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5화
* * *
"이 미친 새끼야. 돈을 쓰라고 했지 재정을 거덜 내라고는 안했어!"
에우제니아가 소리를 내질렀다.
귀청 떨어지겠다.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성급하기도 하지.
"북부에 그 정도 돈은 있지 않습니까."
그녀가 화를 내는 건 사실상 엄살이나 다름없다.
북부의 재정 상황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렇게 무리한 부탁도 아니었다.
딱 북부 전선을 한 달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이니까.
"있긴 하지 미친놈아! 북부 한 달 재정하고 맞먹는 돈인데! 너라면 어 써도 된다. 하고 줄 수 있겠어? 응?"
"재정을 좀 아끼면 되지 않습니까?"
"말이 쉽지 망할 새끼야!"
말 뿐만이 아니라 어렵지 않다.
잘못하면 전선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지만 해 볼만 한 시도다.
"어차피 한 달 내로 성과를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실패하면 에우제니아님은 사령관 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될 터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다른 이가 알아서 책임을 지게 될 텐데요."
"대놓고 전선을 버리라는 거잖아 미친놈아!"
"하지만 작전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긴 합니다.
특히 한 달이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더더욱 필요합니다."
한 달이라는 조건은 내가 말한 내용이지만 어쩔 수 없다.
칼레보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면 무리를 해야하니까.
그 무리를 감당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조건..."
조건이라는 단어에 그녀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책상에 턱을 괸 채로 신음했다.
"한 달 치의 재정을 쓴다고 해서 큰 구멍이 나는 건 아니죠.
나머지 자원을 조금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면 전선 유지는 충분합니다."
"으음..."
에우제니아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거기에 제 작전을 거부하시면 좋지 않을 겁니다."
"뭐? 협박이라도 하는 거냐?"
"아뇨 협박이 아닙니다."
협박처럼 들리겠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말이다.
그녀와 나는 한 배를 탄 입장이니 괜히 작전을 거부해봐야 이득이 될 게 없다.
나는 내 생각을 하나하나 말했다.
"저는 남부를 최소한의 피해로 점령하고 성과를 냈죠.
이 정도면 저의 능력은 증명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 그건 확실히 그렇지."
"그런데 왜 자금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하십니까?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내 능력을 의심한다면 애초에 나를 회의실에 데려가지 말았어야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의심을 받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런데 반대로 제가 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하는 이유가 뭡니까?"
"...능력이 있어서?"
"예 맞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사령관님의 실력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나는 대놓고 팩트를 꽂았다.
그녀가 나에게 작전을 맡기는 이유는 간단하게 못하니까. 작전 수립 능력이 딸려서 그렇다.
여기에서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계속 쳇바퀴만 돌게 뻔하다.
나는 작전을 진행하고 싶어 하고 에우제니아는 막대한 돈을 쓰는 걸 꺼려한다.
이대로 가면 결국엔 그녀의 계급에 굴복해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콰직
책상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턱을 괴고 있는 에우제니아의 아래로 책상 일부분이 부서져 있다.
단단히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말을 멈춰야하나. 계속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이 없었다.
"계속 말해 봐."
에우제니아가 나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빨리 말해. 뒤지기 싫으면."
말을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면 하는 게 낫겠지.
애초에 에우제니아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작전은 무리에 가까웠다.
"크흠... 제가 하는 일은 사령관님이 해야 할 일의 대신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계속해."
"그런데 사령관님은 작전을 수립할 능력이 없으면서 제가 하는 일을 막고 있다는 겁니다."
"..."
"제가 사령관님을 대신해서 작전을 수립하는 데 지원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지원을 안 해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한 달의 기한은 맞추지 못할 겁니다."
"안다이얄 고지를 점령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달의 기한?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안다이얄 고지까지 가는 것도 시간이 걸리고 전투도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 달안에 점령?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리스크조차 짊어지지 않고 한 달 만에 점령을 하라는 거야?
안다이얄은 가장 높은 고지대에 움직임도 전부 보이고 전력이 약한 것도 아니다.
공격을 하더라도 대놓고 수비를 하면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는 고지다.
"제가 안다이얄 고지로 가면 1년도 버틸 수 있습니다. 보급 받고 수비만 하면 굉장히 유리한 지역인데 저걸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점령을 합니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없지 않습니까."
내 얘기에 한참을 고민하던 에우제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50만 골드가 있다면 가능은 하다?"
"예."
없으면 시도조차도 못해보는 데 어떻게 해.
50만 골드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원한다고 땅에서 솟아나진 않는다.
"그래 승인하지. 한 번 믿은 이상 끝까지 믿는 게 좋으니까 말이야."
50만 골드를 얻지 못한다면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하는 소요가 발생한다.
50만 골드를 만드는 건 가능 하지만 시간이 따로 소모된다는 게 너무 크다.
한 달이라는 시간제한이 가장 문제다. 하지만 그녀가 다행히 승인을 해줬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자, 에우제니아가 말을 이었다.
"실패하기만 해봐. 오늘 나한테 대든 것까지 쳐서 살기 싫게 만들어줄 테니까."
"..."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단도직입적으로 쫄았다.
진짜 작전 실패하면 좆되겠네.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앉았다.
하지만 실패할 일은 없다. 내가 진행하는 작전이니까.
"무조건 성공합니다. 실패란 없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내보였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실패하지 않도록 일을 진행할 거다.
여기는 대충해서는 클리어할 수 없는 세계니까.
"그래 성공해야지. 뒤지기 싫으면 말이야."
에우제니아의 얘기에 조용히 웃었다.
죽기 싫다. 죽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 턱이 없지.
이야기가 끝나고 찾아온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와 더 할 이야기도 없고, 할 일도 없다. 여기에 계속 있어봐야 시간낭비겠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문손잡이를 잡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번 작전 성공하면 무조건 대위다."
"..예?"
"남부에서 한 것만으로도 대위는 가능할 텐데. 이 일을 해결해버리면 2계급 특진을 할 수도 있지."
2계급 특진?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지만 계급이라는 건 나에게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일정 부분까지 올라가지 못한다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건 어려우니까.
하지만 승진할 기회를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실패하지 마라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빨랑 꺼져."
그녀의 독설을 뒤로 한 채로 바깥으로 나왔다.
'어우 좆될 뻔 했네.'
설득한다고 말을 세게 했다가 척추를 반으로 접힐 뻔 했다.
다음에는 이런 모험은 하지 않도록 해야지.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다.
한숨을 내쉬면서 문을 닫았다.
벽에 기댄 채로 기다리고 있던 라이라가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다가 졸려 죽는 줄 알았네요.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해요?"
수다를 한참동안 떨고 나온 사람을 보듯이 쳐다본다.
그렇게까지 오래 얘기는 안했던 것 같은데.
"거기에 따로 가야할 곳도 있다면서요"
"그건 얼마 안 걸리니까 괜찮아."
어차피 내가 할 일도 아니고 그냥 일을 맡길 뿐이니까.
나는 라이라의 엉덩이를 만졌다. 부드럽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다려서 쓸쓸했어?"
"당신. 미쳤나요? 쓸쓸하기는 무슨,"
이렇게 대답하지만 사실은 정말 쓸쓸함을 느꼈을 지도 모르는 법이다.
라이라의 말은 침대 위가 아니면 대부분 솔직하지 못하니까.
"일단은 바깥..."
으로 나갈까. 라고 말하려 했지만 끝까지 잇지 못했다.
또각. 또각.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상대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이엘프 칼레보른.
그가 이쪽을 주시하면서 걸어왔다.
'어우.'
욕심이 가득한 하이엘프 녀석.
게임에서 싫어하는 영웅의 순위에 있는 녀석이다. 여기라도 따로 달라지는 건 없다.
가까이 다가온 칼레보른이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강한윤 중위. 일은 잘 되고 있나 모르겠군."
"... 잘 되고 있습니다."
마치 이쪽을 떠보는 것처럼 말했다.
한 달 안에 가능 하겠어? 한 번 해보던가. 라는 식의 말투처럼 느껴졌다.
"힘들다면 포기해도 좋아. 그렇다면 강한윤 중위만 특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처리해줄 수 있으니까."
포기하면 사령관 자리를 칼레보른이 독차지할 셈이겠지.
대놓고 나보고 에우제니아를 배신하라고 종용했다.
칼레보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자 배알이 뒤틀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작전을 포기하라고?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북부에 관여할 기회를 얻었는데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특히 칼레보른에게 주도권을 넘기면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주도권을 넘긴다고 이쪽을 살려둘까?
에우제니아 밑에서 작전을 진행했던 나를? 그럴 리가 없지.
북부를 장악하고 나면 서부와 중부, 남부까지 야욕을 드러낼만한 영웅이다.
능력도 있고 팀에게 칼도 겨누기도 하는 그런 좆같은 영웅이 칼레보른이다.
나의 대답을 들은 칼레보른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조금 아쉽게 됐군. 친해질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강한윤 중위가 안다이얄 거점을 되찾았으면 좋겠네.
그렇다면 서로에게 윈윈일 테니까."
하는 말은 곱지만 칼레보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지 예상이 됐다.
본성이 썩어있는 녀석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예. 일이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간단하게 답을 했다.
칼레보른이 지나가고 나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안 그래도 거짓과 속내를 꿰뚫어보는 스킬 '통찰'을 지닌 칼레보른이다.
그저 말만 몇번 섞어도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건 당연하다.
거기에 칼레보른은 암살자를 보낸 영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 사실상 가장 유력하다.
수인, 오크, 드워프. 어느 종족이라도 에우제니아에겐 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의심이 가는 건 칼레보른이었다.
에우제니아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어우. 왜 저런 새끼가 엘프를 대표하는 하이엘프인 거지?'
사령부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상쾌해졌다.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던 도중, 한적한 길에서 라이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저 엘프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나요?"
너무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칼레보른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아무 것도 안했는데?
무슨 짓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거기에 칼레보른은 나보다 한참 높은 계급의 사람이라 수작을 부리기도 힘들다.
"아니? 아무 짓도 안했는데."
"그래요? 아닌 것 같던데요."
"대체 뭐가 아닌데?"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지 모르겠다.
"당신을 본 순간부터 심장 박동이 빨라지더라고요. 그 엘프."
"심장박동이 빨라졌다고?"
"표정은 숨겨도 심장박동은 못 숨기죠."
아니 대체 심장박동 소리는 어떻게 들은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칼레보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럴 이유가 있나?
"얼마나 빨리 뛰었는데?"
"글쎄요... 놀란 사람 정도로?"
나를 보고 놀랐다고?
놀라는 건 대부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닥쳤을 때다.
나와 얼굴을 마주해서 놀랐다? 대체 왜?
얼굴이 못생겼나? 그건 아닌데.
그렇다면 나랑 만났다는 게 놀랄 만한 이유인가?
만났다...? 그럼 만난 게 놀랍다?
만나지 못했어야 했다. 왜?
'...암살자'
암살당했어야 할 내가 살아있다. 그래서 놀랐다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라이라가 선수를 쳤다.
"그 엘프에게 감시를 붙일게요."
"감시뿐만이 아니라 뒷조사도 해줘."
역시 게임에서 비호감인 영웅은 여기서도 똑같이 비호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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