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9화
* * *
물론 지금의 임무는 이것뿐이지만, 나중엔 천족들을 운영할 생각도 있다.
마법 스크롤과 천족들을 기반으로 제공권을 장악한다면 훨씬 좋겠지.
돈이 많이 깨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천족이 노는 것보단 나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베아트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 등에 태워달라고 하셨나요?"
"예."
"그...그건 좀... 아니.. 아니에요. 할 게요."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은 그녀가 대답했다.
왜 당황하는 거지? 아. 혹시 태워달라는 게 무례한 부탁일지도 모른다.
"무례할지도 모르겠지만 작전 때문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알겠어요."
생각보다 무례한 건 아닌가?
베아트리스의 반응을 보니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태워드려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작전일은 아마... 10일 후쯤 될 테니까요. 그때 따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곘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슴이 같이 출렁였다.
수영복처럼 입은 게 마치 남자를 대놓고 홀리려는 복장처럼 보인다.
마사지 복장 급은 아니지만 그만큼 야하다.
"얘기가 쉽게 풀려서 다행입니다. 저는 베아트리스님이 거절하면 어쩔 지 조마조마했습니다."
"아뇨.. 오드웰 연합군을 위해서라면 뭐든 지 할 수 있어요."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 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귀여운데 성능은 하위권이라니.
미모를 얻은 대신 성능을 잃은 영웅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 했다.
"거기에 공적을 세우면 안다이얄 남쪽의 입지를 단단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안다이얄 남쪽에 천족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있던가?
그게 천족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긴 거기서 활동하는 천족들은 만족도와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예루살렘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작전 잘 부탁드릴게요..!"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렇게 보여도 저 여자도 별 하나인데. 이쪽에 고개를 숙이다니.
안다이얄 남쪽을 그렇게 가지고 싶었나보다.
얘기를 무사히 끝마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라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어. 갈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라이라에게 짧게 키스했다.
"... 이럴 땐 키스 하지 말아요."
"왜?"
"그냥 하지 마요."
그녀기 안상을 찌푸렸다.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신경 쓰이는 걸까.
냄새는 안 느껴지고 달달할 뿐인데.
천족과 얘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바깥으로 향했다.
***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리자드족 달리스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3중 마법 각인 매혹, 혼란, 용기를 부탁했었지.
일주일 후까지 완성을 하라는 숙제를 내줬었는데.
술식 능력에 비해서 각인이 월등히 뛰어난 달리스니까 실패했을 리가 없다.
"오늘은 암살자가 오진 않네."
암살자들이 덮쳐왔던 그 지역을 지나가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닌자인지 암살자인지 모를 녀석들.
그리고 라이라가 사라지고 들려온 끔찍한 비명.
야하고 요염하게 생긴 그녀가 그런 끔찍한 일을 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시체는 치웠나보네."
"네. 흔적을 제외하고는 없네요."
에우제니아가 나름대로 조사를 한다고 했으니, 뒤처리를 하면서 시체를 치운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암살자라고 한들 시체를 산에 내버려두면 뒤숭숭한 소문이 날 테니까.
"그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알아냈어?"
"거의 알아냈죠. 정보가 없다고 한들 알아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라이라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에우제니아는 아무런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는지 소식이 없다.
하지만 라이라가 알아냈다면 충분하다.
그녀라면 일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해낼 테니까.
산책하듯이 느긋하게 걷자 어느새 달리스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잡상인을 배척하는 내용의 팻말을 지나서 문에 가볍게 노크했다.
끼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달리스의 눈이 보였다.
"달리스. 오늘이 그 날이에요."
내 얼굴을 까먹진 않았는지 호들갑을 떨며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들어오게!"
달리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면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오늘 내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저번보다는 정돈이 된 내부의 모습이었다.
"그럼. 물품을 확인해볼까요?"
"여기 있다! 완벽하게 해냈지!"
"오."
스크롤에 각인이 되어있는 상태를 보니 완벽하다.
그려줬던 것과 100% 똑같은 모양의 각인의 모습에 나는 만족했다.
"완벽하게 해냈네요. 각인에 문제도 없고 배치도 정확하고 마나 흐름에도 이상도 없고."
"흠흠. 그렇지! 내가 누군데!"
가슴을 쭉 펴면서 자신만만하게 달리스가 소리쳤다.
"그런데. 이걸로 만족하는 건 아니죠?"
"어?"
"저에겐 3중 마법 각인에 대한 정보가 많습니다."
처음엔 머리에 때려 박아서 외웠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
3중 마법 각인은 눈감고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 달리스가 군침을 흘릴 터.
그러나 예상과 다른 답변이 들렸다.
"이번 3중 마법 각인으로 많은 지식을 얻었지! 자네의 도움이 없어도 이제는 혼자 해낼 수 있을 거야! 벽을 깨부쉈다고!"
아마도 3중 마법 각인을 배우냐 마냐 그 기로에 서있던 걸 내가 타이밍 좋게 도와준 듯하다.
"더 이상의 의뢰는 받지 않겠네! 3중 마법 각인을 공부해야하니 말이야!"
이렇게 되면 나가리인데....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카드를 지금 사용해야하다니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리스 말고는 적임자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3중 마법 각인도 필요가 없나 봅니다."
"다른 3중 술식이라고...?!"
"예. 여러 종류의 3중 마법 각인이요. 싫어요?"
달리스가 입만 뻥긋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다른 종류의 3중 마법 각인은 있으면 무조건 좋으니까.
3중 마법 각인을 보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모든 각인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문양은 정해진 틀에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많은 데이터가 쌓여야 어떻게 사용하는 지 분석할 수 있다.
대충 때려박아서 진행하는 것보다는 견본이 많은 게 좋다.
내가 건네준 3중 마법 각인 하나로는 부족함을 느낄 게 분명하다.
"물론 공짜는 아니긴 한데 일 한두 번만 도와드리면 얼마든지 드리죠."
머리 깨져가면서 독학으로 하는 것 보다는 교보재가 더 있으면 편하지 않겠어? 라는 듯이 달리스를 살살 꼬드겼다.
"어디에도 없는 3중 마법 각인입니다."
"크흠... 조금만 시간을 주게."
달리스가 고민을 했다.
아무도 돌파하지 못한 3중 마법 각인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니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당연하지. 그에게 그려줄 3중 마법 각인들은 전부 쓰레기 조합이니까.
이딴 조합으로 3중 마법 각인을 짜는 놈은 없을 거라고 자신 한다.
어디에도 없긴 하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3중 마법 각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제가 따로 주석까지 달아드리죠."
"..."
"이해가 될 때까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3중 마법 각인을 알려주는 것에 주석을 달아주고 따로 과외까지 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래도 거절할 거야? 나는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합니까."
"5장. 3중 마법 각인의 견본은 최소 5장은 더 원한다."
"그렇다면 의뢰로 맡길 마법 각인과 다른 견본 4개.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3중 마법 각인을 더 그려주자 만족한 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맡길 3중 마법 각인 부유, 쉴드, 증폭을 적은 뒤에 무난한 조합의 술식 네 개를 적었다.
치유력 증가, 회복력 증가 , 마나 회복력 증가
재치 증가, 쉴드량 증가, 기분 좋은 향기.
청결함, 점프력 증가, 어둠 저항 증가.
신성력 저항, 음식 효과 증가, 악취
혹시나 3중 마법 각인이 유출될 경우 파장이 제일 적은 쓰레기들로만 모아놨으니 걱정 없다.
무난하다는 건 혹시나 하는 일이 생겨도 문제없다는 뜻의 무난함이다.
이 조합으로 버프를 걸어봐야 다른 조합에 비해 극도로 낮은 효율을 자랑한다.
슬슬 내 행동이 다른 영웅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게임 시나리오대로라면 초반부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이번에 맡기는 의뢰품목들은 어차피 다 쓰레기니까 걱정은 없다.
버프와 디버프를 동시에 주는 매혹, 혼란, 용기
애매한 성능을 자랑하는 부유, 쉴드, 증폭
이 세 개의 조합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걸?
내 작전 말고는 사용할 곳이 없다.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확실히 3중 마법 각인이 맞군. 이번에도 일주일 인가?"
"네. 당연히 일주일 이죠."
일주일이 아니면 시간이 애매해질 가능성이 있다.
"일주일 안에 완성하지 못하면 이번 일은 없는 겁니다."
"그건..."
"그 정도도 못하겠습니까? 할 수 있잖아요. 못하겠다고 하면 없는 걸로."
"아니! 아니다! 할 수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마법 각인을 그려놓은 양피지를 집으려고 하자 달리스가 허공에 손을 저었다.
힘든 일이긴 해도 그에게는 3중 마법 각인이 필요할 테니까.
"그럼 일주일 후에 오겠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그..그래..."
"아. 그리고 다음에도 부탁할 일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
달리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치 일주일 동안 갈릴 미래를 아는 대학원생처럼 보였다.
***
"하아암... 할 일이 없네."
일을 빨리 해치운 뒤에 남는 것은 시간이었다.
전투 직종이 아니라서 수련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북부로 끌려와서 작전을 시행하고 있지만 북부에도 장교들은 따로 있다.
내가 서류 작업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강한윤. 상관이 일하고 있는데 놀고 있으면 눈치도 안 보이는 건가?"
"왜 그러십니까.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저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사이인데?"
"목숨을 걸고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사이 아닙니까?"
"하아... 멀쩡한 인간인줄 알았는데 정신이 나간 놈이었잖아."
하긴. 오드웰 연합군에 임관을 요청한 인간이 정상일 리가 없지.
에우제니아의 혼잣말이 이쪽까지 들렸다.
할 일이 없는 나는 사령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라이라도 북부에서 일이 있다고 해서 따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마다 사령실에 들러서 빈둥거렸다.
암살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서 혼자 있는 것 보다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는 사령실이 낫지.
그 보디가드는 바로 사령관 에우제니아다.
"제가 밖에 나가서 암살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이 씹새야! 그렇게 있을 거면 서류 작업이라도 해!"
에우제니아가 던진 서류뭉치를 받아들었다.
눈치도 슬슬 보이던 참이었는데 일거리를 던져준다니 가뿐하게 해주지.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서류를 읽었다.
이건 보급 물자들의 이동.
이건 영웅들에게 지급된 돈.
북부 수인들의 요청.
음 이건 무조건 거절당하겠네.
그렇게 슥슥 훑어보던 도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전선이 가장 밀리는 건 북서부인 카브란 산맥 쪽인데 지원은 북동부로 몰리고 있다.
미묘한 수치지만 북동부 쪽이 조금 더 우세한 수치를 기록했다.
수치가 중구난방이지만 나에겐 게임에서 내정을 많이 한 경험이 있다.
이런 수치를 읽고 분석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이벤 산맥 쪽에 몰릴 이유가 있나?'
하이벤 산맥은 수성을 하기 편한 지형이다.
북동부에서 엘프들이 그렇게까지 불리하진 않다.
오히려 오크와 수인이 몰려있는 북서부로 지원이 많이 필요하다.
북서부는 공격이 불리한 상황이니까.
이 곳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수상함을 느낀 나는 이전의 기록을 전부 뒤져보았다.
북동부로 몰아주려는 흐름이 포착하고 의심은 확신이 됐다.
꼼꼼히 살피지 않는다면 눈치 채기 어렵지만 나에게 우연히 걸렸다.
'어떤 새끼가 결재를 했는지 볼까?'
수상한 놈이니까 수상한 짓을 했겠지.
결재 : 하이엘프 칼레보른 소장
정말로 수상한 새끼가 수상한 짓을 했다.
'넌 진짜 뒤졌다.'
일부러 엘프가 많은 북동부에 자원을 빼돌리다니.
이번 일만 끝나봐라.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작전 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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