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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32화 (32/163)

〈 32화 〉 32화

* * *

"아니 책임을 묻는다면 에우제니아 사령관. 당신에게 묻는 게 낫겠군."

"뭐?"

"강한윤 중위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칼레보른은 대놓고 에우제니아를 견제했다.

그는 사령관 자리를 탐낼테니까 에우제니아를 몰아붙이려고 하겠지.

"..."

에우제니아가 눈에 띌 정도로 고민했다.

무슨 고민을 하는 지는 뻔하다.

내가 칼레보른에 대항할 만큼 좋은 패인가? 에 대해서 저울질하는 게 확실하다.

좀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이쪽의 입장에서는 높은 직급의 두명이 얘기하는 데 끼긴 그렇다.

에우제니아가 믿어준다면 확실하게 푸쉬할 자신이 있다.

그녀는 오크니까. 힘만 쎈 무식한 종족이지만, 믿어주는 만큼 확실하게 보답할 줄 아는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에우제니아는 리턴을 잘 주는 영웅에 속한다.

제발 믿어! 캐리해줄 테니까! 에우제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이 사라졌다.

"그래. 내가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다."

실제로 호감도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에게 배팅을 했다.

한 배를 타자. 믿을 테니 무언가를 보여줘라. 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이것밖에 없지. 그녀가 이렇게 말해준 덕에 합법적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북부의 작전을 참여할 기회. 이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의도하고 인트라넷에 글을 올린 건 아니었지만 일이 잘 풀렸다.

"그래? 그 정도로 신뢰하는 건가?"

"내가 호출한 장교다. 당연히 그 정도의 신뢰가 없다면 의미가 없겠지."

칼레보른이 의외라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뭘 봐 이 새끼야. 안 그래도 게임에서 싫어했던 영웅 중 한명인데, 실제로 보니 더 꼴 보기 싫다.

음흉하게 생겼는데 잘생겨서 화난다.

곰곰이 생각하던 칼레보른이 조건을 제시했다.

"그럼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쪽의 떡밥을 물어왔다.

안다이얄을 점령하는 건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예. 가능합니다."

에우제니아가 내 생각을 알 턱이 없으니 대신 답했다.

"정말로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증명할 수 있겠나?"

증명. 이 단어에 힘이 실렸다.

한마디로 안다이얄을 공략해봐라. 못하는 건가? 라고 묻고 있다.

"예.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칼레보른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렇다면 3달 안에 증명할 수 있겠나?"

"..."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간을 제시한다는 건.

자신이라면 3달 안에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할 수 있다고 넌지시 떠보는 거다.

3달. 점령하는 데 3달?

"아뇨.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한 달이라고?"

칼레보른이 비웃음을 섞인 대답을 했다.

"안다이얄 거점이 어디있는 지 모르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북서부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걸어간다면 하루가 걸리는 위치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도 한 달이라고 말하는 건가?"

"예. 저는 가능합니다."

너는 안되지? 라는 뉘앙스를 담아 대답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으로 안다이얄을 점령하는 건 쉽지 않다.

당연히 그 사실을 칼레보른도 알고 있을 테니까 도발했다.

한 달 만에 안다이얄을 점령?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칼레보른이 직접 뛰겠지.

"한 달안에 안다이얄을 점령하는 성과를 보여줄 수 있나? 에우제니아 사령관?"

칼레보른이 느긋하게 질문했다.

누가 보더라도 에우제니아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여기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에우제니아의 체면이 구겨진다.

거기에 그녀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까지 따라온다.

이쪽이 받아들여서 실패한다면 에우제니아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책임을 회피하는 거니 에우제니아의 입지가 줄어든다.

그녀에게는 더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

그녀가 결국에 입을 열었다.

"그래. 성과는 얼마든지 보여주도록 하지. 하지만 칼레보른. 그렇게까지 얘기를 한다는 건 그쪽도 책임을 져야지."

에우제니아가 전략에 문외한인 바보지만 사령관은 사령관이다.

대놓고 이를 드러내는 칼레보른을 내버려 두기는 싫겠지.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잘한다.

속으로 에우제니아를 열렬히 응원했다.

"흐음.. 그건 맞는 말이야. 한 달 내로 성과를 보인다면 제가 괜한 의심을 한 꼴이 되니까."

칼레보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내가 틀렸다면 사죄의 물품으로 세계수님의 축복을 주도록 하지."

"세계수의 축복을?"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축복이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서 칼레보른을 쳐다보았다.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는 단순하다.

영웅의 재능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재능을 추가해준다.

수속성 친화력이 높은 마리아, 마로스 남매가 축복을 받는다면 완전히 미친 영웅이 된다.

친화력이 최고치에 도달해서 수속성 계열의 마법에 데미지를 받지 않게 된다.

물론, 그 정도로 성능이 좋은 영구 버프를 얻기 쉬울 리 없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세계수의 인정을 받아야 할 정도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

간단하지만 어려운 과제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축복을 2번 받으면 많이 받은 거니까.

그런데 칼레보른이 마음대로 축복을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하이엘프가 되고 나서 얻은 세계수의 축복을 아직도 사용하지 않은 건가?

진실이면 축복을 얻을 수 있으니 좋다. 거짓이면? 칼레보른을 죽여야지.

어느 쪽이든 좋다. 아니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칼레보른은 살려두기보다는 죽이는 쪽이 나으니까.

"그래. 그 정도면 가능하지."

에우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입장에서도 세계수의 축복은 탐나는 버프겠지.

칼레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앞으로 한 달 안에 성과를 볼 수 있도록 기대하겠네."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지만 속내는 뻔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이쪽을 명백하게 비웃고 있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제외하고 내일부터 한 달로 해주지. 하루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으니 말이야."

그가 당연한 일을 선심 쓰듯이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는 끝인가?"

"끝이지. 다른 이들도 별 달리 할 말은 없어 보이니 말야."

수인들은 우리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 관람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붙어야 콩고물이 떨어질까 보고 있는게 아닐까.

그 와중에 드워프는 여전히 맥주를 마셨다.

회의고 뭐고 맥주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한 달이라 그러면 기대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칼레보른이 바깥으로 나갔다.

나머지 다른 종족들도 나가고 회의실에는 에우제니아와 나. 단 둘만이 남았다.

"강한윤 중위. 가능 해?"

"안다이얄 거점 점령 말입니까?"

"어. 너가 가능하다는 듯이 쳐다보길래 대답했는데?"

의외로 이쪽의 생각을 완벽하게 뚫어봤네.

에우제니아에게 잘했다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당연히 됩니다. 하지만 준비가 조금 많이 필요합니다."

"진짜로 된다고? 어떻게?"

고인물인 내가 방법도 모른 채로 자신감을 가졌을까.

"다 방법이 있습니다."

안다이얄 거점 점령은 어렵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

에우제니아에게 방법은 있으니까 최대한 걱정말라고 얘기했다.

가능하긴 하지만 그 대신 그녀의 완벽한 지원이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까지 덧붙였다.

그녀가 없인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그녀가 할 만한 일은 없으니까.

솔직히 설명을 안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이미 한 배를 탄 상황이다.

안다이얄 점령에 실패하면 그녀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고 나는 징계를 받는다. 혹은 그녀에게 또 다른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른다.

소드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있는 에우제니아가 화를 내면 아무튼 끔찍한 일이 일어나겠지.

결국엔 작전을 성공하냐 못하냐가 제일 중요할 뿐이다.

사령부 바깥으로 나오자 날이 쌀쌀하다. 산맥이라 그런지 바람도 세다.

추위에 벗어나기 위해 옷깃을 여몄다.

마을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길가에 있는 사람들을 훝었다.

라이라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주점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몸부터 녹이도록 하자.

­달밤 아래의 춤­

판자에 대충 적은 싸구려 간판을 지나자 불빛이 밝았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시끄러운 인파들을 훑고 지나가면서 라이라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술에 취한 이들을 지나서 2층으로 올라가니 구석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라이라가 보였다.

".. 찾아가려 했는데 선수 치셨네요."

거짓말 하지 마. 여기서 나갈 생각 없잖아. 잔에 술이 남아있는 데.

뭐라 하려 했지만 피곤해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라이라가 담배를 비벼서 끈 뒤에 술잔을 들었다.

"당신도 한 잔 할래요?"

"아니."

술을 못 마셔서 거절했다. 옛날엔 이 정도까지 못 마시진 않았는데.

주량을 알고 나니 안 그래도 싫은 술이 더 싫어졌다.

"그럼 혼자 마실게요."

라이라의 손에 들린 술잔이 찰랑인다.

그 뒤로 보이는 가슴골은 풍만하다.

이쪽의 시선을 느낀 라이라가 눈을 살짝 찌푸린 뒤에 술을 마셨다.

옆이 트여있는 드레스로 새하얀 다리가 보였다. 쭉 뻗은 다리는 요염하다.

간단하게 술을 마실 뿐이지만, 야하다.

사내를 유혹하려는 움직임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꼴리네.

라이라의 옆자리로 이동해서 허리에 손을 감았다.

매끈한 드레스의 촉감과 라이라의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라이라 특유의 체향이 느껴졌다.

"...당신 참 뻔뻔하네요."

"뭐가?"

"그런 점이요."

라이라는 퉁명스럽게 내뱉은 뒤, 다시 술을 마신다.

뭐가 뻔뻔하다는 건지.

슬며시 라이라의 가슴을 만졌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드레스 위로도 젖꼭지의 위치를 찾았다.

간질이듯이 만지자 유두가 점점 단단해졌다.

라이라의 반응을 살폈지만 얼굴만 조금 붉어졌을 뿐이다.

"이제는 거부도 안하네?"

"..해봐야 뭐해요. 어차피 할 텐데. 그럴 바엔 즐기는 게 낫겠죠."

그녀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괴롭힌 줄 알겠네. 나는 그녀를 괴롭힌 적 없다.

"싫지 않잖아."

"그래서 더 싫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술잔을 다 비운 그녀가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참 좋아한단 말이지.

마나의 효율을 높여주는 약재만 넣은 담배라서 달달한 향이 나지만, 그래도 담배는 담배다.

"흐응.."

담배를 다 피운 그녀에게 살며시 키스를 시도했다.

코가 닿을 거리까지 천천히 다가가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서 키스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이다.

즐기겠다고 한 게 이런 건가 보다.

쪽. 쪽.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혀를 섞으면서 야한 키스는 여관에 들어가서 해야지.

입술을 비비듯이 키스하자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담배의 향이 나지만 그렇게 싫은 기분은 아니다.

"하아..."

키스를 끝내자 라이라의 눈빛이 몽롱하다.

그렇게 키스가 좋은 걸까. 라이라는 키스를 유독 좋아하는 듯하다.

"그럼 갈까?"

"읏..."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이라의 엉덩이를 움켜쥐자, 움찔하면서 몸을 기대어온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팬티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축축하다.

손가락에 애액이 묻은 것을 보여주며 라이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한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요."

입으로는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몸은 솔직한 라이라와 여관으로 향했다.

***

라이라는 사실 섹스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아닌 척 도도한 척 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로 섹스를 즐기는 것 같다.

마지막에는 애인처럼 알콩달콩 섹스 했으니 합리적 의심이 든다.

"...물좀 줘요."

침대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라이라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물잔을 건넸다.

"당신 이럴 땐 상냥하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항상 상냥한데.

"모르면 됐어요."

라이라가 물을 마시고 입을 다물었다.

자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네?

라이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러고 있으니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라이라. 오늘 할 일 있어?"

"없어요."

"잘 됐다.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안다이얄 산맥 점령과 관련된 일이다.

단 둘이 데이트로 어디 놀러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건 나중에 하자.

시간이 촉박한 건 아니지만, 미리 움직여서 여유를 만드는 게 좋다.

"아침은 먹고 갈 거죠?"

"방으로 음식 주문하고 한 번 더 할까?"

"하아..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라이라였지만. 손길은 거부하지 않았다.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마을에 있는 잡화점으로 향해서 연금술과 관련된 아이템을 집었다.

대충 모양만 봐도 어떤 아이템인지 알고 있으니 쇼핑은 빨리 끝났다.

"당신 알고 사는 건 맞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이라가 의문을 표했다.

아이템의 효과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라이라니까. 의문을 표하겠지.

전부 독성이 존재하는 아이템들이다.

어차피 내가 쓸 아이템은 아니고 이따가 사용할 아이템이다.

남는 건 뭐.. 독극물 제조에 사용이라도 해야 할까.

"알고 사는 거야."

"뭐. 알아서 해요."

그렇게 말한 라이라가 바깥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는 거겠지. 계산을 끝마친 뒤에 나가자 그녀가 서있다.

이번에도 구름과자 섭취중이었다.

"많네요."

"사다보니까 많아지더라고."

"이리 줘 봐요."

아이템을 건네자 허공속으로 아이템이 사라졌다.

"...아공간?"

"이렇게 하면 간편하잖아요. 어차피 떨어져 있을 것도 아니고."

아공간 아티팩트를 이런 데에 사용하네.

중위의 월급으로는 절대 못사는 아이템인데.

그녀의 재력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가게에서 나온 우리는 서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일을 진행하려면 여기에 있는 녀석을 만나야 하니까.

숲을 지나서 걸어가고 있으니 검은 늑대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크르릉

하지만 라이라가 손을 뻗자 늑대들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미묘하게 쓴 향이 나고 있었다.

"냄새 맡지마요. 잠들기 싫으면."

아. 그런 거구나.

수면향으로 잠재운 늑대들을 지나쳐서 쭉 걷자 작은 오두막이 하나 드러났다.

­잡상인 사절

오두막 입구 쪽에 적혀있는 짤막한 문구를 보던 라이라가 물었다.

"여기가 맞아요?"

"응. 여기가 맞아."

연금술사 달리스가 있는 오두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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