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41화
* * *
안다이얄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이 곳을 거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한 시설 하나도 없어서 여기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의 성벽을 다시 쌓아야할 테고, 병사들이 자기 위한 임시 거처도 필요한 법이다.
그것 외에 다른 보급들도 필요하겠지만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
아. 바닥에 토마토가 하나 굴러다니네.
"이걸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합니까. 다시 만들어야죠."
어차피 안다이얄은 임시 거점이라 건물다운 건물도 없다.
카브란 산맥이 마을과 인접해서 그런 거지 여기는 황량한 게 기본이니까.
드워프들을 불러서 광산 마을이라도 짓는다면 모르겠지만 여기는 광산도 없다.
다음 산맥인 볼라브 산맥까지 간다면 모를까.
여기는 그냥 대충 천막 몇 개로 텐트나 만드는 게 고작이다.
"어차피 후퇴하면서 부술 수 있는 건 다 부쉈을 겁니다."
후퇴할 때 상대가 이용할 수 없도록 물자를 파괴하고 부수는 건 기본이다.
힘으로 몰살시키고 뺏는 게 아니라면 전리품 같은 건 없다고 봐도 된다.
"하아... 짜증나네."
에우제니아가 무너져버린 성벽을 툭툭 차며 말했다.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보니 안다이얄을 점령당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모든 물자를 뺏겼다거나.
에이.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일단 안다이얄 복구를 들어가도록 하죠. 그게 최우선일 테니까요."
거점이 제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니까.
일단은 복구를 해놓고서 다음 작전을 생각하는 게 맞다.
"그래. 다시 거점상태로 복구하긴 해야지. 다들! 안다이얄 복구 작업을 시작하자!'
에우제니아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장비를 챙겨서 작업에 착수했다.
하기는 싫은데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표정.
딱 작업 나온 병사들 모습이었다.
"강한윤 너도 따라와."
"예?"
"너도 작업해야지 빼려고 해? 장교면 모범을 보이라고."
이런 시발.
구석에서 짱박혀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에우제니아에게 붙잡혔다.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엉?"
"이번 작전을 지휘하느라 힘드시지 않습니까? 이대로 병사들을 감독하는 건 어떻습니까?"
"하. 이 새끼 머리 쓰네. 그렇게 빠지고 싶냐?"
잔머리를 굴려서 최대한 들키지 않게 말을 했지만 손쉽게 들켜버렸다.
그녀가 입 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작업하는데 너가 빠지겠다고? 감당 되냐?"
당연히 감당이 안 되지.
북부에서 지내면서 에우제니아와 친해졌다 한들 계급의 벽은 두껍다.
여기서 에우제니아에게 반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된 이상 작업을 해야겠지.
"하아. 젠장"
나는 그녀를 따라서 안다이얄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크으윽..."
"어유 저 저.. 쌩쇼를 하네."
"진짜로 힘듭니다."
내가 일하는 걸 보더니 에우제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로 힘든걸 어떻게 해.
돌을 들어서 나르니 팔이 후들거리고 허리가 아프다.
아니 몸에 안 아픈 곳이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하는 에우제니아가 있어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야. 내 눈치 보는 게 도망치려는 거냐? 아니면 이 옷이 신경 쓰이는 거냐?"
"솔직하게 말합니까?"
"아니 됐어 인마. 뻔한데."
땡볕에서 일하기보단 그늘에서 쉬고 싶다.
탱크탑 하나만 입고 있는 그녀의 몸도 신경 쓰인다.
둘 다 정답이었다.
그래도 눈요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에우제니아의 가슴을 한 번씩 보면서 힐링을 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아무튼 안다이얄 복구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
해가 지려고 하자 안다이얄 거점의 복구 작업이 멈췄다.
에우제니아의 명령이기도 했고 작업이 일단락됐기 때문이다.
"하아 힘들어 죽겠네."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타지로 와서 웬 고생이냐.
아니. 이 세상 전체가 타지나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정이 든 지역을 꼽으라면 남부의 지역이다.
아는 영웅들이 거기에 모여 있기도 하고.
원래는 남부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공략해 올라올 생각이었다.
에우제니아 때문에 상황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북부에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남부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했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3레벨이 올랐다는 정보가 보였다.
50만 골드를 쏟아 부어서 고작 3레벨이 올랐다고? 가성비가 너무 안 좋다.
50만 골드로 아이템을 맞췄다면 전설급 아이템 2개는 구입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좋은 아이템을 에우제니아에게 쥐어준다면 패왕처럼 썰고 다닐 수 있다.
결국엔 비슷한 성능의 아이템을 가진 영웅에게 고전하겠지만.
뭐 50만 골드의 가치는 그만큼이라는 거다.
허무하게 쏟아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50만 골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니까.'
안다이얄 거점 점령, 레벨 상승, 에우제니아 라인 탑승.
이 정도면 나름대로 쏠쏠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걸 위안으로 삼도록 하자.
일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듯이 거점에서 밥을 하는 냄새가 난다.
배고프다. 힘드니까 바닥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여기도 별은 많네.'
군대의 공통된 특징은 별이 잘 보이는 건가?
그렇게 하늘의 별들을 세고 있자 누군가 나의 시야를 가렸다.
오크 병사였다.
"강한윤 중위님. 사령관님이 부르십니다."
"나를 부른다고?"
왜지?
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볼 일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데.
에우제니아가 있는 지휘관용 천막으로 다가갔다.
사람 수십 명은 들어가고 남을 크기지만 입구는 좁다.
거기에 두툼한 천으로 막혀있어서 문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났다.
진수성찬 급은 아니지만 충분히 차려진 밥상.
그리고 에우제니아는 군복이 아니라 평상복이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는 평범했지만, 에우제니아가 입어서 그런지 더욱 돋보였다.
"여기에 앉아."
그녀가 의자를 손으로 두들겼다.
"오늘 회식이라도 합니까?"
"강한윤 니가 이번에 일을 해준 덕에 내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으니까. 이런 거라도 챙겨주려고 했지."
"저를 위한 상인가보네요."
"그렇지."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에우제니아의 옆에 앉아서 상의를 벗어버렸다.
어차피 밥을 먹을 때 갑갑하기도 하고 그녀가 이런 걸로 뭐라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잔을 들어 올린 뒤 나도 자연스럽게 잔을 잡았다.
"그럼 우리 강한윤 중위를 위해서 한잔 할까?"
"예."
팅!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친 뒤에 술을 한 잔 마셨다.
벌써 취할 거 같은데.
독한 술은 아니지만 소주 정도의 도수를 지닌 술이었다.
"강한윤. 가장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십쇼."
"이런 작전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내는 거지? 나는 이런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이런 작전이라.
몬스터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전략은 나도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사용했을 뿐이다.
"참신한 작전을 어떻게 떠올렸는지 궁금하신 겁니까?"
"그렇지! 나는 머리가 잘 안돌아가서 이런 게 안 되거든."
그건 그럴 수 있다.
나도 플레이타임 2000시간 까지는 정형화된 플레이를 고집했으니까.
경험이 쌓이다보니 생각이 넓어지고 다양한 전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
에우제니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이다.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가진 괴물에게 경험 부족이라니.
웃기지만 맞는 소리다.
그녀도 게임을 3000시간 했으면 지금보단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을 거다.
인터넷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정보도 얻었다면 훨씬 잘했겠지.
"그냥 하다 보면 됩니다."
"하다 보니 된다니. 이래서 재능을 가진 놈들이 문제라니까?"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술을 마셨다.
소드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를 정도면 노력으로는 힘들다.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압도적인 재능이.
"뭐 아무튼 그런 겁니다. 전략이나 전투나 전부 하다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백전노장처럼 말을 하네."
"실력은 백전노장 못지않습니다."
"그런가? 하긴 안다이얄을 한 달 만에 수복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그녀가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마시는 속도가 좀 빠르다. 하지만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분위기를 깨기고 싫고 오늘은 마시고 싶은 날이니까.
그렇게 술을 마시는 횟수가 점차 쌓여가고.
세상이 점점 어지럽게 움직였다.
아.
눈꺼풀이 무겁고 숨에서 술 냄새가 난다.
취기가 올라왔다.
"강한윤 중위는 정말 뛰어난 인재야. 탐이 날 정도로 말이지."
"탐이 날 정도로 말입니까?"
에우제니아가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술에 취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눈에 욕망과 탐욕이 깃들어있다.
마치 나와 섹스하기 전의 노아나 라이라처럼.
허벅지 위로 올린 손에 힘이 실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
에우제니아는 술을 마시면서 강한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욱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촛불에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얼굴은... 나름 괜찮고.
별거 아닌 말에도 웃어주고.
그녀도 강한윤을 따라서 웃었다.
'강한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 까.'
이번에는 작전을 완벽하게 성공시켜서 그녀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주었다.
오크 족은 힘이 강한 대신 전략에 약하다.
그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준 것이 바로 앞의 사내. 강한윤 중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사령관 자리에서 내려왔겠지.
평범한 전투보직으로 활동했을 게 분명하다.
에우제니아에겐 성과를 올리겠다는 야망은 있지만 능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사내는 달라.'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작전도 성공시키고 오크라고 선입견을 가지지도 않는다.
처음 보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계급을 보고 남들처럼 쫄지도 않고.
해야 하는 말은 전부 하는데다가.
자신감이 넘치는 말을 듣다보면 결국에는 이번처럼 이상한 전략이더라도 수긍하게 된다.
거기에 높은 자리에 올라온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평범하게 받아주는 모습이 그녀에겐 더욱 호감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의외로 괜찮네.'
그녀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턱을 괴고 강한윤을 보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왠지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소드마스터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겪는 이상 증세다.
고작 술을 좀 마셨다고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고 컨디션이 무너지다니.
술에 적당히 취한 그녀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이 자리에서의 상황이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러자 몸이 서서히 강한윤 쪽으로 다가갔다.
'정말로 마음에 든단 말이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진주처럼 가치가 높다.
그녀에게 없는 작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내.
정말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회의실을 데려갔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강한윤 중위는 정말 뛰어난 인재야. 탐이 날 정도로 말이지."
그녀의 입에서 솔직한 감상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강한윤의 허벅지로 손을 올렸다.
사내를 휘어잡으려면 몸으로 유혹하는 게 확실하니까.
강한윤을 가지려면 이 방법이 제일이라는 것을 에우제니아는 알고 있었다.
"사령관님."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대로 조용히 있어줬으면 했다.
이런 감정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이만큼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을까.
그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바깥의 병사들의 소리로 시끄럽지만 안은 고요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고.
에우제니아는 눈을 감고 강한윤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전투를 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귀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간 에우제니아의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촉촉했다. 입술의 감촉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경험이 없는 그녀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강한윤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열정적으로. 심장이 시키는 대로.
가슴이 닿을 정도로 달라붙으면서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키스를 한 뒤에 에우제니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하아.."
이런 느낌이구나. 나쁘지 않네.
키스를 하는 동안 술 냄새가 나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욱 야한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에우제니아."
강한윤이 에우제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