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7화
* * *
"강한윤 중위가 적이었다면 끔찍했겠군."
나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에리엘이 중얼거렸다.
내용은 간단하다.
보급을 차단해서 루프란에 타격을 주었다.
내정에 문제가 생긴 루프란에 소문을 내서 반란을 유도하였다.
한 페이지로 정리되는 짧은 분량이었지만, 내용은 아주 알차다.
다 읽은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은 에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무섭군. 무서워.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나?"
"제가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가? 그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그래 보입니까?"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초반의 시나리오는 외울 정도로 많이 플레이 했으니까.
어디를 건드리면 어떻게 움직이고 흘러가는지 꿰고 있다.
에리엘이 차도구를 이용해서 차를 끓인다. 달달한 향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차를 느긋하게 따른 뒤, 잔을 내 앞에 내려다 놓았다.
"정말로 상대의 심리를 읽을 줄 아는 건가?"
"솔직하게 말합니까?"
"그래. 강한윤 중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 나같이 평범한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거든."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평범하다라.
검을 단련하는 이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
찻 잔을 들어 올려서 한모금을 천천히 머금었다.
홍차의 깊은 향과 달짝지근한 맛.
아마도 홍차의 베이스에 다른 무언가를 섞은 것 같다.
"상대의 심리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항상 딱딱 맞아 떨어지게 움직인다만."
"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움직이진 않습니다.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라. 확실히 그렇지."
"그래서 제가 생각한 작전에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두 가지의 상황?"
"예. 저는 가장 좋은 상황과 가장 안 좋은 상황의 대처법. 딱 이것만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최대의 리턴과 리스크.
최고의 상황이 갖춰진다면 나의 선택으로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일 때 나의 선택으로 실수를 하면 큰 손해를 본다는 거니까.
제일 피해야 하는 건 최악의 상황이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면 좋은 선택지는 없다.
좋은 선택지가 남아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니다.
만약,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선택을 해버리면 죽음으로 직결된다.
게임에서 최악의 선택을 하면 대부분 죽는다.
살아날 방법조차 하나도 없이 체크메이트로 사망한다.
"호오. 흥미로운 얘기군. 딱 두 가지만 생각한다고?"
"최고와 최악. 두개만 잘 대처할 수 있다면 그 사이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두 가지의 상황을 대처할 능력이 있다면, 나머지는 쉽다.
대부분은 최고와 최악의 하위호환이니까.
무엇보다 그 둘을 제외하면 리턴과 리스크가 적어서 부담이 적다.
반대로 말하면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아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큰 그림만 생각하면서 작은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3000시간의 플레이 경험으로 쌓인, 나만의 이론이었다.
"그렇다면 강한윤 중위가 생각한 최고와 최악은 뭐지?"
"최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니까요. 하지만 최악이라면 무조건 죽음이겠네요."
적당한 실패는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죽어버린다면 기회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죽지만 않으면 다음은 존재한다.
아무리 위험한 수를 던지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살아남기만 하면 기회는 온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쳤지.'
에리엘과 노아를 설득하고
다프닐의 점령을 시도하고
보급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에 합류했다.
최악의 경우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다프닐을 점령하고 노아와의 연이 생겼다.
후반에 강력함을 자랑하는 마리아, 마로스 남매도 등용했다.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좋은 흐름을 탔다고 할 정도로 잘 풀리는 상황이다.
'지금이 기회다. 몰아쳐야 해.'
좋은 흐름을 타면 운이 따라준다.
최고의 선택을 하면 많은 리턴을 얻을 수 있고
최악의 선택을 해도 손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주사위가 이쪽의 편을 들어줄 때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
루프란을 초토화하고, 마르벨스를 먹어야 한다.
나쁜 흐름이 찾아오면, 뭘 해도 안 풀리는 순간이 올 테니까.
아무리 운의 개입이 적다고 한들 확률적으로 그런 때는 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하는 거지.'
다프닐을 점령하고 루프란을 먹기 진전인 지금까지 잘 해왔다.
여기서 내가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다.
큰 실수를 하지도 않았고,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으니까.
차를 다 마신 에리엘이 잔을 구석에 치운 뒤, 옆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마르벨스는 어떻게 생각하지. 강한윤 중위?"
"음... 마르벨스도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르벨스가 제일 까다롭다.
그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 영주인 헨리크 공작이다.
소드마스터 중급의 실력자.
우리 부대엔 1:1로 싸움을 걸어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영웅이 없다.
하지만, 마르벨스를 점령하려면 그를 꺾어야할 필요가 있다.
'영웅 하나 때문에 난항을 겪어야 한다니.'
함정에 빠뜨리던, 전력을 갉아먹든 온갖 추잡한 수를 써서라도 정면 대결은 피하는 편이 좋다.
다프닐은 수비에 유리하지 공격하기엔 좋은 영지가 아니니까.
다프닐의 성벽이 없다면 마르벨스의 전력을 받아내기 힘들다.
'루프란을 먼저 흡수한 뒤에 마르벨스로 움직여야 하나?'
마르벨스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중부로 진출할 수 없다.
뒤에 적을 놔두고 동부나 중부로 움직인다? 그야 말로 자살행위지.
적이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고 마르벨스 자체만으로도 문제다.
최소의 피해로 마르벨스를 점령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던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열고 경례를 한 병사가 에리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에리엘의 시선이 글을 따라 아래로 이동한다.
다 읽은 뒤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에리엘이 종이를 건넸다.
"음... 이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읽어보도록."
다프닐을 점령한 그대들의 용맹함을 보고 감탄했소.
나는 그대들과 대화를 한 번 나눠보고 싶소.
마르벨스로 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소.
마르벨스의 영주. 헨리크.
투박하기 짝이 없는 편지의 내용이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마르벨스로 초대할 테니 올 사람은 와라.
이건 좀 드문 일이다. 게임에서 헨리크 공작이 먼저 편지를 보내는 경우는 없다.
검에 미친 사람이라 싸웠으면 싸웠지.
경고를 보낸다거나 편지를 보내는 것은 추잡하다고 생각하는 영웅이다.
그야 말로 상남자다.
얼굴에 수염이 복슬복슬한 굵은 인상의 서양인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하아.. 이 초대에 응해야하는 지 모르겠군. 대놓고 함정을 파는 걸지도 모르니 말이야."
"아뇨. 가야합니다."
"강한윤 중위. 이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나?"
"안전한 건 아니긴 합니다만. 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위험한 것도 아니다.
에리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민하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가는 쪽에 기울었다.
'헨리크 공작이라면 심리전을 걸지 않아. 절대로.'
상남자 중의 상남자인 헨리크 공작이다.
선전포고를 했으면 했지.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팔 영웅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처럼 잔꾀를 부리거나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대화를 시도하는 지금이 더욱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헨리크가 가진 고유 기술을 떠올렸다.
[정정당당한 결투]
상대방과의 결투를 벌입니다!
승리한 세력의 사기가 오릅니다.
결투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50% 증가합니다.
일기투를 해서 이기면 부대 전체의 사기가 올라가고 경험치 획득 버프를 얻는다.
이런 헨리크 공작과 전투를 한다? 미쳤지.
1:1로 이겨볼만한 영웅이 에리엘밖에 없다. 거기에 이길 확률도 낮다.
사기를 풀 충전한 부대랑 붙으면 이길 싸움도 질 확률이 생기는 법.
나는 불확실한 요소에 베팅하는 걸 싫어한다.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건 우리에게 호재야.'
저쪽에서 당당하게 나오는데 내가 뺄 이유는 없다.
이 쪽에서 거절한다면 헨리크의 호감도가 떨어질 테니까.
적의 호감도를 높이는 것은 여러가지로 영향을 끼친다.
항복권고를 받아내기도 쉽고 배신의 확률도 올라간다.
배신하지 않는 헨리크의 경우엔 항복권고 정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르벨스는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기회다.
***
"미쳤어... 그걸 왜 간다고 하는 거야? 진짜로 돌아버린 거 아냐?"
"안가면 우리에게 손해야. 무조건 가야 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안 죽는다니까. 나를 몰라?"
"알지만... 걱정되잖아!"
마르벨스로 떠나기 전, 노아가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귀가 따가웠다.
적진으로 들어가겠다니.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마차에 탑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니,
에리엘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정말로 호위도 필요 없나?"
"예. 호위가 있다 하더라도 제 목숨을 지키는 건 불가능 할테니까요."
소드마스터 중급의 경지에 올라있는 헨리크 공작이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소드마스터 미만의 경지인 영웅이라면 10합 내로 두동강이 날 터.
그럴 바엔 단신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내가 죽더라도 영웅 손실은 피해야하니까.
지극히 손익을 따진 결론이었다.
"아무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마차에 탑승하기 위해서 발을 뻗었다. 다른 영웅들의 나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마치 내가 어디 죽으러 가는 걸 보는 듯하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닌데.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 멈춰줬으면 한다.
눈가가 촉촉한 노아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쪽. 하고 가볍게 키스했다.
"... 기다릴게."
"저기...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알바야? 빨리 돌아오기나 해."
다른 영웅들이 우리를 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어우. 이제는 우리가 이런 사이인 걸 다 알겠네.
마차에 탑승하고 문을 닫자,
마르벨스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영웅들의 모습은 천천히 멀어지고 이제는 밖에 숲과 초원밖에 보이지 않는다.
풍경들을 보며 멍때리고 있으니 괜히 걱정이 생긴다.
마르벨스에 가면 헨리크랑 무슨 대화를 해야 하지?
씁. 진짜로 가자마자 칼로 찌르는 거 아닌 가 몰라.
그렇게 된다면 게임 재시작은 할 기회를 줬으면 하는데.
진짜로 도착하자마자 칼에 찔리면 억울해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느 덧, 마르벨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4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지만, 의외로 빨리 도착한 기분이었다.
마르벨스의 성벽이 점점 가까워지고, 내가 아는 모습이 보인다.
오드웰 연합군 인장이 달린 마차를 본 병사들이 창을 들어 올려 경계했다.
무슨 일인가 싶겠지. 잠시 마차가 멈춘 뒤에 병사들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마차가 마르벨스의 영지로 들어간다.
나는 주위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벨스에 등장한 오드웰 연합군의 마차니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하겠지.
이대로 영주가 있는 성으로 들어갈 때까진 계속 시끄러울 게 분명하다.
나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내가 고인물이라 한들, 헨리크 공작. 그는 조금 부담스러운 상대다.
정직하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꼼수가 없다는 말이다.
헨리크 공작은 꼼수 없이 강하다. 정직하게 검을 휘두르고 강함을 표출한다.
온갖 꼼수와 노하우로 무장한 나랑은 정반대인 사내다.
그런 사내와 1:1로 대화를 해야 한다니.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쉽지않다.
"도착했습니다. 강한윤 중위님."
엘프 마부가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막상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오자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뒤에 나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성의 입구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인파가 몰려있었다.
인간..?
오드웰 연합군에 인간이 있다고?
검은머리인데 북부의 사람인가?
뭐지? 진짜로 인간이야? 엘프가 아니고?
내가 등장하고 나서 모두가 술렁인다.
엘프, 수인, 오크, 드워프가 뭉쳐서 만든 연합군의 대표로 인간이 튀어나왔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서 귀가 따갑지만, 한 사내의 목소리에 한 순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모두 조용히 하도록!"
벼락같이 우렁찬 목소리가 성 쪽에서 들렸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헨리크 공작이 이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척추를 반으로 접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보이는 전완근과 우락부락한 상체.
온 몸에 남성 호르몬이 넘치고 있었다.
헨리크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 엘프는 아닌 것 같은데?"
"예. 오드웰 연합군의 대표로 온 인간. 강한윤 중위라고 합니다."
"연합군 대표의 인간이라고?"
헨리크 공작의 말엔 명백하게 비웃음이 섞여있었다.
"허. 오드웰 연합군 녀석들. 비겁하기 짝이 없군. 나는 대표가 오라고 했을 터인데.
인간이라! 내 의미를 이해 못한 건가?"
불같이 화를 내던 헨리크 공작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그래. 인간. 같은 인간끼리 대화를 하라는 건가? 돌아가라. 아니, 내가 그럴 필요도 없게 해주지."
헨리크 공작이 검을 뽑았다.
..이게 아닌데?
나는 마르벨스에 도착하자 마자 죽을 위기에 처했다.
* * *