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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44화 (44/163)

〈 44화 〉 44화

* * *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건 수십 장의 문서의 선동이다.

수북이 쌓여있는 서류들은 내가 대충 준비한 게 아니었다.

검토만 하더라도 이틀은 걸릴 양에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놨다.

입증이 되는 진실과 입증이 되지 않는 거짓이 섞여있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칼레보른이 숨긴 사실이 있구나.'

사실 그가 한 거라고는 몇 개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게 제일 컸다.

요 한 달 동안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라이라가 노력했고 결국에는 칼레보른에게 치명적인 증거를 얻어냈다.

그게 바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암살 의뢰서였다.

이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라이라가 어느 길드인지는 감이 잡혀도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래서 칼레보른을 묻기 위해 선동과 날조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치명적인 증거를 발견해버렸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증거들을 보던 칼레보른은 인상을 구겼다.

"왜 반박을 하지 않지? 그럼 혐의를 인정 하는 건가?"

칼레보른에게 걸린 죄목은 여러 가지다.

횡령, 내통, 배신.

한 가지만 하더라도 심각한 내용들인데 그걸 모아놓은 종합세트다.

최소한 사형 선고가 되리라.

아군을 배신하고 적과 내통하는 것은 중범죄니까.

나에게 암살 수주를 한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내용이었다.

"입을 열질 않는 군. 끌고 가."

에우제니아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을 침묵하던 칼레보른이 그제야 움직였다.

"크흐흐... 크하하하하! 망할 인간 녀석.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해놨어!"

"그래서 할 말은 없나?"

에우제니아가 심드렁한 채로 칼레보른을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이미 얘기가 끝나있다. 칼레보른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줬고 증거도 확실하다.

그녀가 칼레보른을 처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죽일 생각밖에 없겠지.

그렇게 한참을 웃던 칼레보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 색의 물체는 보라색의 마나가 표면에 흐르고 있었다.

"아니 씹."

저 물건이 뭔지 알고 있는 나는 소리를 질렀다.

저걸 왜 가지고 있어 저 미친새끼가.

"에우제니아!"

빨리 칼레보른을 막으라고 소리를 쳤다.

여기서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칼레보른을 막아야 한다.

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칼을 뽑아서 휘둘렀다.

하지만 칼레보른은 이미 움직였다.

검은색 물체.

아니 계약의 열매를 먹어버린 칼레보른의 주위로 강력한 마나 결계가 생겨났다.

"누가 나를 불렀지?"

마나 결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다! 나 하이엘프 칼레보른이 계약을 원한다!"

"계약이라. 대가는?"

"나의 수명! 남은 수명과 젊음을 대가로 계약하길 원한다."

"그래 뭘 원하지? 힘? 돈? 명예? 뭐든지 얘기해라."

"여기 있는 모두를 전부 죽일 힘!"

"아니."

이 미친놈이 진짜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네.

"저딴 새끼가 하이엘프라고? 나참 환장하겠네."

에우제니아도 머리를 긁었다.

강력한 마나 결계에 휩쓸리지 않도록 거리를 벌렸다.

악마와 계약을 할 준비를 끝내놨다니.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전 병력은 바깥으로 나가라! 어차피 도움도 안 되니까! 내가 처리하도록 하겠다!"

에우제니아의 명령에 다른 이들은 바깥으로 도망쳤다.

사령관이 내리는 명령이니 반박을 하는 이는 없었다.

"에우제니아! 나는?"

"너는.. 알아서 해!"

그만큼 믿음이 있으시다는 거겠지.

일이 어떻게 구경이 되는 지 궁금하기 때문에 자리에 남았다.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아직은 아냐."

벽에서 스르륵 나온 라이라가 말을 걸고서 다시 사라졌다.

위험하다면 라이라가 도와주겠지.

"크하하하! 이 칼레보른을 막다니! 너희들을 죽이고 사령관의 자리를 차지겠다!"

이제는 뇌가 맛이 가버렸나.

증인이 몇 명인데 이 쪽을 정리하더라도 사령관 자리는 못 먹는다.

계약의 대가 때문인지 칼레보른의 몸이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20대의 탱탱한 피부에서 40대 중년의 피부로 변한 칼레보른은 미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엘프는 늙어도 잘 생겼네 무슨,

마기에 침식된 칼레보른의 마나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마나 결계의 흐름도 점차 빨라지고 결계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튀어나왔다.

악마의 하수인들.

네 발로 걸어 다니는 마물들과 함께 등장한 것은 악마였다.

검은 말에 올라타 있는 악마. 키마리스였다.

"크큭. 오랜만에 몸을 움직일 기회가 생겼군."

악마 키마리스가 낮게 웃었다.

칼레보른이 수명과 젊음을 대가로 지불한 대신 악마가 강림했다.

"마족과 내통하다니. 진짜 미쳐버렸군! 칼레보른!"

"미친 건 저딴 인간을 믿고 따르는 오드웰 연합군이다!

연합군은 오크와 엘프, 수인만으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인간을 받아들이다니! 순결하지 않다!"

마기에 침식된 칼레보른이 헛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오염된 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키마리스가 결계 밖으로 거의 빠져나왔다.

에우제니아가 아공간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크고 묵직해 보이는 양손 도끼를 잡은 에우제니아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붉은 색으로 빛나는 거인의 도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통한 게 고작 이딴 악마라고? 쓰레기 같은 새끼."

키마리스가 완벽하게 소환되자 에우제니아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적에게 한 번의 기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전력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그녀의 공격에 스친 악마의 하수인들이 단숨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공격을 막아낸 키마리스는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크윽... 이게 무슨.."

"방금 전에 움직일 기회니 뭐니 허세 떨던 놈은 어디갔냐?"

에우제니아의 공격에 건물이 흔들렸다.

이게 소드마스터 상급의 실력이다.

에우제니아에게 일방적으로 키마리스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인간!!!!"

그 옆으로 칼레보른이 검을 든 채로 나에게 뛰어왔다.

원래 전투직도 아닌 놈이 마기에 영향을 받아서 강해진다 한들.

그렇게 강해지지도 않고 빨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

­카아앙!

칼레보른의 검이 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망할! 인가아아안!!!"

내 옆을 조용히 지키고 있던 라이라의 단검에 막혔으니까.

"참 아쉬우시겠어."

보라색의 마나.

아니 마기를 흘리고 있는 칼레보른을 향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쩌나 이게 현실이잖아."

칼레보른의 마기로 감싸진 검이 점점 부식되었다.

라이라가 들고 있는 검이 붉게 빛났다.

압도적인 무기의 성능을 칼레보른이 이길 방법은 없다.

"당신. 이 엘프를 어떻게 하길 원하죠?"

"일단은 생포할까?"

죽이기보다는 생포해서 벌을 주고 죽이는 쪽이 더 그림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악마와 내통한 하이엘프를 내세운다면 명목도 확실하다.

칼레보른과 연이 있는 녀석들 중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을 전부 처리해도 되고 좌천을 보내도 된다.

내통의심자라는 타이틀은 어디에 붙여도 서용하기 좋으니까.

"망하아아알!"

칼레보른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검을 휘두르지만 라이라에게 손쉽게 막히고.

"크허어억..."

제압당했다.

라이라의 발차기로 맞아 벽에 부딪힌 칼레보른이 축 늘어졌다.

성능 확실하구만.

에우제니아 쪽은..

"더 덤벼!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으라고!"

"크윽..."

키마리스를 샌드백처럼 패고 있었다.

타고 있는 말도 다쳤고 키마리스 본인도 몸이 성하진 않았다.

­서걱!

"크학...!"

에우제니아의 공격에 키마리스의 왼팔이 날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을 노리고 도끼를 휘둘렀지만.

­콰앙!

마나 결계로 도망친 키마리스에겐 닿지 않았다.

"아 조금만 가지고 놀 걸 그랬나."

키마리스를 죽이지 못한 에우제니아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마나 결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방 안에 남은 거라곤 악마의 하수인 이었던 고깃덩어리와 기절해있는 칼레보른이었다.

이 새끼 참 잘 자네.

"야. 일어나봐."

­짝! 짝!

널브러져 자고 있는 칼레보른의 뺨을 때리자 화들짝 놀라면서 깨어났다.

"무...무슨...!"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어때? 이젠 되지?"

라이라의 발차기를 맞은 배가 아픈지 몸을 웅크린 칼레보른이 주위를 훑었다.

도끼를 에우제니아와 단검을 든 채로 무표정으로 들고 있는 라이라.

딱 봐도 상황이 정리된 상태다.

"젠장..."

애초에 칼레보른이 악마를 부른다고 하더라도 비빌 수가 없었다.

상급의 악마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면 모르겠지만 나온 악마가 고작 키마리스였으니까.

키마리스는 소드마스터 하급 수준의 악마니까.

에우제니아와 비교할 수 없이 약하다.

그러니까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겠지.

설령 더 높은 경지의 악마를 소환한다고 한들 대부분은 에우제니아에게 정리된다.

그녀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최상급의 악마가 나왔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확률은 낮으니까.'

저 열매를 먹는 건 가챠다.

강하고 좋은 악마가 나올 확률은 낮고, 반대로 약한 악마가 나올 확률은 높다.

에우제니아보다 강한 악마가 나올 확률은 당연히 낮다.

"정신이 들어?"

칼레보른은 버림받은 개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

칼레보른은 조사를 받기 위해서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저 녀석이 어디로 가는 지는 알바 아니다.

칼레보른의 집무실에서 챙길만한 게 있는 지 확인해야하니까.

'어디 있는 진 뻔하지.'

에우제니아는 칼레보른을 데리고 가면서 집무실에는 나와 라이라밖에 없다.

집무실 조사라는 명목 하에 대놓고 방을 뒤질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찾아야 하는 물품은 세계수의 증표.

일반 세계수의 잎과는 다르게 초록색이 아니라 황금색이다.

그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칼레보른이 몸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물품은 금고에 보관하는 게 사람의 습성이다.

그리고 칼레보른도 마찬가지로 금고를 가지고 있다.

책장에 꽂혀있는 이름들을 쭉 살폈다.

­엘프의 올바른 신념

­세계수의 마음

­세상 속 자유로부터

­엘프의 진정한 행복

­사랑의 기술

­정의란 무엇인가?

아무리 봐도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칼레보른이 읽었을 리가 없다.

딱 봐도 고지식해보이는 제목들이 가득한 책들을 훑어본 뒤 책을 하나 집었다.

'세상 속 자유로부터' 하품이 나올 법한 제목이지만 읽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책을 당기자 딸깍 하면서 책장 속의 장치가 작동됐다.

"숨겨진 장치네요."

"맞아."

여기 있는 책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책 제목에 적혀있는 단어다.

2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

신념, 마음, 자유, 행복, 기술, 정의

이걸 순서대로 당기면 숨겨진 방이 열린다.

'자유 행복 신념 마음 정의 기술 이었나?'

매 회차마다 꼬박 꼬박 들러준 덕분에 까먹지 않고 암호를 풀어나갔다.

­딸깍

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을 당기자 마지막으로 장치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끼리릭

­드르르르륵

안에서 기계가 움직이면서 막혀있던 책장과 철문이 열렸다.

1평도 안될 법한 작은 방 가운데에는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자물쇠로 잠겨있지만.

"라이라. 이것 좀 열어줘."

그녀에게 부탁을 하면 손쉽게 열 수 있지.

마나 자물쇠가 그녀의 무기 효과로 인해서 단숨에 박살났다.

­끼이익

상자를 잡고 열었다.

그 안에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세계수의 증표와 종이 몇 장이 보였다.

세계수의 증표를 배낭에 집어넣은 뒤 종이를 집었다.

­칼레보른님에게

누군가가 칼레보른에게 보낸 편지였다.

"흐음."

북부의 에우제니아를 밀어내고 사령관 자리를 어떻게 차지할 지에 대해 적혀있다.

그것 외로도 인간 세력 쪽에도 오드웰 연합군을 위해서 일해 줄 동료가 있다는 내용과 안부를 전하는 말이었다.

'이 내용이라면.. 누가 보냈는지 알겠네.'

오드웰 연합군에 있는 쓰레기라면 바로 죽일 테지만 아쉽게도 인간 세력 측의 영웅이다.

유리한 쪽에 붙으려고 노력하는 박쥐는 빨리 떼어내야지.

이건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자.

편지도 배낭에 넣은 뒤에 책을 역순으로 당겨서 숨겨진 방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서 에우제니아를 찾았다.

칼레보른이 어떻게 되는 지 논의를 해야하니까.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칼레보른은 어떻게 할 겁니까?"

하마터면 이름으로 부를 뻔 했다.

"칼레보른은 사형 혹은 그와 비슷한 형벌을 받게 되겠지.

저런 버러지는 죽여 버리는 게 나은데.

엘프의 대표니 뭐니 하면서 감싸려고 한단 말이지."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북부에 남을 거지?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이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북부에서 활동을 안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칼레보른의 빈자리는 누가 들어가죠?"

"음.. 그건 아마 논의를 해봐야겠는 걸."

엘프의 대표가 사라졌으니 그 자리를 메울만한 인원이 필요하다.

능력이 있고 지휘를 할 수 있는 엘프.

"제가 한 명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떠오르는 영웅이 한명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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