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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36화 (36/163)

〈 36화 〉 36화

* * *

물론 칼레보른은 의심이 될 뿐이지, 암살자를 보낸 범인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우 의심이 되는 상황이다.

칼레보른의 행동은 게임에서 많이 봐왔으니까.

대부분의 루트에서 자신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방해를 하고 토를 단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 쌍놈이 바로 칼레보른이다.

'그놈이 제일 막나갔을 땐 어이가 없었지.'

한 번은 일부러 쭉 살려놔봣더니 악마랑 계약을 했다.

하이엘프란 새끼가 어떻게 악마랑 계약을 해서 세계수를 타락시키지?

이런 놈이 북부의 엘프 대표라고? 어이가 없지.

기억 속에 이것 말고도 그놈의 기행은 많다.

뒤통수 때리고 다른 세력으로 배신하기.

전투를 유도해서 몰살 시키기.

세계수에 불지르기 등등

할 수 있는 짓은 다 본 것 같다.

게임을 3000시간 플레이하면서 쌓인 데이터로 칼레보른에 대해 평가를 내리자면.

양심이고 뭐고 없는 개쓰레기 영웅이다.

영웅의 개개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좋음부터 나쁨으로 순위를 매긴다?

칼레보른은 무조건 하위에 위치한다.

깐깐하게 점수를 매긴다면 하위 10%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성능이 좋은 것을 포함하더라도 평가는 이정도일 거라 예상했다.

'이런 놈을 오드웰 연합군에 넣어놓으니 유저가 적지.'

세계수를 번성하게 만드려는 목표의식으로 따지면 다른 엘프들도 많은데.

굳이 칼레보른이 대표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이쯤 되면 칼레보른이 암살자를 보낸 거였으면 좋겠다.

굳이 일이 터지지 않더라도 어딘가로 유배를 보내거나 죽여버렸으면 하니까.

이왕이라면 증거를 남겨줘서 칼레보른을 합법적으로 처리할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심증은 거의 완벽하지만, 물증이 없어서 아쉽다.

"당신. 그 엘프를 죽였으면 하나요?"

어떻게 알았지? 내 얼굴에 쓰여 있기라도 한 건가.

라이라가 던진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 티나?"

"얼굴은 티가 안 나지만, 심장은 숨기지 않거든요."

그러고 보니 심장소리 얘기를 했었지.

라이라는 엄연히 따지면 NPC지 영웅은 아니다.

영웅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저 패치도 있지만 공식은 아니다.

그녀에 대한 데이터는 게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소리?"

"정보를 안다면서 이건 모르나 보네요."

"...그게 내 능력의 한계거든."

아는 건 알지만 모르는 건 모른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그렇듯이 내가 모르는 걸 알 수 없는 법이다.

"제 능력이에요. 미세한 소리도 감지해낼 수 있죠."

신기한 능력이네.

게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스킬이다.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니까 따지면 하위랭크에 위치하겠지만, 그녀에겐 다르다.

작은 소리도 민감하게 들을 수 있다면 암살자에겐 최고의 스킬일 테니까.

그녀의 스킬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밤에 왜 당한 거야?"

"밤이요?"

"그 첫날밤에 있잖아."

내가 의식이 있다는 걸 눈치 못챈 이유가 따로 있나?

심장박동 소리가 달라진 걸 들었을 텐데.

라이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길래 더 흥분한 건줄 알았죠."

실제로 사정하는 타이밍이 가까웠으니까.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을 터다.

게다가 몸에 정액좀 묻었다고 힘이 빠질거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뭐 나는 그 덕에 라이라랑 이런 사이가 돼서 좋아."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만지며 달라 붙었다.

눈을 흘긴 라이라가 담배를 피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 가기 전까지만 만져요. 저도 부끄러움은 느끼는 사람이에요."

이제는 허락해주네.

즐거운 감촉을 느끼니 평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마을로 도착하니 시간이 애매했다.

저녁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낮이라고 하기엔 늦다.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일이라는 건 빨리 처리해놓는 게 편하지.

할 일을 전부 끝내놓고 쉬는 게 최고니까.

"흠.."

가야할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고민이 된다. 어디부터 가야할까.

아이템 제작 쪽은 시간이 오래걸릴 수도 있으니 그쪽으로 가자.

드워프를 찾아가기로 결론을 내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내가 찾아가려는 드워프는 로하르.

손기술 능력이 가장 뛰어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드워프다.

다른 드워프들은 많지만, 로하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지금 만드려는 물품은 그가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제작능력 레벨은 초보, 견습, 전문, 장인, 명장 순이다.

명장 단계에 진입한 NPC를 찾아야 하는데, 이 시점에서 명장 단계에 진입한 NPC는 몇 없다.

북부의 드워프 로하르. 중부의 드워프 악시온, 남서부의 드워프 카인.

딱 세명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드워프는 로하르다.

다른 명장 드워프를 찾아가기엔 너무 멀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템을 만들어줄 시간이 있을까?

명장 단계의 대장장이라면 쉴 새 없이 바쁠 텐데.

그러나 여기에 있는 로하르는 한가하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대장장이니까.

나는 동네에 가서 대충 맥주를 통으로 구입한 다음 뚜껑을 열었다.

발효된 보리냄새. 맥주의 향으로 보아하니 신선하고 맛있어 보인다.

이 안에 준비해놓은 아이템을 하나 떨어뜨렸다.

농축된 박하원액. 거품이 나며 맥주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민트의 냄새가 났다.

"당신.. 대체 뭘 하는 거에요?"

"응? 이거? 선물."

"... 선물이라고요?"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선물이라고요?"

"왜 맛있는데."

민트의 맛을 모르네.

입안에 들어갔을 때 확 하고 퍼지는 상쾌한 느낌이 좋은 건데.

달고 시원하고 알코올의 알싸한 맛? 이건 누가 마셔도 치트키지.

혹시나 맛이 이상할까 싶어서 맥주를 한 모금 해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다.

편의점에서 민트 맥주를 사 마셨던 것과 맛이 얼추 비슷하다.

라이라는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당신... 정말로 그걸 선물로 줄 거에요? 드워프가 어떤 종족인지 모르는 건가요?"

"알고 있지 당연히."

맥주에 미친 종족이잖아.

맥주를 선물로 받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족이고.

하루 종일 맥주를 마시고 취하는 걸 즐기는 종족이다.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맥주를 더럽혔다면서 공격당할 수도 있어요. 그들이 맥주를 얼마나 신성시 여기는 데요."

"그건 알지."

한국인이 밥으로 대동단결 하듯이 똑같다.

드워프들은 맥주를 그만큼이나 좋아 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나쁜가?

상큼하고 시원할 뿐인데?

다시 한 모금 해봤지만 괜찮기만 하다.

"괜찮을 거야. 새로운 맥주라며 좋아할 걸?"

"...이상한 맥주로 망치에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라이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민트를 싫어하지?

3리터짜리 맥주통은 라이라가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광산으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

광산은 산맥 지하에 존재한다.

수백 미터는 될 법한 깊이에 존재하는 광산. 그 안에서 드워프들이 살아간다.

광산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도시급으로 크기가 크고 환하고 활기가 넘치는 것은 마치 지하의 도시같았다.

"오."

주변에 온통 드워프 투성이였다.

다른 종족들도 섞여있지만 주류가 되는 것은 드워프들이다.

망치질하고 담금질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흥겹게 웃고 있었지만

140cm정도 되는 신장에 근육질의 몸이라 뭔가 언밸런스하다.

길에 즐비해있는 대장간과 아이템들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바로 로하르를 찾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기는 아깝다.

상점들을 돌아다니면서 아이템을 둘러보자, 비싼 것들은 바로 티가 난다.

확실히 보기만 해도 좋아 보이네.

기억에 존재하는 네임드 아이템도 한두 개도 있다.

그렇게 주변의 아이템들을 둘러보던 도중, 라이라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혀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순백색으로 빛나는 작은 귀걸이가 보였다.

작은 보석이 귀걸이 끄트머리에 달려있고 문양이 세밀하게 박혀있다.

패션 감각이 전무한 내가 봐도 예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관심 있어?"

"아뇨. 그냥 둘러본 거에요."

라이라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자, 무뚝뚝하게 답했다.

"진짜로?"

라이라에게 되묻자 그녀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계산할 게요."

드워프에게 2골드를 건네고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이게 2골드라고? 엄청 비싸네.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품이다.

라이라에게 처음으로 사주는 선물이 될테니까.

나는 라이라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언제나 머릿결이 좋네.

그녀의 왼쪽 귀부터 귀걸이를 달았다.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모습이 조금 신기하다.

귀걸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양쪽 모두 귀걸이를 달아주자 안그래도 예쁜 얼굴이 더 돋보였다.

"이쁜데."

"...칭찬해줘도 소용없어요."

"그냥 예뻐서 그래."

정말로 예쁜데. 다른 말이 떠오르진 않는다.

무뚝뚝하게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녀의 귀가 조금 붉다.

만족했나보네.

근데 여기가 확실히 악세서리를 잘 만든다.

다른 가게에 비해서 물건이 퀄리티도 높고 화려하다.

이왕이면 여기서 다른 사람들한테 줄 물건도 사갈까.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물건을 더 구입하니 아줌마 드워프가 행복하게 웃었다.

"귀걸이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럭저럭요."

라이라의 기분도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로하르를 찾아가기 위해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라이라가 내 손에 들려있는 물건들을 가리켰다.

"그건 왜 샀어요?"

"다른 사람들 주려고."

"...다른 사람이요?"

"어. 예쁜 것 같아서 선물하려고."

"당신. 이성에게 인기가 많나요?"

"인기? 글쎄?"

많다고 해야 하나? 먼저 다가온 여자는 에리엘 뿐이다.

그것도 왠지 원나잇스러운 미묘한 관계인 채고.

다른 영웅인 마리아는 그런 관계는 아니고 에우제니아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노아 한명 뿐인데. 여자 한명이면 인기가 많은 건가?

모르겠다. 이런 쪽으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현대에서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어야 알지.

"많진 않은 것 같은데. 그냥 주변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 그런가요,"

라이라가 짧게 대답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왠지 그녀의 기분이 나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분 탓이겠지?

우리는 로하르의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대장간이 몰집되어있는 구역으로 가자 공기가 습하고 더워졌다.

철을 녹이는 커다란 용광로가 있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갖가지 무기들을 전시해놓은 대장간들을 지나쳤다.

인파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서, 더욱 한적한 곳을 지나자 이제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대장간도 별로 없고, 실력이 좋은 대장간은 커다란 용광로 근처에서 밀집해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올 일이 없다.

그 중에서도 허름한 단검 3자루를 놔두고 가게를 열어놓은 대장간이 보인다.

­로하르 대장간

간단한 이름이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저 곳이 로하르가 운영하는 대장간이다.

"여기가 맞아요?"

"맞아 확실해."

다른 건 몰라도 내구도가 개박살이 난 것처럼 보이는 단검 3자루가 증거다.

"실례합니다. 의뢰를 하고 싶은데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건 드워프 한 명. 바닥에 누워있다.

주변에 맥주병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방금 전까지 맥주를 마시다가 잠든 것으로 보였다.

"로하르. 의뢰를 하고 싶은데요."

"으..응? 으...레..?"

자고 있는 로하르를 깨워서 말을 걸자 비몽사몽으로 대답을 했다.

"예. 의뢰요."

"으레...의뢰...? 안 받아."

"정제된 1급 마석 큐브를 제조하고 싶습니다."

1급 마석 큐브.

마석은 기본적으로 파란색이다. 이게 3급 마석이고, 농축시키고 정체하면 색이 진해진다.

색이 보라색으로 변하면 2급.

색이 자주색으로 변하면 1급이 된다.

'1급 마석 큐브는 명장이 아니면 불가능 해.'

로하르르 찾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1급 마석 큐브..?"

"예."

얘기를 들은 로하르의 눈이 또렷해졌다.

"그걸 원한다고? 어디 마을 하나를 날려버릴 계획이라도 세우는 건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만들 수 없겠는데."

1급 마석 큐브의 아이템 등급은 전설이다.

그만큼의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기에 만들기를 꺼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오드웰 연합군의 북부 사령관 에우제니아의 명령 허가서입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흐음... 그래 이러면 되긴 하지."

로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다시 건네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태야. 맥주를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야 물건이 나오는데. 요새는 맥주를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진 않더군."

일종의 슬럼프가 왔다는 얘기다.

그가 게으름뱅이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하는 퀄리티의 물건을 만들지를 못하니 흥미를 잃고나중에는 포기했다.

로하르는 그렇게 게으름뱅이가 되는 걸 선택했지만 내가 온 이상 다르다.

"그렇다면 이걸 마셔보는 건 어떻습니까?"

라이라가 아공간에서 민트 맥주를 꺼냈다.

맥주통을 열자 로하르가 눈을 반짝였다.

"오... 이게 뭔가? 이건 처음 보는 맥주인데."

"예. 특별한 맥주입니다."

로하르가 맥주를 마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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