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30화
* * *
길었다. 북부로 가는 길은 정말로 길고 지루했다.
하긴, 매일 비슷한 풍경만 보고 있는 데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검사를 해봐야 한다.
마차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옆으로 돌아보았다.
라이라는 뭘 하려나. 손바닥만한 작은 책을 읽는 중이다.
그래. 그녀도 지루하겠지. 그래도 라이라와 함께 타고 있어서 지루함을 달래는 게 가능했다.
그것도 한 사흘쯤 지났을 때부터는 무의미 했지만 말이다.
마차 안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는 애초에 몇 개 없다.
끝말잇기를 하거나, 작은 수첩에 생각나는 걸 필기하거나 혹은 라이라에게 명령으로 펠라를 해달라고 하거나.
아. 섹스는 불편해서 좀 그랬다. 한 번 시도해봤지만 좁고 덜컹거려서 집중을 방해했다.
가만히 있어도 마차의 덜컹거림으로 피스톤이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나머지 단점이 수십가지였다.
이런 이벤트도 결국은 한두 번의 이벤트 일뿐. 마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전부 떼우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은 마차 안이라는 공간에 질려서,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게 됐다.
첫날의 기억이 강렬하고 중간의 기억은 희미한 걸 보니, 한 사흘쯤은 멍때리지 않았을까.
"와. 망할."
드디어 북부의 산맥이 보인다.
기뻐서 자연스럽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걸 보기 위해 며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스킵 버튼이 없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태백산맥처럼 높게 솟아오른 산들이 웅장함을 자랑했다.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치가 좋겠지..... 근데 생각해보면 저걸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사령부가 위치한 카브란 산맥이 높은 산맥은 아니지만 걸어서 올라가야한다.
마차는 산맥까지 올라가진 않으니까. 산맥 중앙에 위치한 마을에 내려주는 것으로 안다.
"큭..."
잠깐 동안 산악행군의 PTSD가 떠올라서 머리를 부여잡았다.생각만 해도 좆같은 기억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고 골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감각... 회상은 마부의 목소리에 끊겼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한 뒤에 내린 뒤 고개를 들어서 산맥을 바라보았다.
마을이 있는 산 중턱까지는 마차로 왔다지만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카브란 산맥을 보니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제 100미터 전진을 하면 오늘은 100미터 후진을 하는 곳.
고지전이 매일인 이곳이 게임의 꽃이나 다름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전투와 전략. 많은 영웅들을 만날 수 있는 격전지였으니까.
특히, 영웅 성장이 느린 오드웰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최고다.
경험치를 쏠쏠하게 얻을 수 있으니, 영웅 한두 명에게 몰아줘서 캐리하는 각을 만들기도 가능하다.
나이트메어 난이도에서는 AI의 수준이 낮아지니, 캐리쇼를 보기가 힘들다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만큼 자원을 투자해야하는 단점이 있지만, 연합군은 자원은 빵빵하다.
경험치 획득 기회와 영웅이 모자랄 뿐이다.
한 번은 모든 경험치를 독식해서 캐리하려다가 실패를 했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감회에 젖은 채 산맥을 바라보고 있으니 라이라가 뒤 이어서 내렸다.
그리고 바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후우."
흰 담배연기가 산맥의 바람에 흩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왠지 데이트 하는 것 같지 않아?"
"당신. 정말... 개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요."
라이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북부까지 오는 길의 분위기는 분명 좋았던 것 같은 데. 아닌 건가? 아님 말고.
담배를 다 피운 라이라가 바닥에 담배를 떨어뜨린 뒤, 남은 불씨를 발로 비벼서 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뒤에 말을 걸었다.
"이제 사령부로 갈까?"
"... 미친 건가요?"
"왜? 시녀 복장이면 나를 따라와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령부까지는 최소 500m는 더 올라가야 한다. 혼자 올라가기 싫은 마음에 말해봤다.
라이라의 눈이 산맥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따라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혼자 가요. 저는 볼 일이 있거든요."
"볼일이 있다고?"
거짓말하지 마. 산맥에 올라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의심을 담은 눈초리를 계속 보내자, 라이라가 한숨을 쉰 뒤에 대답했다.
"북부 쪽의 정보길드에 관한 일이에요. 정보도 얻고 물건을 건네줄 것도 있거든요."
"그럼 일 끝나고 찾아오겠네?"
"...하아. 당신도 참 끈질기네요."
라이라가 귀찮다는 듯이 훠이훠이 손짓했다. 빨리 가라는 듯 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 안가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처럼 보였다.
"그래. 알았어."
하아... 혼자 올라가야 한다니. 한숨을 푹 쉰 뒤에 발걸음을 옮겼다.
북부의 종족은 남부보다 다양하다.
아니 남부가 오히려 고리타분 한 느낌이 강하다는 설명이 더 적절하다.
오드웰 연합군 vs 인간 세력의 구도로 정해져있는 느낌이니까. 하지만 북부는 다르다.
카브란 산맥은 연합군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남부보다 북부 쪽에서 교류가 활발한 것도 있지만, 용병들이 몰려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돈만 주면 어느 진영에서든 싸우는 인간들. 돈만 되면 어디든 가는 놈들이 용병이다.
그것 외에도 몬스터 처리나 던전 처리를 하기 위한 인간들도 있지만 이들은 소수다.
던전이나 몬스터 사냥을 하려면 중부로 가는 편이 보편적이니까.
지금 주변에 보이는 이들도 전부 용병이다.
엘프와 한 팀을 맺은 파티도 있고, 드워프와 함께 술을 마시는 이도 있다.
여기에서 북부의 자유분방함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자유분방함을 자랑하는 건 나인가?'
군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벌써 불심검문을 3번이나 당했다. 빨리 사령부로 올라가야 하나.
사령부로 가는 길을 느긋하게 걷고 있으니 이상한 놈처럼 보이는 듯 싶다.
"허억...허억..."
사령부를 향해서 걸어 올라가는 데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런데 젠장 왜 이렇게 높냐고.
굳이 산의 꼭대기 부근에 지어놓은 사령부도 이해가 안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세계수에 글을 안올렸지.
세계수에 글을 올린 것을 후회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
카브란 산맥의 사령부.
한 여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보고서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연두색 머리칼은 어깨까지 내려오고 인간보다 약간 불그스름한 피부를 가진 오크. 에우제니아였다.
"쯧.. 이번에도 별로잖아."
쯧. 짧게 혀를 찬 에우제니아가 중얼거렸다.
이번 전투도 그렇게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전략을 파훼당한 건가?
고지를 한 번만 밀어붙여서 점령한다면 카브란 산맥 쪽을 장악할 수 있을 듯한데, 의미없는 소모전만 반복되고 있었다.
에우제니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뚫어져라 보고서를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크의 대부분은 머리가 좋지 않았다.
에우제니아가 오크의 대표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하고 그나마 똑똑한 오크라서였다.
"마음 같아선 전부 뚝배기를 부숴버리고 싶은데."
파각. 그녀가 쥐고 있던 펜대가 가볍게 부러졌다.
무식하게 전투 도끼나 메이스를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머리를 쓰는 일은 어울리지 않다.
답답한 마음에 에우제니아가 손떼가 묻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제목 : 솔직히 에우제니아 이 년보단 내가 더 잘할 듯 ㅋㅋ
종이의 첫페이지에 적혀 있는 제목은 보기만 해도 열이 뻗친다.
세계수 인트라넷에 올라왔던 장문의 비방글이지만, 에우제니아는 소중한 것처럼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연전 연패를 하던 때, 이 글을 봤었지. 에우제니아는 그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인트라넷에 접속하지 않는 그녀이지만 자신의 욕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멀리했건만 부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가져온 종이뭉치를 가져왔다.
'이게 뭐지?'
제목을 본 에우제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직설적인 글이라니.
내 손에 죽고 싶어서 미친 건가? 분노로 마나가 요동쳤지만,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무슨 내용일까? 그래. 어떤 내용인지 확인 해보자.
확인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라면 색출해서 징계를 줄 생각이었다.
매일 군장 걸음을 시키고 살기 싫게 만드는 육체고문을 선사해주리라.
그렇게 첫 페이지를 넘긴 뒤, 읽어내려가던 에우제니아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분노에서 짜증으로.
짜증에서 호기심으로.
호기심에서 수긍으로.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에는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짜증나는 말투긴 하지만, 논리 정연하게 정리된 전략과 전술에 관한 글이었다.
글쓴이가 누구인지 모르곘지만, 높은 경지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법을 아는 이다.
에우제니아가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녀는 글을 다 읽고 난 뒤에 자신의 전략을 수정했다.
과감하게 돌격해서 병력 소모전을 하기보다는 자원을 쏟아 붓고 게릴라전을 유도했다.
그러자, 여태까지의 패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전황이 바뀌었다. 몇 달만의 승리다운 승리였다.
글에 적힌 내용만 따라했을 뿐인데. 이렇게 까지 전황이 변한다고?
일이 이렇게 잘풀리자 에우제니아에게 의문이 생겨났다.
대체 누구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평상시에 가지 않는 세계수로 접근했다.
세계수는 웬만한 일이라면 대답하지 않는다.
특히, 오드웰 연합군의 손실이 될 일이나,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정보를 주거나 알려주는 일은 없다.
자신을 욕하는 이들을 전부 조지려고 했던 에우제니아라서 잘 아는 사실이다.
그때는 세계수가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이 글은 누가 쓴 거지? 알고 싶은데.'
세계수 앞에 선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이딴 나무를 신으로 섬긴다니, 엘프란 족속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발로 세계수를 툭툭 차면서 기다렸다.
엘프들이 하는 예법을 지키지 않아서 대답을 안 해주는 건가? 싶은 그때.
예상외로 세꼐수는 쉽게 대답을 해주었다.
"남부에서 활동하는 강한윤 중위에... 인간이라."
남부의 정보가 정리된 서류를 읽은 에우제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 인간...? 인간이 처음부터 중위를 달았다고?
의문을 표하면서 밑으로 읽어 내려갔다.
뭐야 이게?
다프닐 작전 수립.
다프닐 점령.
루프란 작전 수립.
마르벨스 항복.
루프란 함락.
짧은 내용이지만, 묵직한 업적들이었다.
거의... 전쟁영웅이잖아. 이걸 혼자서 해냈다고? 에우제니아가 중얼거렸다.
그 아래로는 강한윤 중위라는 인간이 세운 업적으로 인한 논의사항이었다.
강한윤 중위. 대위 진급에 관한 논의 중.
에리엘 대령. 준장 진급에 대한 논의 중.
모든 게 인간 하나에게 몰려있는 내용이라니.
그것보다 임관한지 얼마 안된 인간의 업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녀석일까.'
남부에 임관한 인간 장교.
인간이라는 것도 특이하고 이력도 특이하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는 거지?
똑똑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에우제니아를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작은 노크였다.
"에우제니아 사령관님. 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오늘 온 손님은 없다. 그렇다면 누구일지 예상이 됐다. 강한윤 중위겠지.
에우제니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이 열리고 걸어 들어온 강한윤 중위는 땀에 절어 있었다.
.. 고작 그걸 걸어올라왔다고 저렇게 된 건가?
이게 그 보고서에 나와 있던 사내라고? 마력도 미약하고 육체도 보잘 것 없다.
기초 단련조차 하지 않는 인간이 이런 글을 쓴 거라고?
실망한 에우제니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부른 진 알고 있겠지? 강한윤 중위."
"예. 알고 있습니다."
"야. 뒤지고 싶냐?"
에우제니아가 분노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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