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5화
* * *
상자의 뚜껑을 열자 불쾌한 냄새가 난다.
뭐가 들어있기에 이런 거지?
병사가 들고 있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딱 축구공 하나 들어갈 만한 상자다.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이건..."
에리엘이 내용물을 확인하고서 말을 삼켰다
얼굴을 확인하고서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으로 보인다.
나도 상자의 안을 쳐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소드마스터인 파프닐의 목이 들어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안 풀렸나 본데?
루프란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검을 들어 올리고 결국에는 영지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니, 영지민도 아니지.
같은 편인 병사들이 목을 들고 온 것으로 보면, 군대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으로 보인다.
병사들이 어디에서 모였겠는가. 루프란의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는 루프란 출신이다.
영지민들의 편을 드는 파벌과 영주의 편을 드는 파벌로 나뉘고.
파프닐은 암살을 당하거나, 머릿수로 밀려서 죽었거나, 독살을 당했겠지.
게임에서도 자주 나오는 편인 내란 시나리오의 보편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뭘 원하지? 이걸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냐. 루프란의 병사여."
파프닐의 머리를 잡아서 들어 올린 에리엘이 물었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저 들이 이러는 이유는 원하는 게 있을 테니까.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대처가 달라진다.
"일단... 식량을 원합니다."
"식량?"
"동부의 영지는 돈을 요구하고 마르벨스와는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다프닐과 연락할 방법은 직접 찾아오는 것뿐이니까요."
"흐음. 식량이라."
에리엘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자의 목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어 보인다만."
우리 쪽에서 현상금을 건 것도 아니고, 파프닐이 그렇게 가치가 높은 영웅도 아니다.
달랑 목만 가져왔다고 해서 요구사항을 들어줄 이유는 없지.
에리엘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가치는 있습니다."
병사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이겼으니까요."
"이겼다니? 무슨 뜻이지?"
병사가 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낸다. 붉은 색으로 빛나는 인장.
귀족 중 자작임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이게 이 병사의 손에 있다는 것은 간단명료하다.
귀족까지 전부 죽이고 루프란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 죽인 것인가?"
"예. 다 죽였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루프란은 저희의 도시이니까요."
병사가 지친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퀭한 얼굴이었다.
"그렇다 한들 식량을 요구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그게 루프란 모두의 뜻이니까요. 제가 루프란의 대표 자격으로 왔습니다."
"그래. 계속 얘기해보도록."
"루프란이 어디 소속이건 관심이 없습니다. 저희의 삶이 복구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인가?"
"예. 가장 심각한 게 식량의 상황이니까요. 루프란은 괴멸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상자도 많고 자원도 없으니 도움이 필요합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요구였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굶주린 것으로 보였으니까.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지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의 얘기를 들은 에리엘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들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느냐고 물어보듯이 말이다.
"일단은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도록. 결정을 내리면 다시 부르도록 하지."
에리엘의 명령에 병사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얘기했다.
"저들의 이야기는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이군."
"파프닐의 목이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 파악은 충분합니다."
소드마스터인 파프닐이 죽었다.
그렇다면 루프란의 상황은 어떨지 뻔한 법이다.
이제는 주인이 없는 루프란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루프란을 먹는 것도 좋지만, 우리의 전력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일단은 헨리크 공작을 북부로 보내야합니다."
"흐음... 어째서지?"
"완벽하게 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럴 바엔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야 합니다."
헨리크 공작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속내를 모르는 입장에서 완전히 믿기란 어려운 법이다.
마음을 돌려서 다프닐을 공격한다고 가정하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안 좋은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 손을 쓰는 게 좋다.
"그럼 헨리크 공작을 북부로 보낸 다음, 루프란으로 들어가는 건가?"
"예. 어차피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루프란에 필요한 자원이 여기엔 없으니까요."
루프란에 지원을 해주려면 루드밀라에 저장되어있는 식량을 끌어와야 한다.
그것 외로도 루프란을 점령하기 위해 새로운 영웅과 병력들이 필요하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으면 루프란을 점령하기 어렵다.
다프닐의 포로들을 흡수하는 것도 적당히 되고 있으니, 루프란을 점령할 즈음이면 완벽하게 정비를 끝마칠 수 있다.
"일단은 느긋하게 진행하도록 하지."
"예. 급한 건 아니니까요."
루프란의 상황이 얼마나 심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정찰을 끝낸 다음, 정보를 얻은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으니까.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루프란이다.
우리는 루프란에 대한 결정을 끝마쳤다.
결정 사항에 대한 얘기를 들은 병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늦어진다는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다. 없는 걸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길어도 나흘이다. 그 정도도 못 기다리겠나?"
"알겠습니다. 나흘이라.. 나흘은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루프란에 지원을 늦게 보내준다는 얘기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결국에는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흘 뒤에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라. 수상한 기미가 보인다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에리엘이 악수를 건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병사들은 돌아가고 우리는 생각보다 싱겁게 루프란을 점령할 기회를 얻었다.
그보다 이건 어떻게 하지.
상자에 담긴 파프닐의 목엔 파리가 엉겨붙어 있었다.
"이거 뒷산에 버리고 와."
나는 옆의 병사 하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는 것도아니다
그저 파리만 꼬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파리가 더 꼬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지.
오크 병사가 파프닐의 머리가 든 상자를 들고서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
나흘 뒤. 우리는 식량을 들고서 루프란으로 향했다.
'정찰에 딱히 걸리는 건 없었지.'
소드마스터 급의 실력자가 루프란에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색적으로 위협이 되는 영웅이 있다고 느끼지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의심쩍은 상황은 아니다.
'이 시나리오 대로면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대부분 내정이 박살난 영지가 된다.
내정이 박살났다는 것은 제대로 된 영웅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기가 바닥을 찍어버리면 대부분의 영웅들은 전부 다 탈영해버린다.
거기에 식량도 자원도 없는 루프란에서 군대가 유지되길 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루프란이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루프란이 보인다.
성문이 전부 활짝 열려있고 놀라울 만치 조용하다.
영지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걸리는 건 없지?"
"없어. 있으면 바로 처리해야지."
노아가 활을 든 채로 주변을 살폈다.
이제는 슬슬 루프란에 가까워지고 사람들의 형체도 보인다.
성문에서부터 보이는 것은 피골이 상접한 영지민들과 벽에 기대서 앉아있는 병사들이었다.
살아있나?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드는 것을 보아하니 살아있긴 하다.
성문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니 시선이 하나 둘씩 이쪽으로 모인다.
우리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졌다.
"다들 무기를 내려라! 반항하는 자는 공격하겠다!"
노아의 외침에 무기를 들고 있던 자들은 바닥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반응이 뭔가 싱거운데. 하긴, 이미 수도 없이 전투를 겪은 이들인데. 더 싸우고 싶진 않겠지.
우리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면서 루프란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알고 있는 얼굴들도 보였다.
광장에 시체로 매달려있는 카니안 남작과 바로브 자작.
내란이 일어났는데 귀족이 살아남을 리가 없지.
소드마스터인 파프닐도 죽은 마당에 아무 힘도 없는 귀족은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
'역시 인구수는 못 이겨.'
소드마스터라고 한들 수십 수백의 소드익스퍼트가 달려든다면 죽는 게 당연하다.
일당백이라고 한들, 마나는 무한한 게 아니니까.
여러 명과 싸우면서 소진된 체력과 마나를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다.
헨리크 공작 정도의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라면 몰라도 초입의 경지인 파프닐은 불가능하다.
불쌍한 녀석들.
자기 분수를 몰라서 죽음을 맞이한 두 귀족들을 위해 묵념했다.
'루프란은 우리가 대신 사용할 게.'
[루프란을 점령하였습니다!]
[행동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묵념이 끝나자 기분좋은 메시지 소리가 들렸다.
*
루프란을 점령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돌을 나르는 중이다.
"아니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 거냐고."
"어이, 강씨. 개소리 하지 말고 돌이나 날라."
"노아! 너도 이상하지 않아? 나는 작전 장교인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해!"
작전 장교면 내정에 관련된 일을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몸을 써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에리엘의 명령이었으니까.
수많은 전투로 인해서 무너진 루프란을 재건해라.
물론 나도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라고 했단다.
"그으으윽..."
"죽을 것 같은 척 하지 말고 열심히 해."
"진짜 죽을 것 같아."
다른 병사들은 잔해들을 쉽게 옮기는 데.
나는 몸이 부서져라 힘을 써서 들어 올렸다.
이게 맞나? 몸이 진짜 부서질 거 같은데?
루프란의 무너진 집이나 부서진 도로를 재정비 하라는 명령을 왜 하필 나에게..?
억울하지만, 그간의 노력이 헛된 건 아니었다.
루프란은 점차 옛날의 모습을 찾아갔으니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임의 루프란과 비슷한 모습대로 복구되어간다.
'첫날에는 진짜 좆같았지.'
여기저기에 시체들은 널려있고.
사람들은 통제를 따라주지 않아서 식량을 갈취하려고 했다.
결국에는 진압을 하고나서 분위기가 진정이 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비떼 같아서 무서웠다.
물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루프란은 첫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로 여기가 루프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한 모습에 놀랐다.
영지민들이 생각보다 협조를 잘해준 덕에 정상적인 영지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의 혁명을 일으킨 거니까.'
영지민 파벌이 이길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승리를 이뤄냈다.
그 승리로 오드웰 연합군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으니, 지금의 상황에 잘 따라주는 거라 생각한다.
"강한윤 중위님!"
"어?"
"에리엘 대장님이 찾으십니다!"
"아니 왜?"
"이유는 모릅니다."
나는 지금 들고 있는 나무판자를 바닥에 던져버리고서 신나게 뛰었다.
아무튼 좋다.
지금 이 망할 보수작업을 빠질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
에리엘이 있는 지휘실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에리엘 대장님 저 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에리엘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비어있는 의자에 앉자, 에리엘이 입을 열었다.
"강한윤 중위.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
"아뇨? 전 그런 기억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착한 작전장교니까.
그런 속내를 담아서 대답하자 에리엘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읽어보도록."
빨리 읽어보라는 듯이 종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게 대체 뭐라고 그러지? 종이를 펴고 아래로 읽어 내려갔다.
세계수에 적은 게시글로 인하여 할 말이 있으니 강한윤 중위는 북부 사령부로 오도록. 1주의 시간을 주겠다.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북부 사령관 에우제니아.
"무슨 짓을 안 했다는 게 확실한건가?"
"...."
세계수 인트라넷에 익명으로 시원하게 글을 남겼더니 피드백이 도착했다.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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