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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9화 (19/163)

〈 19화 〉 19화

* * *

어디 소설에서 보면 밤 시중을 들겠다면서 메이드가 들어오던데.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마르벨스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뒤.

다프닐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에게 결투로 이긴다면 말이지.

항복한다는 얘기에 잠깐 설렜었지만 그 감정은 5초도 가지 않았다.

그놈의 망할 결투.

순순히 항복해주면 안되나?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마르벨스는 탐이 난다.

마르벨스는 알찬 영웅들이 많다.

가문의 헨리, 이사벨라 정도만 해도 라인업은 든든하다.

그 이하 급의 기사들도 전력이 약하지 않다.

기사들 중에서 소드마스터 급으로 성장하는 이가 나올 지도 모르는 법이다.

성장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운이다.

성장속도가 빠른 영웅을 키운다고 무조건 빠른 것도 아니다.

각성을 해서 단 번에 두각을 드러내는 영웅들도 있다.

성장 속도라는 건 보편적인 상황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드마스터를 많이 배출할 가능성이 높은 영지가 바로 마르벨스였다.

결투만 이긴다면 마르벨스가 공짜다.

다른 지역에서 강한 영웅을 데려올 수 없나 생각했지만, 헨리크 공작이 다른 조건을 붙였다.

­결투는 사흘 안으로 진행해야하네. 그 이상은 근질거려서 기다리질 못하겠네.

사흘의 제한이라는 조건이 붙어버렸다.

강력한 영웅을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이 사흘이지, 내가 다프닐로 도착하는 순간 하루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이틀. 단 이틀의 거리 내에 존재하는 영웅들은 전부 에리엘 보다 약하다.

망할 전투광 같으니.

이런 영웅이 왜 북부가 아니라 남부에 있는 거지?

북부에 있었으면 미친 성장으로 밸런스 붕괴여서 그런 건가?

고민이 깊어졌다.

헨리크 공작을 이길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준비가 좀 필요하다.

거기에 헨리크 공작 정도의 강자를 이기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결투라는 것은 운이 있냐 없냐로 결정 나는 경우가 생각보다 빈번하다.

럭키 펀치 한방이면 이기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 일단은 해보자.

결투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창밖의 풍경들을 보면서 생각에 푹 빠졌더니 다프닐 근처까지 와있었다.

왠지 몰라도 어딘가로 갈 때보다 돌아올 때가 더 빠른 느낌이다.

같은 시간이 걸린 것 같은데. 신기하네.

성문 앞에서 마차가 잠시 멈춰 선다.

신원확인이 끝나고 성문이 열린 뒤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몇 분. 이제는 진짜로 마차가 멈춰 섰다.

부대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한 마차의 문을 열었고.

"강한윤!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응?"

노아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껴안으면서 몸 여기저기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손으로 만져서 확인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전투를 치르고 온 것도 아니고 마르벨스에서 얘기를 하고 왔을 뿐인데.

위험한 전투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대한다.

"신혼인가? 아주 깨가 쏟아지는 군."

멀리서 걸어오는 에리엘이 웃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여기 있는 부대원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텐데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자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노아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에 시선이 몰리는 건 조금 부끄럽다.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겁니까?"

"다 너를 보러 온 거다. 강한윤 중위.

혼자서 마르벨스에 다녀온 미친 인간이 있다는 데. 신기하겠지."

"..."

미친 인간이라니. 그 정도로 이상한 건가.

주위의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저 정도는 해야 단번에 중위를 달 수 있는 건가?

­중위 달아준다고 하면 너는 가냐?"

­차라리 그냥 죽여라 죽여.

... 다들 반응이 오묘하다.

다가온 에리엘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적의 본거지를 혼자서 찾아가는 건 맨 정신으로는 못하는 짓이지."

"저는 맨 정신입니다만."

"그래. 그런 걸로 치지.

아무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하다만. 지금 들을 수 있나?"

"예.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중위는... 그냥 같이 가도록 하지."

팔짱을 낀 채 붙어있는 노아를 본 에리엘이 단념했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제는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노아와 함께 이동했다.

"그래서 마르벨스는 어땠나. 즐거운 경험이라도 있었나?"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마르벨스에서도 즐거웠겠군. 다프닐이랑 비슷했을 테니."

지휘실에 오는 상대에게 차를 대접하는 걸 좋아하는 지.

에리엘이 이번에도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우리들 앞에 내려놓았다.

"거기에서 만난 헨리크 공작은 어땠나."

"호쾌하더군요. 정직하고 강해보였습니다."

무슨 사람의 전완근이 여자의 허리만 하다.

저 정도면 척추를 반으로 접어버리는 게 가능하겠지? 같은 생각만 들었다.

인간 자체가 강하다는 말이 딱 헨리크 공작에게 어울렸다.

"소드마스터 중급의 경지에 올라있으니 평범하진 않겠지."

"아무 말도 안했는데도 제 생각을 꿰뚫어 보더군요."

에리엘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헨리크 공작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지. 솔직한 사람이고 거짓말을 잘 안다고 했나."

"예. 그랬습니다."

"솔직한 사람은 거짓말에 민감하지."

그걸 생각하면 두렵다.

어떻게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어낸 거지?

얘기를 들은 에리엘이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다 알고 있는 강한윤 중위도 그건 몰랐나 보군?"

"세상에 미세한 표정으로 생각을 읽는 괴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소드마스터의 경지니까. 더한 괴물들도 세상에는 많다."

에리엘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을 스테이터스와 스킬로만 평가했지만, 이번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재능이나 특성으로 가진 영웅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소드마스터 그 이상으로 올라온 영웅이라면 더욱 조심해야한다.

미세한 표정이나 반응을 숨기는 걸 연습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크 공작과 특별히 한 얘기는 어땠지? 아니. 간단명료하게 물어보지.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그것부터 듣고 싶다만."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습니다."

고민을 하던 에리엘이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부터 듣도록 하지."

"마르벨스에서 항복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노아와 에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그 말, 진짜인가?"

"예."

마르벨스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니 당연히 좋겠지.

에리엘이 차를 마시려다가 멈칫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뭐지?"

"헨리크 공작을 결투로 이겨야한다는 조건입니다."

에리엘이 인상을 찌푸린 뒤에 읊조렸다.

"망할."

"말도 안 되는 조건이군. 결투를 해서 이겨야 한다고?"

"자신 없으십니까?"

"자신이 있다고 해서 격차가 줄어들진 않지."

당연하다.

스펙으로 따지면 에리엘은 소드마스터 하급, 헨리크 공작은 중급이다.

아무 조건도 없이 1:1로 겨룬다면 에리엘이 이길 확률은 1할 언저리다.

'경험은 에리엘도 충분하지만 그냥 스펙이 딸려.'

마나부터 시작해서 힘과 체력, 스킬까지.

어느 것을 비교해도 소드마스터 중급인 헨리크 공작에 비해서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에리엘을 보조해야할 필요가 있다.

에리엘은 성장력이 좋은 영웅 중 하나다.

강한 영웅들과 싸우면서 강해진다면 후반에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영웅이 된다.

헨리크를 이겨서 경험치를 얻는다면,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길 방법이다.

이걸 얘기해도 되나? 노아의 눈치를 살짝 살핀 뒤에 서두를 떼었다.

"에리엘 대장님. 강해질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노아에게 했던 것처럼, 에리엘에게도 똑같이 권한다.

마사지를 해서 신체능력을 향상시키고, 물약으로 풀 도핑을 한다면 승률을 올릴 수 있다.

이것 말고는 최선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아있는 차를 입에 털어버리자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옆을 힐끔 보니, 노아의 시선이 차게 식어 있었다.

***

에리엘과 이야기는 간단하게 끝났다.

­강해질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해야겠지.

헨리크 공작을 혼자서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단번에 승낙했다.

"노아. 저녁 시간 때 찾아갈게."

"그러던지."

노아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에리엘에게 마사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질투를 느끼는 걸까.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노아의 볼을 붙잡았다.

말랑말랑한 볼이 땅기는 만큼 쭉 늘어났다.

"므흐는 거야!"

"귀여워서."

노아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질투를 하는 모습도 귀엽지만, 그녀의 감정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됐거든."

"이따 찾아 갈게!"

손을 툭 쳐낸 노아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 가버렸다.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지만, 알아들었을 거다.

그럼 일을 진행하러 가볼까.

에리엘의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에리엘이 결투를 이긴다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포기하긴 이르다.

이길 확률이 1할 정도라고 한들, 그걸 3할, 5할.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게 나의 역할이다.

마르벨스를 결투로 점령할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순수 스탯으로 승률을 5할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의 몸에 부담이 많이 간다.

영약이라는 건 작용과 부작용이 함께 있는 법이다.

잡화상점의 문을 열자 탕약기로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가 난다.

녹용 즙을 만드는? 그런 향이라서 좋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버프용 영약을 만들기 위해 구매할 아이템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블아이의 꼬리, 오크의 피, 정령의 핵 등등. 머릿속으로 조합법과 하위 아이템들을 떠올렸다.

힘, 체력, 마나, 재치 전부 도핑을 해야한다.

소드마스터 중급과 하급의 스탯 차이는 메꿀 수 있지만, 레벨의 차이는 쉽게 좁히기 힘들다.

전투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스탯. 재치까지 도핑할 필요가 있다.

에리엘에게 먹일 영약들의 효과를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30분간 힘을 5 올리면, 하루 동안 힘 ­10 디버프가 걸린다.

이런 식으로 모든 스탯에 디버프가 걸린다면 몸이 무겁고 몸살로 고생을 할 텐데.

부작용을 더욱 낮춘다면 효과가 약해지니 어쩔 수 없다.

잡화점의 도구를 사용해서 아이템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갔다.

[강화된 야만의 영약을 제조하셨습니다!]

[마녀의 보양식을 제조하셨습니다!]

[달콤한 벌꿀 디저트를 제조하셨습니다!]

[행동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강화된 야만의 영약

힘+5, 체력+5

­마녀의 보양식

마나 회복력이 30% 상승합니다.

­달콤한 벌꿀 디저트

재치가 10 상승합니다.

띠링 띠링 메시지 소리가 울리면서 성공한다.

실패? 고인물인 내가 실패할 리가 없지.

작업을 끝낸 뒤, 완성된 아이템들을 배낭에 집어넣고 노아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

노아는 저녁을 먹을 때까지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낮에는 살짝 장난을 쳤지만 지금의 반응을 보니 장난도 못치겠다.

노아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가 닫힌다.

미묘한 분위기. 빤히 쳐다보던 노아가 서서히 다가오고 나는 모퉁이로 몰렸다.

그대로 강제로 입을 맞춰온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비해 입술은 부드럽다.

"츄웁... 응..."

목덜미를 껴안은 채로 키스를 이어나간다.

그녀의 화가 풀린 건가? 했지만 노아가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강한윤. 벗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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