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화
* * *
섹시하다. 에우제니아를 본 평가는 간단했다.
인간과 크게 다를 바도 없고 몸매도 좋다.
연두색 머리칼과 피부가 잘 어울려서 매력적으로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인사를 하자마자 살기를 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야 뒤지고 싶냐?"
"...아닙니다."
바닥에 눈을 깔면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선 대꾸를 하고 싶지만, 에우제니아한테 대들면 척추를 반으로 접힐 가능성이 있다.
소드마스터 상급의 무력을 지닌 에우제니아에게 대든다? 미쳤지. 진짜로 죽는다.
거기에 에우제니아의 계급도 압박감이 심하다.
소장. 별 두개인 계급장을 보고도 쫄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나약한 인간이 나에게 이딴 소리를 하다니."
그녀가 화가 난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본인을 욕하는 것보다는 내가 약한 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겠지.
오크족은 힘을 숭상하고 경배하는 종족이다.
약해빠진 나를 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야. 너가 이 글 쓴 거 맞아?"
에우제니아가 책상 위로 종이뭉치를 툭 던졌다.
책상위로 떨어진 종이의 맨 윗장에 문장이 적혀있다.
제목 : 솔직히 에우제니아 이 년보단 내가 더 잘할 듯 ㅋㅋ
...이렇게 보니까 좀 쪽팔리네. 제목이라도 정상적으로 적을 걸 그랬나.
이런 걸로 수치심을 느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예. 맞습니다."
세계수에서 저걸 적은 게 언제인데. 이제야 후폭풍이 오다니.
속이 쓰리다. 괜히 키보드 질 하지 말 걸.
예전의 버릇대로 글을 써서 괜히 피를 보게 생겼다.
"맞다고?'
"예. 맞습니다."
"그럼 증명해봐."
"...예?"
"예는 뭔 예야. 니가 적었으니까 내용을 알 거 아냐. 증명을 해보라고."
증명이라. 에우제니아의 얘기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의 말투로 보아하니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저 글의 출처가 내가 맞는 지 확인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녀가 뭘 원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세계수 인트라넷에서 적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병력 소모전 보다는 게릴라 전을 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카브란 산맥에서는 대군을 운용하기 어렵다.
소규모 전투에서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정예분대와 소대를 꾸려서 타격을 줘야 한다.
적들도 마찬 가지로 정예 병사만 운용하는 입장에서 병력 소모전은 의미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소모전이 필요한 고지도 몇 개 있지만, 카브란 산맥의 주변은 아니다.
"항상 오드웰 연합군의 장점을 떠올리고 단점을 생각하라고도 했었죠."
연합군의 장점은 많은 자원이고 부족한 것은 인적 자원이다.
많은 자원으로 소모전을 하는 건 좋지만, 영웅들로 소모전을 펼치면 안 된다.
그냥 꼴아 박기 좋아하는 에우제니아가 갉아먹고 돌려 깎는 법을 안다? 그럴 리가 없지.
당연히 모든 병력들을 꼴아 박으면서 진행할거라 생각해서 이 글을 적었다.
턱을 괴고 있던 에우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너가 쓴 게 맞나보네. 정확하게 알고 있어."
당연하지. 게임에서 그녀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에우제니아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녀의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것은 이미 다 꿰고 있다.
전략 전술 개트롤의 분야에 있는 그녀를 막는 것부터 게임의 시작이다.
"야."
"..예."
에우제니아의 말에 대답이 빠르게 나왔다.
대답을 제때 안 하면 빈약한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한테 딱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두 가지 방법...?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
"첫 번째. 군법으로 처리한다. 이러면 상관모욕죄가 되겠지. 가벼운 내용은 아니니까. 경징계는 아닐 거야."
하아. 망할.
세계수 인트라넷이 익명이 아닐 줄 알았으면 절대로 글을 안 썼지.
아니 최소한 제목은 바꿨을 거다.
에우제니아가 봐주길 바라면서 제목 어그로를 끈 거니까.
북부가 먹히는 것보다는 에우제니아에게 일침을 하는 쪽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쓴 글이 모욕인가? 올바른 길로 인도한 건데? 아니. 제목이 모욕이구나.
책상위에 보이는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 억울함이 사라졌다.
"최소한 강등 최대 보직해임이 되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아. 싸가지는 없어도 실력은 있어 보이니까 말이야."
에우제니아가 글이 적힌 종이를 집어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거절할 시에 군법으로 처벌할 거란 사실은 당연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 상황이라면 알겠지.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
에우제니아는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이후에 회의가 있으니, 같이 움직이자는 것.
그것 외에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지만 나는 이미 일정을 알고 있다.
오늘은 목요일. 그렇다면 이후에 있을 일은 뻔하지.
정기 작전 회의.
목요일 마다 북부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수인 중에서는 천족, 묘족, 호족이 나올 테고 엘프, 드워프, 오크까지 모인다.
그런데 나를 왜 데려가는 거지? 마음 같아선 뭐 때문이냐고 묻고 싶지만. 이 분위기에서 묻긴 어렵다.
이제야 막 남부에서 올라온 애송이가 북부의 작전 회의에 대해서 물어본다?
거기에 징계를 받느냐 안 받느냐 결정하는 자리에서? 단단히 미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
가만히 있기는 심심하니까 주변에 있는 서류를 아무거나 집었다.
에우제니아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문제 삼진 않으리라.
서류를 펼치자 북부의 상황이 나열되어 있는 지도가 나왔다.
'북부는... 전선이 무너진 건 아닌데. 안다이얄 거점은 왜 뺏긴 거냐고.'
지도를 보면서 탄식했다. 가장 수비하기 좋은 지역인데 여기를 왜 뺏긴 거야?
시야확보도 좋고, 매복, 기습, 고지전 뭐 어느 것 하나 공격이 유리한 쪽이 없는 산맥인데.
많은 산맥 중에서도 하필 여기를 뺏기다니. 최악은 아니지만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이 상황을 뒤집는 방법은 지휘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에우제니아의 호감도를 올려야 하지만...
"뭘 봐."
잠깐 눈이 마주쳤다고 이렇게 반응하는 에주제니아다.
호감도가 어느 정도일지 예상이 간다.
"...아닙니다."
시선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서두르지 말자. 기회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나쁘냐고 하면 나쁜 건 아니었다.
북부와의 연결고리가 에우제니아로 인해서 생겼으니까.
북부에 간섭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남부는 이제 휴식을 할 필요가 있다.
내정 작업에 몰두를 하는 남부를 제외한 다른 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다면 좋은 상황이다.
"야. 가자."
회의에 참여할 시간이 되자 그녀가 거칠게 한마디 내뱉었다.
북부 회의에 참석하게 된 건 좋은데.
여기에서 발언권을 얻거나 뭔가를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 있을 게 분명해.
그녀는 나를 어딘가에 써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나는 에우제니아를 따라서 회의실로 이동했다.
***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에우제니아가 먼저 들어갔다.
뒤 따라 들어가자 아는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게임에서도 좋아했던 영웅도 있고 싫어했던 영웅도 있다.
왼쪽부터 수인족, 엘프, 드워프 순으로 앉아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앉아있는 호족 바란.
하얀 천사 날개를 달고 있는 천족 베아트리스.
팔짱을 끼고 있는 묘족 적귀.
북부의 하이엘프 칼레보른.
맥주를 마시고 있는 블랙스미스 드워프 그림스위그.
게임에서 봤을 때도 개판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네.
하나 같이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고, 에우제니아는 가운데의 상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 뒤에 말을 이었다.
"이번 안건은 저번과 같이 안다이얄 거점 탈환에 관한 내용이야. 좋은 의견이 있다면 제시해주길 바란다."
오. 생각보다 깔끔하게 말하네. 성격대로 막 내지를 줄 알았건만. 나름대로 연습을 한 모양이다.
에우제니아의 말이 끝나고 처음으로 손을 들어 올린 이는 호족의 바란이었다.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한다면 호족의 지분은 어떻게 되지?"
아직 거점을 점령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지분 타령을 한다고?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안다이얄 산맥의 서쪽 터전을 주겠다고 협의가 끝났을 텐데."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호족들은 활동 반경이 넓어서 넓은 땅이 필요하다고!"
"망할. 서쪽 땅으로도 모자라다고 말하면 얼마나 줘야 만족을 하는 거야?"
"최소한 남쪽 땅은 떼 줘야겠지."
"거기는 천족에게 중요한 장소에요...! 줄 수 없어요!"
인간 세력과 싸우기는커녕 분열 5분 전인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로 전투를 한다고?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말싸움이 붙어서 서로의 말을 주장하는 와중 이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거기에 저 인간은 뭐지? 저 녀석이 여기에 참가할 가치가 있나?"
여기에 있는 영웅들은 최소 장성급 이상이다.
그 와중에 나는 중위에 불과한 직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
저 호족에게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나?
기껏 해봐야 소드마스터 최하급 수준의 영웅한테?
"내가 데려왔다. 불만이 있다면 나에게 얘기해."
"... 크흠."
에우제니아가 받아치니 호족의 대표 바란이 순식간에 꼬리를 내렸다.
그래. 넌 입이나 다물고 있으라고.
그때, 묘족의 적귀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시끄러운데. 나가있어도 되나?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하지."
그는 회의장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정말 자기할 말만 하고서 떠났다.
"우린 광산 터전만 안 뺏기면 뭐든 할 거야! 아. 인간.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 아닙니다."
내 옆자리의 드워프는 하루 종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벌써 4잔을 해치웠다.
시발. 어지럽다. 드워프는 말이라도 잘 듣는 다지만 저 호족하고 묘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가장 큰 문제는 쟤인데.'
북동부에서 활동하는 하이엘프 칼레보른.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녀석.
저 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정치질 만렙인 쟤가 무슨 얘기를 꺼내느냐가 가장 신경 쓰였다.
상황이 대략 정리되자 드디어 칼레보른이 손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하는 것도 중요하다만 그게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다."
"안다이얄 산맥은 점령할 수 있지."
"어떤 근거로 말이지?"
'역시.'
아픈 곳을 찔러온다.
그녀의 지휘 능력으로는 안다이얄 거점을 먹는 게 불가능하다.
거점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수비에 유리한 거점을 뺏는 건 불가능하지.
그런 생강을 하고 있자 에우제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저 인간이다."
"...?"
뭐라고요?
"호오. 저 인간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 건가?"
"그래. 안다이얄을 점령할 방법을 알고 있다."
아니 발언권을 얻고 싶긴 했는데 폭탄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이래서 나를 여기에 데려온 건가?
칼레보른을 상대하라고?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에우제니아의 상황이 곤란해진다.
반대로 여기서 움직인다면 무조건 에우제니아를 도와주는 쪽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도와주고 작전에 대해서 간섭할 기회가 생기겠지.
겸사겸사 호감도를 올릴 기회도 얻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네.
나는 결정을 내렸다.
"예. 안다이얄을 점령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지?"
"남부 소속의 강한윤 중위입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칼레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한윤 중위. 안다이얄 거점을 점령할 방법이 있다고?"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칼레보른이 가지고 있는 고유기술은 '통찰'이니까.
말의 참 거짓을 구별해내고 생각을 읽어내는 까다로운 능력이다.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예 확실합니다. 안다이얄은 난공불락의 거점은 아니니까요."
"호오. 그게 정말인가?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그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렸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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