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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8화 (18/163)

〈 18화 〉 18화

* * *

헨리크 공작의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기에 베인다면 끽 소리도 하지 못하고 죽겠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살아날 궁리를 떠올렸다.

죽을 위기가 다가오니 그 어느 때보다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헨리크 공작은 화를 내고 있다. 대체 왜?'

헨리크 공작이 마르벨스로 초대했고 거기에 응했다.

그랬을 터인데 헨리크 공작은 화를 낸다.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마르벨스로 초대, 오드웰 연합군, 마차, 인간. 나.

헨리크 공작이 나에게 엘프냐고 물었다.

딱 봐도 인간인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엘프가 올 거라 생각해서?'

오드웰 연합군의 주축은 수인, 엘프, 드워크, 오크다.

그 중에서 인간과 가장 닮은 것은 엘프다.

하지만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태도를 돌변했다.

다프닐에서 출발했고 마르벨스에서 도착하니 인간이 내렸다. 그래서다.

오드웰 연합군이 점령한 다프닐에서 인간을 아무나 뽑아서 보냈다. 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헨리크 공작이 화내는 이유를 알아냈다.

"... 실망입니다. 헨리크 공작님."

최대한 담담한 척을 했다.

그리고 뜸을 들이면서 말을 이었다.

"실망이라고?"

"예. 실망했습니다.

초대에 응했건만 이런 대우라니.

제가 실망 말고 뭘 하겠습니까?

기뻐해야합니까? 이걸 보고도?"

헨리크 공작이 들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을 들고 반겨주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로 실망을 했다는 듯,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래. 실망이라. 실망은 그쪽이 할 게 아닌 것 같은데. 오드웰 연합군 측의 인간."

"인간이 아니라 강한윤 중위입니다."

헨리크 공작의 말을 끊듯이 답했다.

"저의 작전에 대해 감탄하였다기에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얘기할 건 없어보이는 군요."

내가 마차에 발을 올린 뒤에 말을 이었다.

"돌아갑시다."

기수를 돌리라는 듯이 마차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런 행동에 엘프 마부가 당황한 듯이 나와 헨리크 공작 사이로 시선이 오간다.

헨리크 공작이 들고 있는 검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마차에 마저 올라탔다.

검을 들고 있는 데 어쩔 거야? 초대한 상대를 이따 구로 대한다고?

약간의 분노가 담긴 행동이었다.

"운전하도록. 다프닐로 돌아간다."

"돌아간다고?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곱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헨리크 공작이 코웃음 쳤다.

진짜로 기수를 돌린다면 사지를 분해해버리겠다는 듯이 협박을 하고 있다.

"루드밀라에 호위도 없이 온 제가 그런 걸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출발하도록!"

애초에 맨몸으로 마르벨스에 온 나다.

적진에 대놓고 들어온 사람에게 목숨으로 협박을 한다고?

"크하하하! 그래! 그렇군!"

헨리크 공작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깨달았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온 상대에게 목숨을 위협한다니.

모순적이었으니까.

"대단하군. 대단해.

내가 검을 뽑았음에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감탄하게 만들다니.

오드웰 연합군의 장교가 맞았군."

"제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무서워하진 않았다.

두려움을 분노로 숨겼을 뿐이다.

기분 좋게 웃어젖힌 헨리크 공작이 검을 집어넣었다.

"오드웰 연합군에서 인간이 왔는데 내가 어떻게 바로 믿나!

하지만 기개를 보아하니 자네는 진짜야.

강한윤 중위라고 했나?"

"예. 강한윤 중위입니다."

"안에서 식사라도 하고 가지. 내가 너무 홀대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거절하고 진짜로 돌아간다면 분위기가 망가지겠지.

아니 몸과 목이 분리될 지도 모른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헨리크 공작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온 거다.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갈 거였다면 마르벨스에 온 의미가 퇴색된다.

"정말 대단한 담력이야. 이런 사내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만큼 내가 감탄했다는 걸세!"

헨리크 공작와 가볍게 악수한 뒤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의 디자인은 고풍스럽다거나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있을 것만 딱 있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 귀족의 성이라는 생각이 단번에 든다.

실제로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사치품들은 그렇게 비싸지 않다.

게임에서는 많이 와본 곳이지만, 직접 걷고 있으니 느낌이 색다르다.

다프닐도 그렇고,

마르벨스도 그렇고.

내가 알고 있는 곳이지만 실제로는 와본 적 없는 곳이다.

이 특유의 냄새나 분위기는 게임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헨리크 공작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성 내의 식당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도 했고, 귀족들은 밥을 먹으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게임에서는 중요한 대화만 하고 전부 스킵해버리지만, 여기엔 없어서 문제다.

식탁의 상석에 앉은 헨리크 공작을 따라서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시녀들이 음식을 들고 나르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메뉴가 하나하나 늘어갈 때 마다 조금 부담스러운 기분이다.

귀족은 이런 게 일상인가.

아직 귀족의 마인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왕 식사를 하는 거 가족들을 불러서 같이 먹어도 되겠소? 강한윤 중위?"

"예. 괜찮습니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헨리크 공작과 단 둘이 얘기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오히려 좋은 방향이다.

단 둘이서 대화하면서 어색한 침묵이 도는 것보단 여러 사람이 있는 게 좋다.

시녀들이 문을 열자 헨리크 공작의 가족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헨리크 공작의 아내 아이리스, 장남 헨리, 둘째 딸 이사벨라, 막내아들 설리번이다.

확실히 헨리가 잘생기긴 했네.

여성 유저들이 뻑이 간다는 영웅 중 한명. 서양 모델처럼 훈훈한 외모와 찬란한 금발이 돋보인다.

한 번 웃어주기만 하면 여자들이 가슴을 부여잡을 정도로 잘생겼다.

... 헨리크 공작의 피가 안섞였나? 아내인 아이리스 쪽의 피가 진하다는 느낌이다.

성능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하다니 이거 버그 아니야?

헨리 다음으로 이사벨라와 설리번에게 시선을 옮겼다.

헨리 말고 이사벨라와 설리번이 약한 건 아니지만.

헨리크 공작과 헨리가 너무 돋보여서 주목을 받지 못할 뿐이다.

저 둘도 성장을 한다면 압도적이진 않더라도 1인분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영웅이다.

공작이 포크를 들자, 나머지도 포크를 들었다.

귀족 예법을 알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는 모른다.

혹시나 실수할까봐 천천히 움직였다.

식기가 접시에 닿아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역시 사람이 많아도 침묵이 돌면 어색하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헨리크 공작이었다.

"강한윤 중위. 궁금한 게 하나 있네."

"예."

"다프닐을 어떻게 점령한 거지? 우리가 지원을 가기도 전에 말이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정령을 했더군."

"그건..."

말을 해줘도 되나?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비밀입니다."

"비밀?"

"예. 제 밑천을 드러내기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식사 대접을 받고 있지만 헨리크 공작님과 저는 적이니까요."

조금 위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괜찮다.

헨리크 공작이라면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크흐흐. 그렇군! 내가 괜한 걸 물었어!"

그가 웃어넘기는 것을 보며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내가 적이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지긴 했지만.

헨리크 공작과 얘기를 풀어나가는 게 더욱 중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다프닐의 작전은 전부 강한윤 중위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얘기군."

"예. 제가 작전을 건의했습니다. 다프닐의 성벽을 뚫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크흐흐.. 당돌하군. 당돌해!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군! 사내라면 자고로 이래야지!"

와인을 벌컥벌컥 마신 헨리크 공작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좋게 풀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음식도 맛있고 말이지.

다프닐의 취사병도 한 수 접고 갈 정도의 맛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있어서 그런 건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포크를 찍었다.

달달한 양념이 잘 배어있어서 맛있다.

그렇게 긴장이 풀렸을 때, 헨리크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프닐을 뚫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어려운 거라 했지.

그렇다면 마르벨스는 어떻지? 어려운가? 불가능 한가?"

이건 질문이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닌가.

"아버지."

헨리도 내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서둘러서 수습하려 했다.

"..크흠. 아무래도 내가 질문을 잘못한 것 같군. 미안하네. 강한윤 중위."

"아닙니다. 궁금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말을 바꾸지. 마르벨스를 점령할 생각이 있나?"

이것도 마찬가지로 직설적인데.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만 던지는 통에 속이 답답하다.

"저는 에리엘 대장님의 생각을 따를 뿐입니다."

생각을 최대한 돌려서 대답했다.

네. 마르벨스를 어떻게 때려 부술 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 지 상상을 못하겠다.

제발 질문을 멈춰줬으면 좋겠다.

헨리크 공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만약, 우리가 결사항전을 한다면, 루프란처럼 될 확률이 있나?"

"루프란..."

헨리크 공작의 말에 딸인 이사벨라가 중얼거렸다.

루프란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확실히 마르벨스를 점령하는 건 어렵다.

군대의 병력은 루프란에 비하면 적지만, 기사단의 정예 병력들이 문제다.

천성 무인인 헨리크 공작이 육성한 기사단은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어렵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마르벨스도 약점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 점을 공략한다면 마르벨스를 무너뜨릴 수 있다.

소수정예로 기사단의 병력을 갉아먹으면서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방법을 총동원한다면 충분하다.

잔꾀가 통하지 않는 헨리크 공작인만큼 나도 정석적으로 움직여야한다.

정석적으로 돌려 깎고 갉아먹어서 데미지를 누적시킨다.

마르벨스를 최소의 피해로 점령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헨리크 공작이 말을 걸어왔다.

"강한윤 중위. 입은 다물 줄 알지만 숨기는 건 연습을 해야겠어."

"...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소드마스터인 나의 눈썰미가 평범한 사람과 같지 않지.

마르벨스를 어떻게 점령할 지 고민하는 게 다 보이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망할... 이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을 숨긴다고 말을 안했더니 표정을 읽었다.

허를 찔려서 순간적으로 얼굴이 움찔했다.

이렇게 반응하면 사실이라고 얘기해주는 꼴이 아닌가.

헨리크 공작이 나이프로 고기를 여유롭게 잘랐다.

"이제 허심탄회하게 말해주게. 마르벨스는 루프란처럼 되나?"

"예."

어차피 속내를 다 읽히는데 솔직하게 얘기했다.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다면 선택지가 없다.

게임에서 소드마스터는 괴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저 잘 싸워서 그런 줄 알았건만. 진짜 괴물이잖아.

젠장. 이게 소드마스터 중급의 실력자인가?

감각이 일반인에 비해서 월등히 뛰어나다는 설정은 알지만, 이 정도일 거라 생각은 못했다.

"루프란처럼 된다니.

그렇다면 영지민들도 죽어나가겠군.

병사들도 죽어나갈 테고.

완전 지옥이나 다름없겠군.

그렇지 않나? 강한윤 중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으로 굳이 꺼내기에는 민감한 내용이었으니까.

영지민들을 죽이고 일반 병사들을 죽인다.

사실이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헨리크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르벨스는 항복하겠네."

"예?"

잘못들은 건가 싶어서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항복을 한다고? 정말로? 마르벨스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헨리크 공작이 뒤이어 입을 열었다.

"나에게 결투로 이긴다면 말이지."

망할...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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