걸."

그녀는 굶주린 사람처럼 목덜미를 당기면서 키스를 했다.

텅 빈 회의실 내부에 키스를 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가자."

만족한 듯이 에우제니아가 웃었다.

뭐. 어차피 돌아가면 이어서 하겠지.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키스를 끝마친 우리는 카브란 산맥으로 움직였다.

***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해서 카브란 산맥이 최전방은 아니다.

전투력이 최고 수준인 에우제니아가 안다이얄로 가지 않는다면 극심한 손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에리엘 준장을 북부 대표로 임명하는 것이다.

안다이얄에서 자리를 지키며 에리엘 준장이 북부로 올라오는 날에 맞춰 카브란 산맥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네.'

북부에서 결정 난 사항에 대해서 남부의 사령관은 아무 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우리가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멋대로 남부의 영웅들을 빼내거나 옮길 수는 없는 노릇.

남부의 사령관이 허락을 해줘야 가능한 일인데 흔쾌히 승낙했다.

'남부에서 영웅들이 썩는 게 좋진 않지.'

남부는 이제 내정을 주로 해야 하는 지역이다.

중부로 진출하기에는 남부와 중부 사이에 존재하는 망각의 숲을 헤쳐 나가기 힘들다.

들어오는 존재들에게 디버프를 걸어서 기억을 잃게 한다.

결국엔 자신의 존재마저도 잃어버리게 하는 강력한 디버프를 거는 무서운 지역이다.

그래서 묘족의 영웅 흑령이 있는 지역으로 우회해서 중부로 진출을 해야 한다.

협곡에서 입구를 막고 있는 지역을 뚫는 소모전을 하느니 그나마 뚫려있는 북부를 건드는 게 맞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모르겠지만 남부의 사령관 에키르가 북부에 도움을 주었다.

북부로 영웅 전출 허가를 빠르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게임을 진행하는 것 마냥 빠른 속도였다.

나는 남부에서 북부로 전출이 확정되었고 남부에서 불러온 영웅은 딱 2명이었다.

에리엘과 노아.

에리엘은 북부 엘프의 대표가 되었으니 당연한 거고.

노아는 성장을 위해서 같이 불렀다.

그녀에게는 따로 해줄 일이 있으니까.

그 외로 마리아, 마로스 남매를 부르려고 했지만 아직은 소위로 임관하지 못해서 관뒀다.

나중에 부를 일이 있겠지. 지금 당장 부르지 않아도 좋다.

북부에서 성장할 기회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나는 에우제니아의 정보장교이자 부관이 되면서 대위로 진급했고 에리엘과 노아도 곧 있으면 북부로 온다.

'그보다 에키르가 왜 이렇게 결재를 빨리 했지?'

게임에서 깐깐하고 고지식한 사령관이라고 욕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이유가 없는 결정은 없다.

칼레보른이 욕망이 있어서 행동을 하고 결정을 내리듯이 다른 영웅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욕망과 목표가 있다.

특히 남부의 사령관 에키르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는 건.

자신의 생각과 북부의 결정이 일치했다는 이야기인데....

'어렵네.'

연결점을 찾으려고 해도 보이질 않았다.

게임에서 나오는 설정과 정보를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건 알기 힘들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은 정보들이 숨겨져 있었으니까.

라이라만 해도 숨겨진 설정이 뭉텅이다.

모든 정보를 외우고 있는 고인물이라고 자부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더 정보를 모아야겠어.'

라이라를 끌어들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오드웰 연합군 소속은 아니지만 이제는 나와 함께 활동할 테니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게 분명하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정보만큼 더 유리한 작전을 짤 수 있다.

­똑똑똑.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평상시처럼 무심하게 대답하는 에우제니아.

나는 그 옆에서 업무를 보며 기대를 했다.

오늘 사령실에 올 사람은 없으니까.

끼익­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부터 금발이 보였다.

그래. 익숙한 여인이다.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칼 같은 각도로 경례를 하는 에리엘.

그리고 그 뒤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아도 있었다.

"에리엘 대령 들어오도록."

에우제니아의 명령대로 그녀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에우제니아는 에리엘의 군복을 매만졌다.

"에리엘 대령. 아니, 에리엘 준장 북부의 엘프 대표가 된 만큼 더욱 증진하도록."

에우제니아는 에리엘의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장성의 상징인 별을 달아주었다.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리엘이 경례를 하자 에우제니아는 노아에게 다가갔다.

"노아 중위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하도록."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아와 눈이 마주치자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오랜만에 만나긴 하지. 나도 반가워서 가슴이 뛰었다.

노아까지 경례가 끝나고 그녀들은 바깥으로 나갔다.

에리엘의 임명식과 노아의 전출 신고가 끝났으니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사령실에서 떠드는 것도 이상하니까 내가 나가야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우제니아가 불러 세웠다.

"애인이야?"

"예?"

"애인이냐고. 특히 저 다크엘프의 눈빛이 애절하던데.

엘프 쪽은 미묘해서 아닌 것 같고."

그녀가 정확하게 꿰뚫어봤다.

이게 소드마스터 상급의 눈썰미인가?

헨리크 공작 이상의 괴물이니 잠깐 스쳐지나가는 장면도 전부 확인할 수 있겠지.

"예. 애인입니다."

딱히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당당하게 말했다.

에우제니아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언젠가는 부딪혀야하는 문제다.

매는 최대한 빨리 맞는 게 좋지.

나의 대답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바람둥이 새끼. 이걸 당당하게 말하고. 자랑이냐?"

"..."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억울함을 느꼈다.

"사령관님이 먼저 덮치시지 않았습니까?"

"애인이 있는데 가만히 있던 건 너잖아.

안 돼요 하지마세요. 했어야지."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

내 반응을 지켜보던 그녀기 피식 웃었다.

"빨리 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에우제니아를 말로 이기기가 힘드네.

이게 군대 사령관의 짬밥인가?

"예.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습니다."

에우제니아와의 말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바깥으로 나갔다.

노아와 에리엘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

다가가니 노아가 말없이 나를 껴안아왔다.

그녀는 내가 엄청 그리웠던 것 같다.

마르벨스에 다녀왔을 때도 이랬었지.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아를 못 본 지도 벌써 1달이 넘었으니까.

고개를 들자 바뀐 계급장이 눈에 띄는 에리엘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그래. 강한윤 중위.. 가 아니라 대위군. 아무튼 여기서 또 한 건 했나?"

"예. 당연하지 않습니까."

멋지게 안다이얄을 점령했다.

거기에 배신자인 칼레보른을 색출해서 처리를 했다.

"처음 왔을 때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했다만 벌써 대위라니 말이 믿기 힘들군."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그래. 강한윤... 대위의 공을 생각한다면 진급이 느린 편이지."

바뀐 계급이 익숙지 않아 말을 늘어트린 에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을 4개나 점령했는데 이제야 진급이라니.

진작 진급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아직도 중위인데..."

"그럴 수 있지."

가슴팍에서 중얼거리는 노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아직 성장이 더 필요하다.

성장을 하게 된다면 공적도 쌓이고 계급도 자연스럽게 오를 터다.

"에리엘 준장님. 노아와 잠시 시간을 내고 싶습니다."

"그래. 연인끼리 재회했는데 내가 방해한 것 같군. 방해꾼은 사라져야 좋겠지."

에리엘이 장난기가 다분한 말투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노아 좀 데려가겠습니다."

"천천히 즐기고 오도록."

"그런 거 아닙니다."

에리엘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떠나가고 나는 노아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갔다.

"오랜만이야. 노아."

"... 너무 늦었잖아. 강한윤. 너무 늦어서 내가 찾아오는 게 더 빠르다니."

"쓸쓸해서 곰 인형이랑 지냈어?"

나의 장난기 섞인 말에 노아가 가슴팍을 주먹으로 팍팍 때렸다.

아프다.

나름대로 약하게 친 것 같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

"아무튼 나도 그리웠어."

노아에게 키스했다.

그녀도 몸을 안겨오면서 키스를 받아들였다.

느긋하게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며 입술을 부딪쳤다.

혀를 섞는 야한 키스는 저녁으로 미뤄도 괜찮지.

"하아.."

우리는 서로 숨을 내뱉었다.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 노아에게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노아. 선물이야. 요새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서 미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서 그녀의 약지에 끼웠다.

손에 끼워진 반지를 빤히 바라보던 노아가 또 다시 키스해왔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우리 여기서 할까?"

노아의 말에 바지를 벗을 뻔 했다.

키스를 하면서 이런 야한 말을 하면 몸이 먼저 반응해버린다.

충동을 겨우 참아낸 나는 노아를 만류했다.

"지금 말고 오늘 밤에 찾아갈게. 그보다 노아 너랑 가야할 곳이 있어."

"내가 가야할 곳이 있다고?"

"응."

나는 노아에게 세계수의 축복을 주기로 결정했으니까.

우리는 세계수로 가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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